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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리포트] 한국 재방문한 미 평화봉사단원들 “수혜국 중 유일하게 봉사단 해외 파견하는 한국에 큰 자부심”


미국 평화봉사단(Peace Corps) 단원으로 활동했던 브루스 헤이덕(왼쪽 아래) 씨가 서울 용산 신광여자고등학교에서 강의한 후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미국 평화봉사단(Peace Corps) 단원으로 활동했던 브루스 헤이덕(왼쪽 아래) 씨가 서울 용산 신광여자고등학교에서 강의한 후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한국이 가난했던 시절에 봉사 활동을 펼쳤던 미국 평화봉사단(Peace Corps) 단원들이 백발이 돼 다시 한국을 찾았습니다. 이들은 한국이 평화봉사단의 수혜국으로는 유일하게 봉사단을 외국에 파견하는 모범국가라는 데 큰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습니다. 서울에서 김영권 특파원이 보도합니다.

서울 용산에 있는 신광여자고등학교 소강당. 이 학교 이원광 교장이 칠순이 얼마 남지 않은 미국인 브루스 헤이덕 씨를 소개하자 학생들이 환호성을 지릅니다.

[녹취: 학생들의 박수와 환호성]

[이원광 교장] “우리 학교에 73년부터 여기서 아이들을 가르치셨고. 저는 처음에 겁을 냈어요. 왜냐하면 내가 영어를 못하니까요. 그런데 사모님이 한국 분이세요….”

헤이덕 씨는 1973년부터 75년까지 2년 동안 미 평화봉사단원으로 이 학교와 이웃의 선린중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습니다.

[녹취: 헤이덕 씨] “고맙습니다. (학생들 환호성) 안녕하십니까? 저는 한정부 입니다. 옛날 한국 이름입니다. 저는 45년 전 한국에 왔습니다.”

헤이덕 씨는 45년 전과 비교해 너무 많은 게 변했다며 학교를 둘러보며 감회와 감격으로 여러 번 울먹이기까지 했습니다.

비좁은 교실에 수 십 명의 학생들이 빼곡하게 앉아 작은 나무 책상에 의존했던 콩나물 교실은 이제 20명이 공부하는 넉넉한 공간으로 바뀌었습니다.

[녹취: 헤이덕 씨] “When I was here, the floor was cement. The wall was cement…”

바닥과 벽이 모두 시멘트, 낡은 칠판, 겨울에는 조개탄으로 몸을 녹여야 했던 교실은 이제 목재와 첨단장비, 중앙난방 시스템을 갖춘 현대식 교실로 탈바꿈했습니다.

브루스 헤이덕씨가 45년 전 봉사활동 당시 신광여고 학생들과 찍은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브루스 헤이덕씨가 45년 전 봉사활동 당시 신광여고 학생들과 찍은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헤이덕 씨는 45년 전 학생들과 촬영한 사진들, 당시 열악했던 한국사회의 모습을 담은 영상을 학생들에게 보여주며 한국이 이룩한 발전이 “놀랍고 자랑스럽다”는 말을 반복했습니다.

[녹취: 헤이덕 씨] “I’m proud that I came to Korea. I’m happy I was able to maybe be a little part of this by working…”

평화봉사단은 미국 정부가 1961년부터 운영하는 해외 자원봉사 프로그램입니다. 미국 젊은이들이 저개발국에서 2년 동안 머물며 교육과 농업, 의료, 기술 지원 등을 통해 그 나라의 사회·경제 발전을 지원하고 미국과의 우호협력 관계를 증진하는 게 주요 목적입니다.

지난 57년 동안 141개 나라에서 22만 명이 봉사 활동을 펼쳤고, 한국은 1966년부터 1981년까지 2천여 명이 다녀갔습니다.

이들은 미국에 복귀한 뒤에도 ‘한국의 친구들’(Friends of Korea)이란 비영리단체를 통해 두 나라의 우호협력과 상호교류에 가교 역할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 단체의 제임스 메이어 전 회장은 한국에서 활동한 2천 명의 평화봉사단원들이 다른 나라에서 봉사했던 미국인들과 달리 뿌듯해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고 말합니다.

[녹취: 메이저 전 회장] “Republic of Korea is the only former Peace Corps’ recipient to invite volunteers back….”

한국은 평화봉사단의 혜택을 받은 나라들 가운데 유일하게 단원들을 다시 초청해 봉사자들이 어떤 기여를 했는지 보여주는 나라이자 비슷한 프로그램을 만들어 다른 나라에 봉사단을 파견하는 유일한 수혜국이란 겁니다.

실제로 한국은 1991년 한국국제협력단(KOICA)을 설립해 평화봉사단처럼 개발도상국의 경제·사회 발전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1978년부터 3년 동안 한국 내 평화봉사단 지원소장을 지낸 메이어 전 회장은 이런 발전상을 ‘추수’에 비유했습니다.

[녹취: 메이저 전 회장] “You did a planting, you have to do the harvest and sometimes it’s little difficult….”

봉사단원들은 씨를 뿌리듯 아주 작은 기여를 했지만, 한국인들은 부지런히 노력해 열매를 거두고 그 열매를 다시 이웃나라와 나누는 모범국가(role model)가 됐다는 겁니다.

헤이덕 씨 등 옛 봉사단원과 가족 등 80명은 한국국제교류재단의 초청으로 지난달 29일부터 한국을 방문하고 있습니다.

