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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 예수' 카폰 신부, 70년 만에 고향 안장…"가장 암울한 시기 기적 일궈"


미군 군종 신부로 참전한 에밀 카폰 신부의 조카 레이먼드 카폰 씨가 지난 2013년 4월 바락 오바마 당시 대통령이 카폰 신부에게 추서한 ‘명예훈장(Medal of Honor)’을 들고 있다.
미군 군종 신부로 참전한 에밀 카폰 신부의 조카 레이먼드 카폰 씨가 지난 2013년 4월 바락 오바마 당시 대통령이 카폰 신부에게 추서한 ‘명예훈장(Medal of Honor)’을 들고 있다.

‘한국전쟁의 예수’로 불리는 에밀 카폰 신부가 70년 만에 고향에 잠들었습니다. 국방부 산하 전쟁포로실종자확인국(DPAA)은 카폰 신부에 대해 ‘역사상 가장 암울한 시기에 기적을 행한’ 영웅이라고 밝혔습니다. 이조은 기자가 보도합니다.

한국전쟁에 미 군종신부로 참전했다 전사한 에밀 카폰 신부의 장례미사가 지난달 29일 고향 캔자스 주에서 엄수됐습니다.

[녹취:현장음] “Emil Joseph Kapaun died with Christ and rose with him to a new life…”

‘AP’ 통신 등에 따르면 이날 장례미사는 캔자스 주 위치타의 대형 공연장인 ‘하트만 아레나’에서 사제와 군인, 학생 등 수천 명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됐습니다.

현지 지역 TV로 생중계된 이날 장례미사는 천주교 의전과 군 의전이 혼합된 형태로 진행됐습니다.

카폰 신부의 조카 레이먼드 카폰 씨는 이날 추도연설에서 카폰 신부가 북한 내 수용소에서 숨을 거두기 얼마 전 미국 국가를 부르자 옆에 있던 동료들이 따라 부르기 시작하며 서로에게 힘이 되어 준 일화를 소개했습니다.

[녹취: 카폰 씨] “Example of one person can make a difference, that one person has made a difference. And still making a difference every day. We can do this mass. I think we all need to be singing as loudly as we can because we want to carry on his work. We've got to carry on his passion.”

카폰 씨는 이 일화가 “한 사람이 변화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며 “그 변화는 여전히 매일 일어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장례미사 절차의 마지막으로 부를 노래인 미국 국가를 모두가 힘차게 부르며 카폰 신부의 업적과 열정을 이어가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전사한 지 약 70년이 흐른 지난 3월 신원이 확인된 카폰 신부의 유해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지난달 25일 카폰 신부의 고향 마을인 필센에 도착했고, 이어 장례 절차를 위해 위치타로 이동했습니다.

이날 장례미사 후 카폰 신부의 유해가 담긴 관은 마차에 실려 재향군인기념공원에서 안장지인 성모무염시태 성당으로 옮겨졌습니다.

로라 켈리 캔자스 주지사는 장례미사 당일을 ‘에밀 카폰 신부의 날’로 선포했습니다.

앞서 지난 3월 연방 상하원에서는 캔자스 주를 지역구로 둔 공화당 로저 마샬 상원의원과 트레이시 맨 하원의원이 각각 카폰 신부를 추모하는 결의안을 발의해 채택됐습니다.

국방부 산하 전쟁포로실종자확인국(DPAA)은 카폰 신부의 유해가 고향으로 옮겨진 지난달 25일부터 관련 소식을 홈페이지 첫 화면에 띄우며 카폰 신부의 일생과 업적을 애도하고 있습니다.

DPAA는 홈페이지에 올린 관련 소식에서 “카폰 신부는 모든 희망이 사라진 역사상 가장 암울한 순간에 기적을 행했다”며 한국전은 “’잊혀진 전쟁’이라고 불릴 수 있지만 모든 사람은 카폰 신부의 이름을 기억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특히 “카폰 신부는 수용소 내 사람들에게 이타적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일관되게 가르쳤다”며 “수용소에서 카폰 신부와 함께 했던 모든 사람들은 카폰 신부를 진정한 영웅이자 ‘기적의 사람’이라고 말한다”고 전했습니다.

카폰 신부는 2차 세계대전 참전 뒤 1949년 군종신부로 다시 복무했고,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1950년 7월 육군 군종 사제로 한국에 파견됐습니다.

카폰 신부의 부대는 그 해 11월 운산전투 도중 중공군에 포위됐다가 안전한 곳으로 후퇴했지만, 카폰 신부는 뒤에 남아 부상자들을 돌보다 포로로 붙잡혀 60마일 넘게 떨어진 포로수용소 ‘캠프5’에 수감됐습니다.

카폰 신부는 수용소에서도 부상자들을 계속 도왔고, 6개월여 후 건강 악화와 영양부족으로 폐렴에 걸려 투병하다 1951년 5월 23일 35세의 나이로 숨졌습니다.

카폰 신부의 유해는 1953년 한국전 정전협정의 일환으로 미국에 돌아온 1천868구의 유해에 포함됐지만, 신원 미상으로 분류돼 하와이 호놀룰루에 있는 국립묘지에 묻혀 있다가 약 70년 만인 지난 5월 신원이 확인됐습니다.

캔자스 주가 지역구인 공화당 론 에스테스 하원의원은 지난달 30일 본회의장 연설에서 “카폰 신부는 35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더 많은 것을 희생했고, 많은 사람들이 100년 안에 할 수 있을 것보다 더 많은 생명과 영혼을 구했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에스테스 의원] “In 35 short years, Father Kapaun sacrificed more and saved more lives and souls than many could ever hope to do in 100 years.”

에스테스 의원은 특히 “카폰 신부는 “전투가 끝난 후 그의 부대와 안전하게 탈출할 수 있는 선택권이 주어졌을 때 자원해 뒤에 남아 부상자를 보살피고 성역을 베풀었다”고 강조했습니다.

[녹취:에스테스 의원] “After the battle, when given the option to escape to safety with his unit, Father Kapaun volunteered to stay behind to care and minister to the wounded…Although greatly suffering himself, he always put his needs second to others. His strength and optimism allowed his fellow GIs to once again believe that they would one day return to freedom in America.”

이어 “카폰 신부는 큰 고통을 겪으면서도 항상 자신보다 타인의 필요를 우선시했다”며 “카폰 신부의 강인함과 낙천주의는 동료 군인들이 언젠가는 미국에서 자유를 되찾을 것이라고 다시 한번 믿게 했다”고 말했습니다.

에스테스 의원은 “수 세대 동안 카폰 신부는 역경을 통해 더 큰 신앙과 봉사를 하도록 전 세계 수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줬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면서 “카폰 신부는 진정한 미국의 최고 영웅”이라고 강조했습니다.

한국전쟁 후 카폰 신부의 업적은 널리 알려져 로마 가톨릭교회는 1993년 카폰 신부에게 ‘하느님의 종’이란 칭호를 수여했고, 2013년 4월 바락 오바마 당시 대통령은 카폰 신부에게 명예의 훈장을 추서했습니다.

DPAA에 따르면 카폰 신부의 일생과 업적은 2014년 로마 가톨릭교회에 공식 전달됐고, 로마 가톨릭교회가 카폰 신부를 성인으로 추대하기 위한 투표를 할 준비를 하던 도중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사태가 터져 현재 절차가 일시 중단됐습니다.

한편, DPAA가 지난달 28일 갱신한 통계에 따르면 한국전 참전 미군 중 신원이 확인된 전사자는 602명, 여전히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전사자는 7천554명으로 집계됐습니다.

VOA 뉴스 이조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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