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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아메리카] 추수감사절을 국경일로 바꾼 여성, 새라 조세파 헤일


[인물 아메리카] 추수감사절을 국경일로 바꾼 여성, 새라 조세파 헤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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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11월 넷째 목요일은 미국의 추수감사절입니다. 이날 미국인들은 멀리 떨어져 있던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여 한해의 여러 가지 은총에 감사하며, 칠면조, 호박, 크랜베리, 옥수수 등 전통 음식을 즐깁니다.

올해는 코로나바이러스 확산으로 사람들의 발을 묶어놓았지만, 정상적인 때에는 많은 사람이 고향에 가거나 여행을 떠나느라 이때는 1년 중 가장 바쁜 철이기도 합니다.

추수감사절은 유럽에서 건너와 미국 북동부 플리머스에 정착한 백인 이주민들과 이 지역 원주민 왐파노아그 부족이 1621년 함께 한 축제를 본떠 계승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필그림으로 불리던 뉴잉글랜드 정착민들은 그 후 정기적으로 추수감사절을 지내며 한해의 수확, 전쟁의 승리, 가뭄의 해소 등 여러 가지에 대해 신에게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런 추수감사절을 연방 법정 공휴일로 제정하고 남북 화해의 매개체가 되게 한 공로자는 19세기 저명한 여류 작가 새라 조세파 헤일이었습니다. 헤일은 시인이자 소설가, 최초의 잡지사 여성 편집인이었고, 그 시대 여성의 의식을 크게 바꾼 선각자였습니다.

새라 조세파 헤일.
새라 조세파 헤일.

새라 조세파 헤일은1788년 뉴햄프셔주에서 태어났습니다. 결혼 전 이름은 새라 조세파 부얼(Sarah Josepha Buell)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독립전쟁에서 싸운 육군 대위 출신인 고든 부얼(Gordon Buell), 어머니는 마사 휘틀세이 부얼(Martha Whittlesay Buell) 여사였습니다. 위로 오빠가 둘, 아래로 여동생이 있었습니다.

부모는 남녀가 똑같이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믿는 분들이었고, 딸들에게도 비록 집에서지만 열심히 공부를 가르쳤습니다. 오빠 호레이쇼우로부터도 교육을 받았습니다. 새라는 독학으로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새라는 그가 살던 지역에서 교사가 됐습니다. 1811년 새라는 데이비드 헤일(David Hale)이라는 변호사를 사귀게 되고 2년 후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새라의 성은 부얼에서 헤일로 바뀌었습니다.
두 사람은 다섯 남매를 두었습니다. 불행히도 남편은 1822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새라는 그 슬픔을 간직하기 위해 일생 검은 옷만 입었습니다.

새라 헤일은 1823년에 첫 시집 ‘망각(The Genius of Oblivion)’을 출간했습니다. 4년 후에는 첫 소설 ‘노스우드: 북부와 남부의 삶(Northwood: Life North and South)’이 출판됐습니다. 이 소설로 새라 헤일은 노예를 주제로 한 최초의 작가군에 들게 됐고, 최초의 여류 소설가의 한 사람으로 떠올랐습니다.

이 책은 즉각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새라 헤일은 소설에서, 노예제가 흑인들을 얼마나 비인간적으로 대했는가를 지적할 뿐 아니라 주인들도 심리적, 윤리적으로 비인간적으로 만들고, 기술적 발전을 지연시킨다고 지적했습니다.

당시 보스턴에서 ‘레이디스매거진(Lady’s Magazine)’이라는 잡지를 발행하던 존 블레이크는 새라의 소설에 감탄하면서, 그녀에게 그 잡지의 편집을 맡아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새라는 그 제안을 받아들여 1828년부터 8년 동안 ‘레이디스매거진’에서 일했습니다.
새라는 그 잡지가 여성의 교육에 도움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새라 헤일은 이때 그 유명한 동요 ‘메리에게는 작은 양이 있어요(Mary Had a Little Lamb)’을 발표했습니다.

