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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아메리카] 남북전쟁 남군 사령관, 로버트 리 장군


로버트 리 장군.

다양한 분야에서 미국을 이끌어 가는 사람들을 만나보는 '인물 아메리카'. 오늘은 남북전쟁 당시 남군 사령관 로버트 리 장군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인물 아메리카 오디오] 남북전쟁 당시 남군 사령관, 로버트 리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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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미국 버지니아 주 샬롯즈빌에서는 백인 우월주의자들과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 사이에 큰 충돌이 발생했습니다. 한 명이 숨지고 20명 가까운 사람들이 중상을 입은 이 사건은 남북 전쟁 중 남군 사령관이었던 로버트 리 장군의 동상 철거 문제로 촉발된 것이었습니다.

백인 우월주의자들에게 리 장군은 상징적인 존재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 사건 이후 리 장군의 동상을 옮기거나 그의 이름이 들어간 공공시설의 명칭을 바꾸려는 움직임도 여기저기서 일고 있습니다.

리 장군은 패하기는 했지만,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략가 중 한 명으로 평가를 받고 있을 뿐 아니라 전쟁이 끝난 다음에는 국가 통합과 화해를 위해 노력한 인물이었습니다.

로버트 리 장군의 집안은 대대로 유명 가문이었습니다. 직계 혈통은 아니지만 혼인으로 조지 워싱턴 초대 대통령과도 연결이 돼 있고, 대법원장, 독립 선언서의 서명자 등 유명 인사들이 많았습니다. 로버트의 아버지 헨리 리는 독립전쟁에서 기병대장으로 용맹을 떨쳐 육군 소장까지 올랐고, 버지니아 주지사를 지냈습니다.

로버트 리는 1807년 버지니아에서 태어났습니다. 17살 때는 육군 사관학교, 즉 웨스트포인트에 들어갔습니다. 재학 중 보병, 포병, 기병 등에서 모두 만점을 맞은 수재였습니다. 졸업 후 장교로 임관된 로버트 리는 멕시코전쟁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고, 극단적인 인종차별 반대론자 존 브라운의 무력반란을 눈 깜짝할 사이에 제압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졸업한 육군 사관학교, 즉 웨스트포인트의 교장을 지냈습니다.

1800년대 중반 남부와 북부는 인종차별 등 여러 가지 문제로 첨예하게 대립했습니다. 급기야 버지니아를 비롯한 여러 주가 연방에서 떨어져 나가 또 다른 정부를 세우자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국가 통합을 위해 전쟁을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로버트 리에게 북군 사령관을 맡아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버지니아가 고향인 로버트 리는 그 제의를 거부하고 남군 사령관이 됐습니다.

1863년 7월 게티즈버그 전투.
1863년 7월 게티즈버그 전투.

1861년부터 1865년까지 4년 동안 벌어진 이 전쟁에서 처음에는 남군이 매우 날카로운 공격을 가했습니다. 그러나 1863년 7월 게티즈버그 전투를 분수령으로 남군은 패배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1865년 4월 9일, 로버트 리 장군은, 버지니아의 애퍼매턱스(Appomattox) 라는 마을의 한 농가에서 북군 사령관 율리시스 그랜트 장군에게 항복했습니다. 두 장군은 육군 사관학교 선후배 관계였고 과거 멕시코 전쟁에서 함께 복무했던 사이였습니다.

그랜트 장군은 모든 남군 무기와 대포, 공공재산은 북군에 넘기도록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비록 적군의 대장이었지만 리 장군이 차고 있는 칼을 압수함으로써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장교들의 개인 물품은 제외한다는 조항을 덧붙였습니다. 굶주리는 남군 병사들을 위해 식량도 제공했습니다.

북군은 축제 분위기였습니다.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 축포를 터뜨리자 그랜트 장군은 즉각 그것을 중단하도록 명령하고 “반군도 우리의 동포다. 우리는 남군의 패배를 축하하지 않으면서 우리의 기쁨을 표현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한편 리 장군은 진영으로 돌아가 눈물을 글썽이며 모든 것은 자신의 책임이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각자 고향으로 돌아가 좋은 시민이 되라고 당부했습니다. 일부 남군 지휘관들은 “남은 병사들로 게릴라전을 벌이라는 명령을 내려달라”고 요구를 했습니다. 그러자 리 장군은 이를 단호히 거부하고, “우리는 이제 하나다. 앞으로 다시 분리를 말하는 자가 있으면 내가 먼저 그를 처벌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리 장군은 또 자신의 동상이나 기념비 같은 것도 세우지 말라고 명령했습니다.

남군이 항복한 그 해, 버지니아 남부에 있는 워싱턴대학은 리 장군에게 학장 자리를 제의했습니다. 다른 직책은 거절한 적이 있지만, 리 장군은 그 자리는 쾌히 승낙했습니다. 지금의 국가 상황으로 볼 때 평화와 조화를 회복하는데 온 힘을 보태는 것은 국민 모두의 의무라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리 장군이 학장이 된 후 조그마한 이 대학은 크게 발전을 하게 됩니다. 명칭도 ‘워싱턴대학’에서 ‘워싱턴앤드리대학(Washington And Lee University)’으로 바뀌었습니다. 리 총장은 뇌졸중과 그에 이은 폐렴으로 1870년 10월 12일, 63세로 타계했습니다.

로버트 리 장군의 시신이 안치된 워싱턴앤드리대학 구내의 소성당에는 지금도 그를 추모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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