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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아메리카] 프로야구 최초의 흑인 선수, 재키 로빈슨 


[인물 아메리카] 프로야구 최초의 흑인 선수, 재키 로빈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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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프로야구의 첫 흑인 선수 재키 로빈슨이 브루클린 다저스 유니폼을 입고 있다.
미국 프로야구의 첫 흑인 선수 재키 로빈슨이 브루클린 다저스 유니폼을 입고 있다.

재키 루즈벨트 로빈슨은 현대 메이저 리그 야구에 맨 처음 진출한 흑인 선수로, 미국 프로 야구의 역사를 바꾸어 놓은 인물입니다.

미국 프로 야구계에는 1880년대에 제정된 메이저 리그의 인종 차별 제도 이후 흑인 선수가 한 사람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947년 흑인 선수 재키 로빈슨이 뉴욕의 브루클린 다저스 팀에 들어가 최초로 경기에 나섬으로써 그같은 규정이 점차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재키 로빈슨은 1919년 1월 31일, 조지아주 농촌 지역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소작농이었습니다. 재키는 다섯 남매 중 막내였습니다. 재키가 태어난 다음 해 아버지가 집을 나가버리자 재키 가족은 캘리포니아의 파사디나로 옮겨가 살았습니다.

어머니는 아이들을 먹여살리기 위해 온갖 궂은 일을 해야 했습니다. 재키도 살기 위해 밖에 나가 일을 했습니다. 재키는 이때 인종적 증오의 현실을 경험했습니다. 백인들은 재키네가 가까이 사는 것을 싫어해 거듭 거듭 이사를 가도록 압박을 가했습니다.

재키는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스포츠에 재능을 발휘했습니다. 그의 형 매크 로빈슨도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200미터 육상 은메달을 차지할 만큼, 체육에 뛰어났습니다.

캘리포니아 대학 로스 엔젤레스 캠퍼스, 즉 UCLA에 진학한 재키 로빈슨은 각종 운동의 스타가 됐습니다. 그는 야구, 농구, 미식 축구, 육상 등 여러 부문에서 최고 선수였습니다. 재키 로빈슨은 최소한 미국 서부에서는 최고의 운동선수로 평가되고 있었습니다.

2차대전이 벌어지자 그는 군대에 징집됐습니다. 그는 간부 교육을 받고 1943년 소위가 됐습니다. 그러나 로빈슨은 군대 내 인종적인 좌석제도에 항의했다가 군사재판에 서기까지 했습니다. 그는 결국 군을 떠나야 했습니다.

1945년 군에서 나왔지만 흑인에게는 대학 졸업자라 해도 일자리가 별로 없었습니다. 로빈슨은 프로 야구팀에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흑인은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는 대신 흑인 야구연맹인 Negro Baseball League에 들어갔습니다. 이 리그는 흑인들이 야구를 할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기 위해 1920년대에 조직된 것이었습니다.

프로 야구팀들이 흑인 선수를 받아들이기 전까지 뛰어난 여러 흑인 선수들은 니그로 리그에서 활동했습니다. 흑인들의 기량과 기록은 메이저 리그의 백인 선수들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흑인 선수들은 매우 힘든 선수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여러 군데에 팀이 존재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선수들은 경기를 하려면 매번 버스를 타고 먼 길을 가야 했습니다. 이들은 농장의 헛간에서 옷을 갈아 입었고 목욕물도 동료 선수와 나누어 써야 했습니다.

재키 로빈슨은 캔사스 시티 모나크 팀에 들어갔습니다. 이 팀은 니그로 리그에서 가장 강력한 팀의 하나였습니다. 이때 메이저 리그, 뉴욕 브루클린 다저스 팀 단장이자 클럽 회장이었던 브랜치 리키가 재키 로빈슨을 주시했습니다. 리키 감독은 실력은 뛰어난데 백인 연맹에서 당할수 있는 인종차별과 모욕을 견딜 수 있는 흑인 선수를 찾고 있었습니다. 리키 단장은 재키 로빈슨이 선수로서도 손색이 없고 크게 성공할 수 있는 강한 자제력을 갖고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리키 단장은 재키 로빈슨과 메이저 리그 진출을 논의했습니다. 리키 단장은 운동장에서 어떤 일이 벌어져도 화를 내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야 한다고 요구했고 재키는 거기에 동의했습니다. 재키 로빈슨은 ‘그것은 어떤 개인 한 사람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힘든 일이겠지만, 나는 최대한 스스로를 자제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고 말했습니다.