한국 정부는 1970년대 충청남도 예산군에서 평화봉사단으로 활동했던 캐서린 스티븐스 현 한미경제연구소장(KEI)이 2008년 주한 미국대사로 부임한 것을 계기로 이명박 당시 대통령이 제안해 평화봉사단 초청 프로그램을 시작했습니다.

미 평화봉사단원으로 활동했던 미국인들이 특강을 듣고 있다.
미 평화봉사단원으로 활동했던 미국인들이 특강을 듣고 있다.

​한국국제교류재단과 계약해 이 초청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티앤코리아의 김경선 대표는 정권 교체로 중간에 잠시 중단됐던 프로그램이 올해 부활했다며, 여러 의미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김경선 대표] “이렇게 우리나라에서 봉사했던 분들을 다시 초청해서 발전상을 보고 본인이 봉사했던 것에 자부심을 느낄 수 있게 해 드리고. 또 이 분들은 특이한 게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은 군대 생활을 했기 때문에 일반인과 섞일 일이 없었어요. 그런데 이 분들은 지방 시골에 거의 다 가셔서 2년 동안 주민들과 함께 생활을 같이하시면서 봉사 활동을 하셨어요.”

김 대표는 특히 당시 한국인들도 꺼리던 어려운 일을 봉사단이 섬겼기 때문에 존경과 감사를 받는 게 당연하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김경선 대표] “정말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까이하기 싫어하는 나환자촌을 가서 봉사하신 분들도 있고, 또 주로 많이 하셨던 게 결핵 퇴치 운동을 많이 하셨어요. 제가 얘기를 들어보면 그 때 시골에서 지붕에 쥐들이 막 왔다 갔다 하던 소리들이 들렸데요. 그런 데서 잠을 주무시고 재래식 화장실을 사용하고. 또 동네 목욕탕을 가시는데 그 때 시골에서 서양분이 옷을 벗고 들어가면 계속 보시고. 심지어 아기들은 자신을 보고 막 운대요. 그런 경험들 얘기해주시면 굉장히 신기하고 너무 고생하셨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이번에 가족과 한국을 찾은 데니스 라자러스 씨도 1978년부터 3년 동안 전라북도 익산의 한센인촌(나환자촌)에서 주민들과 함께 살며 의료 봉사활동을 펼쳤습니다.

[녹취: 라자러스 씨] “it’s a leprosy village and basically it was provided in area for…”

라자러스 씨는 단순히 마을을 오가며 치료 지원을 하기보다 함께 살며 많은 것을 나누고 배우고 싶어 한센인촌에 거주했다고 말했습니다.

자신이 무슨 대단한 일을 한 게 아니라 80~90명의 주민과 함께 생활하면서 화투로 고스톱을 치고 동동주도 마시면서 서로를 알아가고 배우는 좋은 기회가 됐다는 겁니다.

전염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냐는 질문에 한센병이 그렇게 쉽게 전염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교육을 받아 알았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라자러스 씨] “it’s very difficult disease to transmit

평화봉사단원들은 첫 3개월 동안 다양한 기본교육을 받은 뒤 현장에 파견됩니다.

라자러스 씨는 이번에 다시 방문한 익산 한센인촌을 보고 많이 놀랐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라자러스 씨] “it looks very very different. I mean..”

두메산골의 돼지농장은 최신식 농장으로 변했고 주변환경도 많이 발전해 알아보지 못했으며, 자신이 알고 지내던 한센인 가정도 떠나고 없었다는 겁니다.

라자러스 씨는 젊은 시절 이런 경험을 계기로 유엔개발계획(UNDP)에 들어가 많은 개발국에서 지원 활동을 계속 펼칠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한국에서 활동한 평화봉사단원들은 어디를 가나 한국에서의 추억과 발전상을 자랑하는 사실상 홍보대사 역할을 한다고 관계자들은 말합니다.

1967년부터 2년 동안 경주여중에서 영어를 가르쳤던 린다 닐 씨는 경주란 말만 나오면 가슴이 설렌다고 말합니다.

[녹취: 닐 씨] “Gyeongju! Wonderful Gyeongu!

1960년대 강원도 양양에서 공중보건 지원을 했던 제니스 페디 씨는 같은 동기(K-4)와 대구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또 다른 일부 동기와 후배들은 통역하던 여대생이나 하숙집 딸과 결혼한 사례들도 적지 않다는 겁니다.

페디 씨는 전기도 없고 수돗물, 화장실, 화장지도 제대로 없던 곳이었지만, 양양의 아름다운 풍광과 친절한 한국인들을 잊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페디 씨] “No electricity, no running water, no toilet, no paper roll, but where I was at in Gangwon-do was beautiful place…”

한국을 사랑하는 이들은 모두 북한의 열악한 상황과 통일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4일 비무장지대를 방문한 백발의 노인들은 눈시울을 적셨습니다.

헤이덕 씨는 북한 정권이 과거 언행을 자주 바꿨기 때문에 우려도 있지만, 한국 정부와 트럼프 대통령의 (평화적) 접근이 성공하길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헤이덕 씨] “I hope that the overtures from South Korea and president Trump will succeed, but in the past all I’ve seen from North Korea…”

헤이덕 씨 등 옛 평화봉사단원들은 남북한이 하나가 되는 것은 모두의 바람이라며, 한반도의 모든 주민들이 존중받고 번영하는 아름다운 통일이 이뤄지길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서울에서 VOA 뉴스 김영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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