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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살 소녀 바다를 건너다 - 제시 칼자도 에스폰다(1)


제시 칼자도 에스폰다(오른쪽)가 지난 1일 워싱턴 DC에서 열린 ECDE(Ethiopian Community Development Council) 행사에서 강연하고 있다.
제시 칼자도 에스폰다(오른쪽)가 지난 1일 워싱턴 DC에서 열린 ECDE(Ethiopian Community Development Council) 행사에서 강연하고 있다.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며 살아가고 있는 이들을 만나보는 '나는 미국인입니다' 시간입니다. 헤엄쳐 쿠바를 탈출한 뒤 기업 최고경영자(CEO)가 된 제시 칼자도 에스폰다, 함께 만나보시겠습니다.

제시 칼자도 에스폰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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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과 역경을 뒤로하고 이제는 미국인의 한 명으로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며 살아가는 난민들의 이야기, ‘나는 미국인입니다’. 안녕하세요? 김현숙입니다.

전혀 생각지도, 계획하지도 않은 일들이 일어날 때, 사람들은 보통 당황하게 됩니다. 눈앞에 닥친 현실을 부정하거나 때론 비관에 빠지기도 하죠. 오늘 만나볼 주인공은 29년 인생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건들을 끊임없이 마주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긍정의 힘으로 모든 난관을 이겨내고 이제는 한 기업의 최고경영자(CEO)로,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하는 강연자로 살아가고 있는데요. 불꽃과 같은 쿠바의 열정을 품은 아가씨, 제시 칼자도-에스폰다 씨의 아메리칸 드림을 들어봅니다.

[현장음: ECDC 난민 행사]

6월 초, 워싱턴 DC에서 열린 난민 행사 현장. 난민 출신으로 미국에 성공적으로 정착한 3명의 연사가 나와 난민정책 관련자들 앞에서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주는 시간이었습니다.

[현장음: ECDC 난민 행사]

연사 중에서도 유독 앳띤 얼굴에 밝은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여성. 참석자들은 이 여성이 기업의 최고경영자(CEO)로 소개되자 한번 놀라고, 난민으로서 걸어온 이야기에 또 한 번 놀랐는데요. 고통스러웠던 과거의 기억을 담담하게 이야기하며, 난민 정책 관련자들에게 조언까지 하는 이 여성, 바로 오늘의 주인공이었습니다.

[녹취: 제시 칼자도 에스폰다] “제 이름은 제시 칼자도 에스폰다(Jessi Calzado-Esponda)이고요. ‘쿠바 인스파이어스’라고 하는 사회적 기업의 CEO입니다. 지금은 워싱턴 DC에 인근에 살고 있고요. 어릴 땐 미 동남부 플로리다 주의 탬파에서 자랐어요. 저는 아주 어린 나이에 뜻하지 않게 미국에 오게 된 난민이랍니다.”

미국에 뜻하지 않게 오게 됐다니 이게 무슨 말일까요?

[녹취: 제시 칼자도 에스폰다] “제가 7살 때였어요. 전 당시 쿠바 수도 아바나에 살고 있었죠. 어느 날, 한밤중에 저희 이모가 절 깨웠어요. 아무도 몰래 미국으로 간다는 거예요. 이모는 저와 외할머니에게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 잠시 우리 집에 들렀고, 우리보고 해변에 같이 가서 배웅을 좀 해달라고 했죠. 저와 할머니는 이모한테 작별인사만 하고는 금방 돌아올 생각으로 집을 나섰어요.”

어두운 밤, 배를 타고 쿠바를 탈출하는 이모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있을 때 예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졌습니다.

[녹취: 제시 칼자도 에스폰다] “갑자기 해변에 한 사람이 나타났는데 어두운 밤이라 경찰인지 군인인지, 일반인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어요. 몰래 배에 타려던 사람들이 난리가 났죠. 그리곤 해변에 서 있던 저와 할머니까지 배에 태워버린 거예요.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저와 할머니는 어느새 배를 타고 바다 위에 있었죠. 수영을 해서 돌아갈까도 생각했지만 수영을 못했던 저와 할머니는 그렇게 전혀 계획하지 않게 쿠바를 떠나게 됐습니다.”

17명이 작은 배 하나에 올라 5일 밤낮을 배 위에서 지냈습니다. 제시 씨는 이후 다시는 엄마를 보지 못하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죠.