드디어 1945년 재키 로빈슨과 다저스의 입단계약이 체결됐습니다.

재키 로빈슨은 다저스와 계약을 체결한 후 레이철 아이숨과 결혼했습니다. 이들은 세 자녀를 두었습니다. 브랜치 리키 감독에게 로빈슨의 결혼은 중요했습니다. 사람들이 좀더 쉽게 로빈슨을 받아들이도록 만드는데는 결혼이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1946년 재키 로빈슨은 다저스의 마이너 리그인 몬트리얼 로얄스에서 뛰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리키 감독은 로빈슨이 메이저 리그에서 인종차별을 감당할 수 있는지를 눈 여겨 살펴보았습니다.
드디어 1947년 4월 15일, 재키 로빈슨은 에베츠 필드에서, 2만 6천여명의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메이저 리그 야구에 데뷔했습니다. 1880년대 이후, 메이저 리그 야구의 인종 장벽을 넘은 최초의 선수였습니다.

그러나 재키 로빈슨은 예상했던대로 차별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경기장 안에서나 밖에서나 살해 위협도 여러 차례 받았습니다. 경기 중 피처는 노골적으로 로빈슨의 머리를 향해 공을 던졌습니다. 여러 야구팀은 로빈슨이 나오는 다져스와는 경기를 하지 않겠다고 위협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같은 팀 선수들도 로빈슨을 퇴출시키려 했습니다.

다른 도시로 경기를 하러 가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팀의 백인 선수들과 함께 호텔에 묵거나 식당에서 음식을 먹을수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로빈슨은 굴하지 않고 야구를 했습니다.

그는 뛰어난 기량을 갖고 있으면서 기록면에서도 야구 역사에 남을 타자였습니다. 1947년에는 신인왕, 1949년에는 내셔널 리그 타격왕과 가장 뛰어난 선수, 즉 MVP 상을 받았습니다. 내셔널 리그 도루상도 두차례 받았습니다. 그는 여섯 차례나 내셔널 리그 올스타에 선정됐습니다.

브루클린 다저스가 여섯차례나 리그의 챔피언 자리를 차지한데는 로빈슨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1955년 다저스가 월드 시리즈 챔피언이 된데도 로빈슨의 힘이 컸습니다. 그의 타율은 통산 3할 1분 1 리, 비교적 짧은 리그 선수 기간에도 홈런은 137개, 타점 734 점, 도루가 197개에 달했습니다.

재키 로빈슨은 흑인과 백인이 함께 살고, 일하고, 즐길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기량, 용감성, 자제력 등을 통해 흑인, 백인 모두에게서 찬사를 받았습니다. 로빈슨의 그같은 성공은 다른 흑인들에게 백인만으로 구성됐던 여러 스포츠에 진출하도록 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재키 로빈슨의 성공적 데뷰 이후 흑인 선수들이 스포츠 리그에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1950년대 말에 가서는 메이저 리그 모든 야구팀에 흑인과 중남미 계 선수들이 진출했습니다.

재키 로빈슨은 37세때인 1956년 선수생활에서 은퇴했습니다. 그 후에는 정치가로, 사업가로, 민권운동가로 활약했습니다. 그는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와 함께 민권운동, 인종차별 폐지 운동 등에 참여했습니다. 흑인 최초로 텔레비젼 방송국의 야구 해설자로도 활약했습니다. 그의 삶을 그린 영화도 나왔습니다. 로빈슨은 1962년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정됐습니다.

심장병과 당뇨를 앓던 재키 로빈슨은 1972년 10월 24일 53세로 타계했습니다. 메이저 리그는 그가 선수로 뛰었던 등번호 '42번'을 전구단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습니다. 또한 매년 재키 로빈슨을 기리는 행사를 열어 그의 업적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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