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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아메리카] 소아마비 백신을 개발한 의학자, 조나스 소크


[인물 아메리카] 소아마비 백신을 개발한 의학자, 조나스 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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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미국을 건설한 위대한 미국인을 만나보는 '인물 아메리카'. 소아마비 백신을 개발한 의학자, 조나스 소크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지난 1954년 10월 미국 펜실베니아주 피츠버그에서 조나단 소크가 자신이 개발한 백신 테스트 튜브를 보고 있다.
지난 1954년 10월 미국 펜실베니아주 피츠버그에서 조나단 소크가 자신이 개발한 백신 테스트 튜브를 보고 있다.

1950년대 미국의 여름은 많은 부모에게 공포와 불안의 계절이었습니다. 수많은 어린이들이 폴리오 바이러스에 감염돼 사망하거나 불구가 되는 질병, 소아마비가 만연하는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두려움은 조나스 소크(Jonas Salk) 박사가 백신을 개발함으로써 사라졌습니다.

조나스 소크 박사는 1914년 10월 28일 뉴욕시에서 태어났습니다. 러시아에서 이주해 온 유대인 가정이었습니다. 부모들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자녀들은 반드시 성공한 인생을 살도록 해주어야겠다는 결심이 강한 분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아이들에게 열심히 공부하도록 자극하고 격려했습니다.

조나스는 13살 때 영재들이 다니는 타운센드 해리스 고등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재능은 있지만 가난한 이민가정 자녀들이 들어갈 수 있는 사립학교였습니다. 고등학교 때의 조나스는 완벽주의자였습니다. 적극적이고, 집중적이고, 진지했으며, 손에 잡히는 책이라면 무엇이든 다 읽어야 했습니다.

이어 소크 집안 첫 대학생으로 조나스는 뉴욕시티칼리지에 들어갔습니다. 법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지만 곧 의학으로 방향을 바꾸어 뉴욕대 의과대학으로 옮겨갔습니다. 조나스는 차츰 환자 치료보다는 의학 연구에 더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뉴욕에 있는 마운트사이나이병원에서 치른 인턴 과정도 환자 진료보다 연구에 집중했습니다. 이어 조나스 소크는 미시간대학교에서 주는 장학금으로 독감 바이러스를 연구하게 됐습니다.

젊은 조나스는 병에 대한 면역성을 강화시켜 주면서도 바이러스의 감염력을 약화시키는 것을 만들어내고 싶었습니다. 소크는 바로 여기서 성공을 했고, 그것이 앞으로 소아마비 백신을 연구하는 기반이 됐습니다.

소아마비를 가져오는 폴리오 바이러스는 1955년 소크 박사의 백신이 나오기 전까지 세계에서 가장 무서운 질환의 하나였습니다. 1952년에는 감염자 중 2만천여 명이 불구가 되고 3천100여 명이 사망했습니다. 희생자는 대부분 어린이들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과학자들은 폴리오 감염을 치료하거나 예방하는 방법을 개발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피츠버그 의과대학에서 근무하던 소크 박사는 전국 어린이 장애 기금의 지원으로 여러 종류의 폴리오 바이러스를 규명하는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소크 박사는 연구팀을 구성해 7년 동안 백신 개발에 매달렸습니다. 미국 의학 연구 사상 가장 정교한 현장 실험으로 평가되는 소크 박사의 백신 연구에는 2만여 명의 의사들과 공공보건 관계자, 6만4천여 명의 학교 관계자, 22만 명이 넘는 지원자들이 동원됐습니다.

드디어 1955년 4월 12일, 최초의 효과적인 백신, 안전하고 확실하게 바이러스를 막아낼 수 있는 백신이 나왔다는 소식이 공식 발표됐습니다. 조나스 소크 박사의 백신은 환자를 감염시키는 위험성을 갖지 않는, 죽은 바이러스를 주입해 면역이 생기도록 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소크 박사는 기적을 이루어 낸 인물로 찬사를 받았습니다. 발표가 나오는 날 사람들은 마치 축제일인 것처럼 기뻐했습니다.

백신은 그해부터 미국에서 실제 사용에 들어갔습니다. 세계적으로도 즉각 백신 접종 물결이 일었습니다.

소크 박사는 당대 유명한 방송인 에드 머로우로부터, 누가 특허를 갖고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는 “국민이라고 말할 수 있겠죠. 특허란 없습니다. 태양에 대한 특허를 가질 수 있습니까?”라고 반문했습니다.

자신은 백신으로 돈을 벌 생각이 없다고 밝힌 것입니다. 다만 그 백신이 가능한 한 널리 보급되는 것을 보고 싶을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특허를 받는다면 백신의 가치는 당시 약 70억 달러로 추산됐습니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소크 박사를 백악관으로 초청해, 그의 공적을 치하했습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소크 박사를 인류의 은인이라고 부르면서, 그의 노력은 겸손하고 헌신적인 연구의 최고 모범이라고 치하했습니다. 폴리오 백신은 세계보건기구(WHO)의 ‘가장 안전하고 가장 효과적인 필수 의약품’ 목록에 등재됐습니다.

소크 박사의 백신은 주사로 투여하는 것이었으나 얼마 후에는 살아 있는 바이러스에서 나오는 백신이 개발돼 경구용, 즉 입으로 복용할 수 있는 제품이 나왔습니다. 또한 죽인 바이러스에서 나오는 소크 박사의 백신은 극히 일부의 경우였지만, 완전 면역이 되지 않는다는 사례도 나타났습니다. 미국의 보건 당국은 주사 백신보다 경구용 백신을 보급하도록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살아 있는 바이러스로 준비된 백신을 경구용으로 사용하는 과정에서 일부 환자들이 면역이 아니라 오히려 소아마비에 걸리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미국에서 보고된 몇 가지 새로운 소아마비 케이스는 아마도 백신이 소화 기관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돌연변이를 일으켜 독성을 회복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여전히 소크 박사의 방식을 사용한 나라에서는 소아마비가 사실상 사라졌습니다. 이에 많은 국가에서는 소아마비 백신을 경구용에서 다시 주사용으로 바꾸어 접종했습니다.

소크 박사는 1960년 캘리포니아주 라호야(La Jolla)에 조나스 소크 생물학 연구소를 설립했습니다. 의학과 과학 연구를 위한 혁신적인 센터였습니다. 소크 박사는 연구를 계속하고 여러 저서를 냈습니다. 일부 저서는 역시 의학 연구를 하는 두 아들과 함께 내기도 했습니다. 소크 박사는 말년에 들어 후천성 면역 결핍증(AIDS) 백신 개발에 몰두했습니다.

소크 박사는 의대 졸업 후 사회복지 전공자인 다나 린제이와 결혼해 세 자녀를 두었고, 이혼 후에는 프랑스 화가 프랑수아즈 질로와 재혼했습니다.

소크 박사는 80세 때인 1995년 6월 23일 캘리포니아에 있는 자택에서 심장 질환으로 타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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