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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아메리카] “부자인 채로 죽는 것은 수치다” 앤드루 카네기


미국의 철강 재벌이자 자선가였던 앤드루 카네기.
미국의 철강 재벌이자 자선가였던 앤드루 카네기.

다양한 분야에서 미국을 이끌어 가는 사람들을 만나보는 '인물 아메리카'. 오늘은 재산의 90%를 공공의 이익을 위해 바친 기업인, 앤드루 카네기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인물 아메리카 오디오] “부자인 채로 죽는 것은 수치다” 앤드루 카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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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드루 카네기는 철강산업으로 19세기 미국 최고의 부를 쌓고 그 다음에는 재산의 90% 이상을 공공의 이익을 위해 바친 기업인이자 자선 사업가였습니다.

앤드루 카네기는 1835년 스코틀랜드에서 가난한 직물공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카네기 가족은 1848년 미국으로 이주했습니다. 이들은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어린 앤드루는 집안이 가난해 학교에 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명석했고 열심히 일하는 소년이었습니다.

앤드루는 섬유공장에서 일주일에 1달러 20센트를 받고 새벽부터 밤까지 허드렛일을 했습니다. 이어 전보 배달원이 돼서 마을 곳곳을 뛰어다녔습니다. 그러는 중에도 모르스 코드를 배워 시간만 나면 연습을 했습니다. 그런 노력으로 앤드루는 16살 때 전보 기사가 됐습니다. 기술자가 된 앤드루는 펜실베이니아 철도회사에 전보 기사로 취직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앤드루는 열심히 책을 읽어 지식을 넓혀 갔습니다. 책은 주로 동네의 사설 도서관에서 빌려 보았습니다. 그때의 독서는 앤드루 카네기 일생의 지적 바탕이 됐습니다. 앤드루는 책을 빌려준 당시 도서관의 고마움을 늘 잊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부자가 돼서 엄청난 수의 공공 도서관을 짓도록 한 건 그러한 경험에 바탕을 둔 것이었습니다. 18살 때는 펜실베이니아 철도의 서부 지역 감독의 비서가 되고 차츰 승진해 피츠버그 지역 철도 감독이 됐습니다.

이때부터 카네기는 사업에 눈을 돌려 투자를 시작했습니다. 사업기회를 포착하는데 뛰어난 안목을 가진 카네기는 은행으로부터 돈을 빌려 철도의 침대차 회사에 투자하는가 하면 제철, 증기선 사업, 철도, 유전 등에도 투자해 불과 나이 30에 상당한 재산을 모았습니다.

카네기는 차츰 제철 분야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습니다. 수시로 영국을 방문해 철강 산업이 성장하는 것을 보고 철강 사업을 구상합니다. 이 무렵 미국에서는 남북전쟁이 벌어졌습니다. 1861년부터 5년간 계속된 이 전쟁은 미국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운 처절한 싸움이었습니다.

전쟁 발발과 함께 카네기는 북군 사령관으로부터 철도를 이용한 병력의 수송과 전신을 전담하는 임무를 부여 받았습니다. 전쟁 중에는 군함, 대포, 포탄 등 수 많은 군수물자 생산에 막대한 양의 철이 필요했고, 그 바람에 카네기의 사업은 크게 확대됐습니다. 전쟁이 끝난 1865년에는 철도회사를 그만두었습니다. 전쟁 후에도 철강업의 호황으로 카네기의 사업은 날로 번창했습니다.

카네기는 1870년대부터 미국 산업계에 일기 시작한 기업합병 붐을 타고 석탄, 철광석, 철도, 선박업 등을 계열화하는 대그룹을 형성했습니다. 1892년에 설립된 카네기 철강회사(Carnegie Steel Company)는 당시 세계 최대의 철강 트러스트로, 미국 철강 생산의 4분의 1 이상을 생산했습니다.

카네기는 무자비한 파업 저지, 노조 강제 해산 등으로 비난도 많이 받았습니다. 이런 가운데서도 1900년 카네기 철강의 생산량은 10배가 넘게 증가했고, 매출은 20배 이상 올랐습니다.

1901년 카네기는 자신의 철강회사를 JP모건(JP Morgan)에 약 5억 달러에 매각했습니다. 철강회사를 매각하고 돈을 따져보니 카네기는 미국 최고의 재산가였습니다. 이때 카네기의 나이는 66세. 카네기는 실업계에서 은퇴하고 본격적인 자선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인생의 앞부분은 돈을 모으는 시기, 뒷부분은 남을 위해 쓰는 시기라고 생각해 온 카네기에게 이제 ‘부를 나누는 시기’가 된 것입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브래독에 1888년에 세워진 카네디 공공 도서관.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브래독에 1888년에 세워진 카네디 공공 도서관.

카네기의 자선 활동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2천500개가 넘는 공공도서관 건립이었습니다. 그 중 1천700개 가까이는 미국에, 나머지는 영국, 호주, 뉴질랜드 등 영어를 사용하는 나라에 세워졌습니다. 카네기에게는 도서관의 ‘수호성인’이라는 별명이 붙여졌습니다.

카네기는 교육 분야에 가장 많이 투자했습니다. 피츠버그에는 카네기멜런 대학을 건설했습니다. 미국 대학의 연구 지원을 위한 워싱턴의 카네기 인스티튜트, 학문적 연구 활동을 지원하는 카네기 재단도 설립했습니다. 대학교수들의 노후를 도와주기 위한 카네기 교육진흥재단도 세웠습니다.

그는 또 각종 문화예술 분야에 거액을 돈을 쾌척했습니다. 카네기홀, 카네기 박물관, 뉴욕의 카네기코퍼레이션 등이 모두 그가 만든 단체들입니다.

생의 마지막이 가까워져 올 무렵 카네기에게는 최종적인 목표가 남아 있었습니다. 그것은 세계평화의 달성이었습니다. 1910년에는 국제적인 충돌을 막기 위해 카네기 국제평화기금(Endowment for International Peace)을 설립했습니다. 그러한 노력은 제1차 세계대전이 벌어질 때까지 계속됐습니다.

카네기는 54살이던 1889년 ‘North American Review’ 에 ‘부의 복음 (Gospel of Wealth)’이라는 글을 실었습니다. “우리 시대의 문제는 ‘부를 어떻게 관리하는가’이다…”로 시작되는 이 에세이는 모든 자선사업의 기본지침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재산을 저승으로 가져갈 수 없다. 일생 쌓은 부는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한다. 자손에게 부를 물려주는 것은 물려받은 자에게 불행을 초래하기 때문에 좋은 방법이 아니다. 자식에게 막대한 유산을 남겨주는 것은 독이나 저주를 남겨주는 것과 같다. 사람이 부자인 채로 죽는 것은 수치스러운 죽음이다.”

카네기는 1919년 8월 11일 매사추세츠주 레녹스에서 84세로 숨을 거뒀습니다. 직접적인 사인은 폐렴이었습니다. 뉴욕주 슬리피할로우에 있는 그의 묘비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습니다. “자신보다 현명한 사람들을 주위에 모으는 법을 알고 있는 사람, 여기 잠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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