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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아메리카] 유럽 인상파와 교류한 화가 매리 카사트


[인물 아메리카] 유럽 인상파와 교류한 화가 매리 카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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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문화, 다양한 인종이 함께 모여사는 미국, 오늘의 미국이 있기까지 중요한 발자취를 남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인물 아메리카입니다. 이 시간에는 19세기 유럽의 인상파 화가들과 함께 뛰어난 작품을 많이 남긴 미국 여류화가 매리 카사트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매리 카사트의 작품들은 특히 여성과 어린이들의 모습을 가장 아름답게 표현한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매리 카사트는 1844년 펜실베이니아 주 피츠버그 부근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로버트는 부유한 투자가였고, 어머니 캐서린은 예술과 프랑스 어문학, 그리고 서적에 관해 조예가 깊은 여성이었습니다. 매리가 여섯살 때 기족은 유럽으로 건너가 여러 해를 살았습니다.

아버지 로버트 카사트는 자녀들에게 유럽의 문화를 경험하고 그곳에서 교육을 받도록 해주었습니다. 처음 2년 동안은 프랑스 파리에서 살다 그 다음에는 독일의 하이델베르그로 갔습니다.

파리에 머무는 동안, 매리는 가족과 함께 'Universal Exhibition'으로 불리우는 박람회를 구경했습니다. 이 행사는 프랑스의 예술과 산업의 성공을 집중적으로 부각하고 있었습니다. 매리는 여기서 당대 프랑스의 가장 유명한 화가들의 작품을 많이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미술관에 전시된 유럽 인상파 화가 작품 표면에 관람객 얼굴이 비치고 있다.
미술관에 전시된 유럽 인상파 화가 작품 표면에 관람객 얼굴이 비치고 있다.

그 시기 프랑스 미술계에서는 기존의 화풍에 도전하는 새로운 사조가 일고 있었습니다. 이른 나이지만 매리는 프랑스의 예술계에서 일고 있는 그같은 새로운 흐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1855년 카사트 가족은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습니다.

19세기 미국에서는 부잣집 여성들이 직업을 갖는 일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나 매리 카사트는 달랐습니다. 매리는 미술 공부가 단순히 재미로 하는 것만은 아니며, 자신의 미래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17살이 됐을 때 매리는 펜실베이니아 미술 아카데미에 들어갔습니다. 아버지 로버트는 매리가 화가가 되려는데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매리는 반대를 무릅쓰고 그림공부를 계속했습니다. 매리는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러나 충분한 훈련을 받기 위해서는 유럽엘 가야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러나 당시는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벌어지던 때라 유럽 여행을 할수가 없었습니다.

매리는 1866이 돼서야 파리를 다시 방문할 수 있었습니다. 매리는 4년 동안 파리와 그외 작은 도시에서 공부했습니다. 그러나 여성이라는 이유로 파리에 있는 프랑스 미술 아카데미에는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매리는 자기 스스로 교과 과정을 만들어 공부했습니다. 매리는 루불 박물관에 걸려 있는 위대한 작품들을 모사하는데 열중했습니다. 또 여러 선생들 한테서 그림을 배웠습니다.

1868년, 매리 카사트의 작품 하나가 파리 살롱전에서 채택됐습니다. 이 미술전은 프랑스 정부가 운영하는 미술 아카데미에서 주관하는 것이었습니다. 2년 후 같은 살롱에서 그녀의 두번째 작품이 채택돼 전시됐습니다. 이때부터 그녀의 성공적인 화가의 길이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1870년 매리 카사트는 고향 펜실베이니아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고향에서의 삶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아버지는화가로 살려는 딸을 더 이상 지원하지 않았습니다. 매리 카사트는 뉴욕 시에서 전시를 했으나 아무도 그의 작품을 사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카사트는 시카고에서도 전시를 했습니다. 그러나 엎친데 덮친 격으로1871년 전 도시를 완전히 태운 대화재로 그의 작품도 모두 타버리고 말았습니다.

다행히, 펜실베이니아 주 피츠버그에 있는 한 종교단체가 이탈리아의 파르마에 있는 유명한 두점의 성화를 복사하기 위해 카사트를 고용했습니다. 이 일을 위해 카사트는 자신이 좋아하는 유럽을 다시 가게 됐습니다. 파르마에 있는 동안 그의 그림은 많은 호평을 받았습니다.

카사트의 작품은 파리 살롱에서도 계속 채택이 됐습니다. 그러나 카사트는 공적인 예술계의 틀에 박힌 전통적 가치에 실증이 났습니다. 파리 살롱은 그곳만의 고집스런 가치로 굳어져 있었습니다. 파리 살롱은 밝은 색이나 특이한 주제나, 또는 어떤 형식의 실험적 표현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매리 카사트는 공적 미술계의 기존의 틀에 머무를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좋아하는 길을 택할 것인지 결정해야 했습니다.