메리에게는 작은 양이 있었어요. 눈 처럼 하얀 털을 가진 작은 양. 메리가 가는 곳마다 양도 따라갔죠... 라는 동요입니다.
여러 해 뒤인 1877년 토머스 에디슨은 그가 발명한 축음기에 처음 자신의 목소리로 ‘메리의 양’을 녹음하기도 했습니다.

한편, 필라델피아의 출판업자 루이스 앤토인 고디는 새라 헤일을 자신의 잡지 ‘고디스 레이디스북(Godey's Lady's Book)’ 편집을 맡아주기를 요청했습니다. 루이스 고디는 새라가 일하던 레이디스 매거진을 매입, 합병하고 잡지 이름을 ‘아메리칸 레이디스 매거진(American Lady’s Magazine)’으로 바꾸었습니다.

1837년부터 40년 동안 ‘아메리칸 레이디스 매거진’ 편집을 맡으면서 새라 헤일은 그 잡지를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고, 가장 많이 읽히는 잡지로 탈바꿈시켰습니다. 고디스 사의 ‘아메리칸 레이디스 매거진’ 은 어떤 출판물보다도 강력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정기 구독자 수는 남부와 북부에 모두 15만이 넘었고, 잡지와 새라 헤일은 미국인들의 삶에 가장 폭넓게 영향을 준 존재가 됐습니다.

새라 헤일이 편집인으로 있는 동안 수많은 유명 여류 시인들이 이 잡지에 시와 산문을 발표했습니다. 또 나다니엘 호손, 올리버 홈스, 워싱턴 어빙 등 당대를 주름잡던 문인들도 이 잡지에 글을 실었습니다.

새라 헤일은 추수감사절을 국가의 법정 공휴일로 제정토록 하는데 가장 큰 기여를 한 여성이었습니다. 새라 헤일이 활동하던 시기 추수감사절은 주로 뉴잉글랜드 지방에서만 인기였습니다. 각 주는 나름대로 휴일을 정해 추수감사절로 삼았습니다. 어떤 주는 10월에, 어떤 주는 심지어 1월에 추수감사절을 쇠기도 했습니다. 남부에서는 그런 명절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새라 헤일의 연방 공휴일 지정 운동은 1846년에 시작돼 17년 동안이나 계속됐습니다. 헤일은 테일러 대통령, 필모어 대통령, 피어스 대통령, 뷰캐넌 대통령, 그리고 링컨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줄기차게 서신을 보내 추수감사절을 법적 연방 공휴일로 선포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처음 그녀의 서한들은 대통령을 설득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링컨 대통령에게 보낸 서한은 효과가 있었습니다. 남북전쟁 중이었는데도 1863년 링컨 대통령은 추수감사절을 공휴일로 제정하는 입법안을 받아들였습니다.

새로운 공휴일은 남북 전쟁이 끝난 후의 혼란한 시기에 국가 단합의 날로 간주됐습니다. 추수감사절 전에는 연방 공휴일이 조지 워싱턴 탄생일과 독립 기념일, 이틀뿐이었습니다.

링컨 다음의 대통령들은 해마다 11월 마지막 목요일을 추수감사절 공휴일로 선포했습니다. 새라 헤일은 ‘추수감사절의 어머니’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1941년 의회는 11월 넷째 주 목요일을 고정적인 법정 공휴일로 한다는 결의안을 통과시키고, 루스벨트 대통령은 그 결의안대로 포고령을 발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로써 대부분의 미국민은 직장과 학교에서 벗어나 나흘간의 연휴를 즐길 수 있게 됐습니다.

새라 헤일은 1877년 89세 때 ‘고디스 레이디스북’에서 은퇴했습니다. 새라 헤일은 1879년 4월 30일 필라델피아 자택에서 타계해 국가 유적지인 로렐 힐 묘지에 묻혔습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여성계의 혜성 같은 존재였지만, ‘Sara J. Hale, 1788년 10월 24일 나고, 1879년 4월 30일 잠들다’라고만 쓰인 조그마한 묘비 아래 묻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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