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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리포트] 독일 프라이카우프 수혜자 “한국은 섬같아, 열린 마음 갖길”


과거 동독의 반체제 인사로 현재 독일연방 독재청산재단에서 활동 중인 피터 코입 씨가 26일 서울에서 VOA와 인터뷰하고 있다.

과거 서독이 비밀리에 동독에 몸값을 지불하고 데려온 반체제 인사 가운데 한 명이 최근 서울을 방문해 여러 단체와 학교에서 강연하고 있습니다. 현재 독일연방 독재청산재단 강사로 활동 중인 피터 코입 씨인데요. 자신의 경험과 당시 독일 분단의 상황을 한국인들과 나누면서 “열린 자세”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서울의 김영권 특파원이 서울의 독일대사관의 초청을 받아 입국한 코입 씨를 인터뷰했습니다.

[녹취: 코입 씨] “I was just happy! I felt I really reborn and it was just amazing”
“그저 행복했습니다. 다시 태어난 느낌이었고 정말 놀라웠습니다.”

머리를 단정하게 쓸어 올린 채 점잖게 얘기하던 독일 중년 신사의 목소리가 갑자기 커집니다.

1982년 동독을 떠나 서독에 처음 도착할 때를 말할 때는 검은 뿔테 안경이 흔들릴 정도로 얼굴이 무척 상기됐습니다.

환갑이 다 된 이 중년 신사의 이름은 피터 코입. 과거 독일 통일 전 서독 정부가 동독에 몸값을 지불하고 비밀리에 동독 정치범들을 데려오던 ‘프라이카우프’(Freikauf)의 수혜자입니다.

‘프라이카우프’는 ‘자유를 사다”는 의미입니다. 서독 정부는 1962년부터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까지 27년 동안 동독 정부에 현금과 현물을 주고 정치범 3만 4천여 명을 데려왔습니다.

또 이들 정치범의 가족 25만 명도 동독에서 출국 비자를 받아 서독에 정착할 수 있었습니다.

코입 씨는 서독 정부가 자신의 송환을 위해 미화로 5만 5천 달러를 동독에 지불했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코입 씨] “They paid 55,000 dollars…

서독은 코입 씨 등 동독의 정치범 송환에 총 35억 마르크, 미화로 20억 달러를 지불했습니다.

서독은 인도적인 동포애 차원에서 정권 교체에 관계없이 일관적으로 ‘프라이카우프’ 정책을 유지했습니다. 반면 동독은 공산주의 불만세력을 나라 밖으로 퇴출하고 외화벌이 차원에서 이 사업에 동조했습니다.

코입 씨 역시 동독 정부에 낙인찍힌 불만 세력 중 한 명이었습니다.

[녹취: 코입 씨] “I tried to escape, of course, I planned. I wanted to go…

1958년 생인 코입 씨는 만 22살 때인 1981년에 동독을 탈출하다 체코와의 국경지역에서 북한의 국가보위성에 해당하는 동독 슈타지 요원들에게 체포됐습니다.

체코(슬로바키아)와 헝가리를 경유해 오스트리아로 향하는 탈출 계획을 세우고 기차를 타려다 적발된 겁니다.

이 때문에 악명높은 슈타지 조사실에서 3달간 고문 등 취조를 받은 뒤 10개월을 더 노동교화소에서 보내야 했습니다.

코입 씨의 탈출 결심에는 가족이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녹취: 코입 씨] “East Germany, in 1965~1966, started to open border…”

동독 정부가 1965~1966년부터 서독인들의 여행을 허용하면서 서독 에센에 살던 조부모가 자신이 살던 드레스덴을 방문한 겁니다.

에센에 살았던 코입 씨의 아버지가 공산주의를 추종해 1956년 동독으로 이주했기 때문에 조부모는 서독에 계속 살고 있었습니다.

코입 씨는 조부모를 통해 학교에서 배웠던 세뇌 교육과는 다른 세상에 눈을 떴다고 말했습니다. 특히 1975년 공산주의에 신물이 난 부모가 출국 비자를 동독 정부에 신청한 이유로 육상 선수였던 코입 씨는 국가 특수학교에서 퇴교를 당해야 했습니다.

[녹취: 코입 씨] “As a result, they wanted me to kick out of school…”

동독 정부는 연금을 받는 노년 층의 서독 가족 방문만 허용하다가 1972년부터 부분적으로 경찰의 승인과 수수료를 낸 젊은 층에게도 일부 출국비자를 발급했었습니다.

코입 씨 가족도 이에 고무돼 출국 비자를 신청했지만 거부됐고 코입 씨는 충성계층만 입학이 가능한 특수학교에서 쫓겨났습니다.