[녹취: 제시 칼자도 에스폰다] “먹을 거라곤 바닷물과 살아있는 물고기밖에 없었어요. 전 꽤 커서까지 생선을 쳐다보지도 못했는데요. 생선을 혐오하는 트라우마, 정신적 외상이 생긴 거죠. 살아있는 물고기를 목으로 넘겼을 때의 그 느낌이 아직도 생생하게 느껴질 정도니까요. 그렇게 5일 밤낮을 비바람을 맞으며 항해한 끝에 미국 해안 경비대가 우리를 발견했고, 관타나모 미군 기지에 있던 난민촌으로 가게 됐어요. 어린 데다 제대로 먹지 못해서 탈수 증상이 심했던 저는 치료를 받으며 난민촌에서 한동안 지내게 됐죠.”

1995년, 제시 씨는 그렇게 어린 나이에 난민촌에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어렸기 때문에,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에 잘 적응할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녹취: 제시 칼자도 에스폰다] “전 사실 관타나모 난민촌에서의 행복한 추억을 많이 갖고 있어요. 원래 성격이 워낙 낙천적인 데다 7살밖에 안 된 아이가 뭘 알겠어요. 무엇보다 미국 군인들이 정말 따뜻하게 대해주셨죠. 제가 처음 배운 영어도 “군인 아저씨 사탕 하나 주세요~” 였어요.”

그렇게 난민촌에서 6개월을 지낸 제시 씨는 이후 할머니, 이모와 함께 플로리다 주 탬파로 가게 됩니다. 상상도 해보지 못했던 나라, 미국에서 난민으로 정착하는 과정은 어땠을까요?

[녹취: 제시 칼자도 에스폰다] “저는 영어를 한 마디도 못했어요. 하지만 학교에 다니면서 영어도 배우게 됐고요. 또 당시 쿠바의 수학 교육 수준이 높다 보니까, 수학 수업은 월반해서 들을 정도로 적응을 잘했어요. 하지만 저희 할머니는 달랐죠. 50대에 갑자기 난민 신분이 된 거잖아요. 영어도 못 하셨고 특별한 기술도 없으셨고요. 무엇보다 남편과 딸, 또 어머니에게 작별인사를 못 하고 온 것 때문에 마음에 큰 짐을 안고 계셨어요.”

그런데 미국 정착과정이 가장 힘들었던 사람은 바로 이모였습니다.

[녹취: 제시 칼자도 에스폰다] “이모는 쿠바에서 공부도 많이 한 경제학자였어요. 하지만 미국에 와서는 과거의 지위나 직업이 소용없었죠. 화장실 청소, 건물 청소 등을 해야 했어요. 이모가 미국에 오기로 한 이유를 단 한 번도 말한 적은 없지만, 당시 쿠바는 공산주의와 폐쇄경제로 경제 사정이 정말 말도 못 하게 어려웠거든요. 먹을 것조차 구하기 힘들었으니까요. 아마도 이모는 자유의 나라에서 경제적으로 풍요한 삶을 살기 위해 탈출하신 게 아닐까 싶어요.”

결국, 이모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는데요. 제시 씨에겐 또 한 번, 예상치 못했던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녹취: 제시 칼자도 에스폰다] “미국에 온 지 1년이 지났을 때였어요. 이모는 여전히 미국에 정착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죠. 이모가 상상했던 것과 현실이 많이 달랐던 것 같아요. 거기다 이모 때문에 저와 할머니까지 미국에 와서 고생하는 게 너무 부담이 되었던 걸까요? 이모가 자살을 한 거예요. 그것도 12월 25일 성탄절에요. 성탄절은 미국의 가장 큰 명절 중 하나잖아요? 많은 미국인이 가족과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성탄절이 저와 할머니에겐 슬픈 날이 돼 버린 거죠. 전 지금까지도 성탄절만 되면 기쁨과 슬픔이 교차해요.”

이렇게 허망하게 이모를 보낸 제시 씨는 할머니를 엄마 삼아, 학교에 다니며, 꿈을 키우며 자라나게 됩니다. 지금까지도 영어를 잘 못하는 할머니는 하루 10시간 넘게 일하며 제시 씨를 키웠고, 제시 씨는 수많은 지역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예술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됐죠.

그리고 제시 씨의 인생을 바꿀, 생각지 못했던 사건들이 또 다시 제시 씨 운명의 문을 두드리게 되는데요.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학교를 졸업한 제시 씨가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에 진출하게 된 겁니다.

네, 미국에 정착한 난민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나는 미국인입니다', 오늘은 쿠바 출신 사업가 제시 칼자도 에스폰다 씨의 첫 번째 이야기와 함께했습니다. 다음 주에는 20살 나이에 미 연방 의원 보좌관이 되는 제시 씨의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하는데요. 기대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김현숙이었습니다. 함께 해주신 여러분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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