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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한국 대통령 8.15 경축사...70년대부터 수세서 공세로


박근혜 한국 대통령이 지난 15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제70주년 광복절 중앙경축식에서 경축사를 하고 있다.
박근혜 한국 대통령이 지난 15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제70주년 광복절 중앙경축식에서 경축사를 하고 있다.

한국의 대통령들은 8.15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광복의 의미를 되새기는 한편 북한에 각종 메시지를 보내왔습니다. 역대 한국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 내용과 배경을 최원기 기자가 정리했습니다.

[음향효과/YOUTUBE] "단기 4278년 8월15일 일본 제국주의의 압박과 설움에서 해방되던 날 온 자유의 종소리와 만세소리는 천지를 진동시켰습니다.”

한민족에게 1945년 8월15일은 잊을 수 없는 날입니다. 일제 36년의 식민통치에서 해방된 날이자 남북 분단이 시작된 날이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남북한의 최고 지도자들은 8.15 광복절을 기해 통일의 당위성을 강조하거나 남북 화해와 협력을 촉구해왔습니다.

한국의 초대 이승만 대통령은 ‘북진통일’을 주장하면서도 공식 연설에서는 ‘평화적 통일과 합의에 의한 통일 방안’을 제의했습니다. 한국의 강인덕 전 통일부 장관입니다.

[녹취: 강인덕]”이승만 대통령만큼 당시 국제정치를 잘 아는 사람이 없었거든요, 국내외 정세를 생각해서 평화적인 통일을 강조했는데, 북진통일은 6.25 이후에 강조되지요.”

북한의 김일성 주석도 8.15를 기해 통일 방안을 내놓은 적이 있습니다. 김일성 주석은 1960년 ‘8.15 해방 15주년’ 기념연설을 통해 남북연방제를 제의했습니다. 김 주석은 연설에서 “남조선 당국이 외세의 간섭 없이 자유로운 총선거에 의한 통일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과도적으로 남북 조선의 연방제를 제의한다”고 밝혔습니다.

북한 전문가인 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입니다.

[녹취:안찬일] "연방제라는 일종의 통일전선 전략을 펴서 자체적으로 경제건설도 하고 대남정책도 모양새를 갖추기 위해 연방제를 내놓은 것으로 보여집니다.”

한국에서 1961년 군사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박정희 대통령은 반공을 국시로 내세우면서 ‘선 건설 후 통일’을 대북정책 기조로 삼았습니다. 1965년 박정희 대통령의 8.15 경축사입니다.

[녹취:박정희] ”통일이야말로 민족의 비원인 동시에 북반부에서 노예 생활을 강요당하는 북한 동포들에게 자유의 광복을 가져다 주는 국가의 지상과제인 것입니다.”

그로부터 5년 뒤 박정희 대통령은 1970년 8.15 경축사를 통해 ‘평화통일 기반 조성을 위한 구상’을 발표한 데 이어 1973년에는 공산권 국가와의 관계 개선을 위한 ‘6.23 외교선언’을 제시했습니다.

강인덕 전 통일부 장관은 박정희 대통령이 이처럼 공세적으로 대북 제의를 내놓은 배경에는 60-70년대 이룬 경제발전이 있었다고 지적했습니다.

[녹취:강인덕]”100억 달러 수출이 1978년 말에 됐거든요. 남북 경제력 격차가 엄청나게 나게 됐고, 공산권 자체가 변하고, 국내외 정세가 남측에 유리하게 됐고, 유리한 입장에서 대담한 정책을 제시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전두환 대통령은 1983년 8월 제38주년 광복절을 통해 남북 이산가족 상봉을 제안했습니다. 이날 전 대통령은 경축사를 통해 “통일은 겨레끼리 얼싸안고 오손도손 같이 잘 사는 것”이라며 북한에 대해 이산가족 상봉 제의에 호응하라고 촉구했습니다.

그러나 북한은 그로부터 두 달 뒤인 10월9일 버마 아웅산에서 전두환 대통령 암살을 시도했습니다. 전두환 대통령은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지만 각료와 기자 등 17 명이 숨지고 남북관계는 악화됐습니다.

1988년에 집권한 노태우 대통령은 그 해 8.15 경축사에서 ‘김일성 주석’이라는 호칭을 쓰면서 남북정상회담을 제안했습니다.

[녹취: 노태우] "저는 남북정상회담이 가능한 빨리 열려 본격적인 남북 협력과 통일의 시대를 열 헌장에 합의하는 노력이 이뤄지길 희망합니다.”

북한은 남북관계를 개선하자는 노태우 대통령의 제의에 호응했습니다. 1990년부터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총리급 고위급 회담이 열렸으며 통일축구대회, 비핵화 선언 그리고 남북기본합의서가 채택됐습니다.

이어 등장한 김영삼 대통령은 정권 초기부터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 (NPT) 탈퇴로 촉발된 1차 핵 위기를 겪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김영삼 대통령은 1995년 8월 광복 50주년 경축사를 통해 ‘남북대화를 통한 핵 문제 해결’을 강조했습니다.

[녹취:김영삼]“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문제는 반드시 남북 당사자 간에 협의, 해결되어야 합니다.”

그 후 김영삼 대통령은 김일성 주석과 남북정상회담에 합의했으나 정상회담을 17일 앞두고 김 주석이 사망하는 바람에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1998년 2윌 한국의 15대 대통령에 취임한 김대중 대통령은 이듬해인 광복 54주년 8.15 경축사를 통해 남북 당국 간 대화를 제의했습니다. 이날 김대중 대통령은 “언제든지 남북 당국자 간의 대화에 응할 용의가 있고, 북한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김 대통령은 2000년 6월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켰습니다.

[녹취:김대중]”이제 공동성명에 완전히 합의를 봤습니다. 여러분 축하해 주십시오.”

김대중 대통령의 뒤를 이은 노무현 대통령은 전임자의 햇볕정책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7년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남북경제공동체’ 구상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녹취:노무현]”6자회담이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고 있는 이 때 6자회담과 남북대화가 선순환이 되게 운영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한반도 평화체제를 수립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게 될 것입니다.”

2008년 한국의 17대 대통령에 취임한 이명박 대통령은 북한과의 대화보다는 비핵화와 개방 그리고 인권 문제를 강조했습니다. 2012년 광복절 67주년 경축사입니다.

[녹취: 이명박]”북한도 이제는 현실을 직시하고 변화를 모색할 상황이 됐습니다. 한반도 비핵화는 남북은 물론 6자회담 합의이자 안보리 결의로 반드시 지켜져야 합니다.”

한국 대통령들의 광복절 경축사는 거의 예외없이 대화와 협력을 통한 남북관계 개선과 이산가족 문제 등 현안 해결을 강조했지만, 이에 대한 북한의 반응은 시기에 따라 엇갈렸다고 전문가들은 밝혔습니다.

VOA뉴스 최원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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