코입 씨는 현대 무용인 볼룸 댄스로 전공을 바꿔 1981년 전국 대회에서 3위를 해 국가대표 자격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불만 세력으로 낙인이 찍혀 국가대표가 되지 못했고, 결국 이에 크게 실망한 뒤 조부모가 있는 서독으로 탈출을 시도했던 겁니다.

코입 씨는 노동교화소에서 석방될 때 동독인을 포기하라는 슈타지의 요구를 선뜻 이해할 수 없었다고 회고했습니다. 서독의 조부모가 저명한 변호사를 통해 ‘프라이카우프’로 손자를 데려오려고 했고 동독 정부가 이를 수용해 먼저 그의 국적을 박탈하기로 한 계획을 몰랐던 겁니다.

[녹취: 코입 씨] “Behind the curtain, there were something going on…”

코입 씨는 당시 동독 정부가 돈을 받고 정치범을 서독에 넘긴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가능한 일이라고 믿지 않았습니다.

정치범들을 태운 버스가 동·서독을 가로지르는 철책을 넘어 서독에 도착한 뒤에야 자신이 ‘프라이카우프’의 수혜자임을 깨달았던 겁니다.

동독 정치범들은 “드디어 자유를 찾았다”며 환호성을 쳤고 코입 씨도 서독 땅을 밟은 그 감격의 순간을 결코 잊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코입 씨는 나흘 동안 신원 조사를 받은 뒤 에센의 조부모집에 정착해 공부를 지속했습니다. 이후 현대 무용 강사, 보훔루르 대학 연구소 조교, 독일연방 독재청산재단 강사로 활동하며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 동독에 남은 가족도 1980년대에 출국비자를 받아 합류하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하지만,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를 회고할 때는 얼굴이 어두워졌습니다. 당시 베를린에 머물던 그는 “나쁘지는 않았지만 이상한 감정이 들었다”고 회고했습니다.

[녹취: 코입 씨] “The time when I was in Berlin, I sort of have strange feeling…”

슈타지와 여러 비밀 경찰들, 자신을 쫓아낸 선생 등과 한 나라 국민으로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게 달갑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만큼 동독에서의 삶은 그에게 악몽 같았고 좋은 추억은 거의 없었다는 겁니다.

코입 씨는 지금도 태어나서 22년을 살았던 동독의 드레스덴보다 서독의 에센을 고향으로 여기고 살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코입 씨] “Dresden is not my hometown. My hometown is Essen….”

지금도 적지 않은 서독인들이 동독 출신을 게으른 ‘오씨(Ossi)로 동독인들은 서독 출신을 거만한 ‘베씨’(Wessi)로 여기며 앙금이 여전하지만, 자신은 가족 때문에 순조롭게 정착했고 서독에서 차별도 거의 받지 않았다는 겁니다.

코입 씨에게 한반도 통일의 길을 물으니 “대답하기 너무 어려운 질문”이란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녹취: 코입 씨] “That’s a difficult question for me as German from..”

한반도는 과거 한 나라였고 같은 말을 하기 때문에 함께해야 한다고 믿지만, 분단 70년이 넘은 남북한의 상황이 너무 달라 잘 준비해야 할 것이란 겁니다.

코입 씨는 2년 전 북한을 방문했고 한국 방문은 이번이 4번째라며 직접 목격한 남북한이 너무 달랐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코입 씨] “Seoul is very modern, western main city…

서울은 현대적이고 서구화됐으며, 많은 교통체증과 거리 소음, 형형색색의 건물과 불빛, 젊은이들의 생동감 있고 역동적인 모습, 밤 늦게까지도 바쁜 도시이지만 평양은 차량이 적어 매우 조용하고 밤에 빛이 없기 때문에 어두워서 무척 대조적이란 겁니다.

평양은 특히 붉은색과 흰색의 선전 구호가 많았던 동독을 연상하게 했다며, 평양은 흑백 TV, 서울은 컬러TV처럼 느껴진다고 말했습니다.

코입 씨는 그러나 “서울에 올 때마다 사람들이 섬에 사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말했습니다. 한국인들이 굉장히 발전한 자유 민주주의 나라에 살지만 삼면이 바다, 북쪽 지척에는 완전히 다른 나라가 있기 때문에 섬처럼 느껴진다는 겁니다.

코입 씨는 자신이 통일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한국인들에게 자세한 조언을 하기 힘들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 말은 꼭 해주고 싶다고 강조했습니다.

[녹취: 코입 씨] “To be open to rely that people can grow together…”

“많이 다르고 힘들겠지만 함께 할 때 같이 성장할 수 있다는 열린 마음을 가졌으면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바라는 것을 실현할 수 있을 겁니다.”

서울에서 VOA 뉴스 김영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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