매리 카사트는 인상파로 불리우는 일종의 반란 화가들에게서 답을 찾았습니다. 종종 파리 미술 상가를 찾은 카사트는 어느날 에드가 드가의 작품을 보고 반해버렸습니다. 드가의 작품은 이후 카사트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1877년 에드가 드가가 카사트의 화실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을 따라, Independents, 독립인들로 불리우는 화가 그룹에 가입하자고 권했습니다. 이 그룹이 바로 나중에 인상주의 화가로 불리우는 사람들의 모임이었습니다. 여기에는 끌로드 모네, 어거스타 르노와르, 카밀 피사로 등이 있었습니다.

드가를 비롯한 이들 화가들은 파리 살롱의 규정과 제한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인상파 화가들은 빛의 효과와 인간의 눈이 주제를 어떻게 보는가를 그리는데 주안점을 두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일상 생활을 그렸습니다. 전통 미술에서는 보통 역사나 문학에 나오는 장면들을 상상으로 그린 것과는 크게 다른 방식이었습니다.

카사트는 드가가 인상주의 그룹으로 자신을 초대하자 기쁜 마음으로 즉각 합류했습니다. 카사트는 이제야 진짜 내 삶이 시작됐다고 말했습니다. 이후 카사트는 드가와 가까운 친구가 됐습니다. 카사트는 1879년의 두번째 인상파 전시회에 출품하기 위해 2년 동안 열심히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이 무렵 부모들이 파리로 왔습니다. 아버지 로버트가 결국 딸의 재능과 화가로서의 인생을 인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딸의 성공을 축하해 주었습니다.

이 시기에 그려진 작품 중의 하나가 어머니가 신문을 읽고 있는 모습입니다. 제목은 "Reading Le Figaro." 피가로 신문을 읽고 있는 어머니라는 뜻입니다. 섬세한 붓 터치로 방안에 비치는 햇볕을 온화하게 표현한 작품입니다.

카사트는 인상주의에 오래 머물지는 않았습니다. 늘 틀에 짜인 미술 형식에 얽매이기 싫어하는 카사트는 1890년대, 목판화에 손을 대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여러 편의 일본 목판화를 보고 매력을 느낀데서부터였습니다. 그중 하나가 “목욕하는 여인”입니다. 또 다른 작품 “아기 돌보기”는 단순한 선으로 어머니의 깊은 사랑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카사트는 파리에서 이 전시회를 열면서 복사본을 많이 팔았습니다.

그후 카사트는 어머니와 아이들을 작품의 주제로 많이 등장시켰습니다. “사과를 따는 아이”에서는 어머니 품에 안긴 아이가 신비로운듯 사과를 향해 손을 뻗고 있습니다. “보트 파티”는 조그마한 보트에 엄마와 아기가 타고 뒷모습으로 보이는 남성이 노를 젖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과감하고도 창의적인 선과 구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카사트는 1893년 또 한차례 성공적인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한 평론가는 ‘어떤 화가도 가족의 분위기를 시처럼 표현한 인물이 없다’며 캐사트를 친양했습니다. 카사트가 활동하던 시기 그는 단연 최고로 성공적인 화가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카사트는 프랑스 농촌 지역에 저택을 구입하고 그것을 젊은 예술가들을 돕는데 사용했습니다. 카사트는 또 부유한 미국인들이 인상주의 화가들의 우수한 작품을 구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매리 카사트는 미국인들도 국내에서 좋은 그림 공부를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노력으로 많은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이 미국 미술관이나 소장가들에게 전해졌습니다.

오늘날 카사트의 작품은 구하기도 어렵지만 경매에서는 한점에 수백만 달러를 홋가하고 있습니다. 2007년 뉴욕의 크리스티 경매에서는 “강아지와 노는 아이들”이라는 작품이 620만 달러에 거래되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카사트는 미국 여성들의 참정권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이 운동을 위해 카사트는 자신의 작품을 전시회에 내놓기도 했습니다.

프랑스 정부는 미술에 대한 그의 기여를 인정해 레지옹 훈장을 수여했습니다. 카사트는 미술계 여러 곳에서 최우수 작가로 상을 주려 했지만 대부분은 사양했습니다. 그녀 자신은 초기의 독립적인 미술계의 일원이었고, 그래서 심시위원이니, 메달이니, 표창이니 하는 것들은 거부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카사트는 60대 후반까지 계속 여행을 다니며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는 시력이 나빠져 그림을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평생을 독신으로 산 매리 카사트는 1926년 82세로 프랑스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오늘날 매리 카사트의 작품들은 이곳 워싱턴의 국립 미술관을 비롯한 세계 여러 유명 미술관에 전시돼 방문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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