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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아메리카] 코닥 필름으로 세계를 지배한 조지 이스트먼


이스턴 코탁 회사의 설립자이자 발명가인 조지 이스턴. (제공: Kodak)
이스턴 코탁 회사의 설립자이자 발명가인 조지 이스턴. (제공: Kodak)

다양한 분야에서 미국을 이끌어 가는 사람들을 만나보는 '인물 아메리카'. 오늘은 코닥 필름으로 세계를 지배한, 조지 이스트먼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인물 아메리카 오디오] 코닥 필름으로 세계를 지배한 조지 이스트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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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닥 필름과 카메라 개발로 사진 문화의 혁신을 가져온 조지 이스트먼은 1854년 미국 동부 뉴욕주 워터빌에서 태어났습니다. 가난과 아버지의 조기 사망 등 어려운 환경에서 자란 이스트먼은 13살까지 공립학교에 다닌 것이 정식 교육의 전부였습니다. 그 후로는 보험 판매, 은행원 등으로 집안을 꾸려갔습니다.

어느 날 같이 일하는 은행 동료 한 사람이 사진 찍으러 여행을 가자고 제안했습니다. 흥미 있는 제안이었지만 이스트먼은 무거운 장비 때문에 엄두가 나지 않아 여행을 포기했습니다. 평소 과학에 흥미를 갖고 있던 이스트먼은 대신 좀 더 간편하게 사진을 찍을 수 없나를 궁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스트맨에게는 부엌이 곧 실험실이었습니다. 당시의 사진 촬영이란 유리판에 영상을 기록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약 3년 동안 유리판을 줄이는 방법을 연구하던 이스트먼은 어느 날 기존의 약물보다 훨씬 감도가 좋은 유제를 만들어 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유리판 대신 종이에 약물이 입혀진 가벼운 필름을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돌돌 말 수 있는 롤필름(roll film)이 탄생했습니다.

획기적인 개발이었지만 작은 필름만 있다고 사람들이 쉽게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건 아니었습니다. 이스트먼은 1888년 필름이 장착된 작은 카메라를 출시했습니다. 많은 짐을 지고 다닐 필요 없이 간편하게 찍을 수 있는 코닥 카메라는 혁명적인 제품이었습니다.

그리고 “버튼만 눌러주세요, 나머지는 알아서 처리해 드립니다. (You press the button, we do the rest)”라는 구호를 내걸고 카메라를 홍보했습니다. 사람들은 다 찍고 나면 카메라를 로체스터에 있는 코닥사로 보냅니다. 그러면 코닥사는 필름을 현상, 인화해서 고객들에게 보내주었습니다.

이스트먼은 알파벳 케이(K)의 발음을 좋아했습니다. 그는 상표 명에 반드시 K자가 들어가야 된다고 주장했고, 마치 셔터를 누를 때 나는 소리와 비슷한 ‘코닥(K.O.D.A.K.)’으로 지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그리고 정식으로 이스트먼 코닥이라는 회사를 설립했습니다.

이스트먼은 이어서 셀룰로이드로 만든 최초의 투명한 롤필름을 개발했습니다. 이 필름의 등장으로 포켓 카메라 즉 주머니에 넣고 다닐 수 있는 카메라, 접는 포켓용 카메라가 연이어 나왔습니다. 카메라의 대중화는 곧 전 세계로 확산됐습니다.

이스트먼은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고 1900년 대량 생산 시스템으로, 자신의 꿈이던 1달러 카메라, 어린이도 찍을 수 있는 브라우니를 내놓았습니다. 이 카메라는 간편한 사용법, 멋진 디자인으로 1년 만에 25만 개나 팔렸습니다. 이스트먼이 그 전 12년 동안 판매한 모든 카메라보다 많은 수였습니다.

지난 1910년 미국 뉴욕주 로체스터에 위치한 '코닥' 본사.
지난 1910년 미국 뉴욕주 로체스터에 위치한 '코닥' 본사.

혁신을 거듭한 코닥사는 잉크, 토너, 프린터, 인쇄 종이 등 각종 특허를 따고, 경쟁사는 매입 또는 연합하는 방식으로 시장을 장악했습니다. 코닥사는 사진 분야에서 거의 1세기 동안 세계 최대의 기업으로 군림했습니다. 코닥은 전성기에 미국 필름 시장의 90%를 차지했고 최대의 영화 필름 생산업체이기도 했습니다. 로체스터에 있는 코닥 본사에서 필름생산에 고용된 직원만도 3만 명이 넘었고 이스트먼은 당시 미국의 재벌 순위 6위를 차지하는 부호가 됐습니다.

자선 사업에서도 이스트먼은 전국 최대의 기부자 중 한 명이었습니다. 당시 미국에는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 석유 재벌 존 록펠러 등 거액을 사회에 내놓은 기업가들이 있었는데, 이스트먼도 그 중 한 명이었습니다.

이스트먼은 자신의 기부를 표나지 않게 조용히 진행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그 사실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기부는 교육과 의료 분야에 집중됐습니다. 사립 대학인 로체스터대학교에 음악대학, 공연장, 치과대학, 의과대학을 지어주었습니다. 이스트먼의 지원으로 이 대학은 일약 명문으로 발전했습니다.

또 로체스터 공대 설립에도 크게 기여했습니다. 매사추세츠공대 즉 MIT의 여러 건물도 지었고, 미국 남부의 많은 흑인 대학도 지원했습니다. 영국 런던에는 이스트먼 치과병원을 세웠습니다. 스웨덴의 어린이 치과병원을 비롯해 유럽 여러 도시에는 저소득층을 위한 진료소를 세웠습니다.

이스트먼은 일생을 독신으로 살았습니다. 주로 어머니와 함께 살았는데, 1907년 어머니가 85세로 숨졌을 때는 심한 충격에 싸였습니다. 어머니를 추모하기 위해 이스트먼은 로체스터에 이스트먼 극장과 어머니 성인 킬번을 딴 킬번연주홀을 건립했습니다.

말년에 이르러 이스트먼은 심한 척추 질환으로 통증과 우울증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다 결국 77세 때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1932년 3월 14일, 이스트먼은 유언을 수정하는데 증인을 서달라며 친구 몇 명을 집에 초대했습니다. 서류 정리를 마친 이스트먼은 친구들에게 잠시 메모를 쓸 것이 있으니 나가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친구들이 방을 나서자 잠시 후 그의 방에서 총소리가 났습니다. 친구들이 뛰어 들어가 보니 이스트먼은 스스로 가슴에 권총을 쏘아 숨져 있었습니다.

친구들은 그의 책상에 놓인 메모를 발견했습니다. 거기에는 “친구들이여, 나의 일은 끝났다. 무엇 때문에 더 기다리겠는가?” (To my friends: My work is done. Why wait?) 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그의 시신은 자신이 세운 기업체 코닥(KODAK)의 본사 자리인 ‘이스트먼 비즈니스 공원’에 묻혔습니다. 로체스터에 있는 그의 저택은 ‘조지이스트먼박물관’이자 미국 역사 기념물로 지정됐습니다.

디지털카메라를 맨 처음 개발하고도 필름 카메라에만 전념한 탓에 이제 코닥은 과거의 영화를 누릴 수 없게 됐습니다. 그러나 세상과 인간의 모습을 영상에 담는 혁명적인 아이디어로 세계의 문화를 바꾸어 놓은 조지 이스트먼의 업적은 결코 잊히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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