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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아메리카] 가난과 차별 극복하고 정상의 언론인으로, 칼 로완


[인물 아메리카] 가난과 차별 극복하고 정상의 언론인으로, 칼 로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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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로완은 극도의 가난과 차별을 극복하고 신문기자, 칼럼니스트, 평론가가 된 미국 최초의 아프리카계 언론인이었습니다.

칼 로완은 자신을 ‘뉴스페이퍼맨(newspaperman)’, 즉 신문기자라고 불렀지만, 로완은 여러 베스트 셀러 책을 쓴 저술가이기도 했습니다. 칼 로완은 미국의 인종 관계를 깊이 파헤쳤고 가난한 서민과 소수민족의 목소리를 전했습니다.

칼 로완은 존 F. 케네디 대통령 시절 흑인으로는 최초로 국무부 부 차관보를 역임했으며, 해외공보처(USIA) 처장을 역임하는 등 관직에도 나갔습니다.

칼 로완.
칼 로완.

칼 로완은 1925년 미국 남부 테네시 레이븐스크로프트(Ravenscroft)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가정은 몹시 가난했습니다.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일은 가끔 공사장에 나가 목재를 쌓는 것뿐이었습니다. 어머니도 일할 기회가 없었지만, 있다면 백인 가정에 가서 청소해주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집에는 전기나 수도도 들어오지 않았고, 전화, 라디오도 없었습니다. 칼은 때로는 배가 고파 음식을 훔치기도 했고, 근처 목장에 들어가 소의 젖을 마셨다고 회고했습니다. 가난한 집에 시계가 있을 리 없어 기차 소리에 맞추어 학교에 갔습니다.

그러다 보니 기차가 늦으면 학교에도 늦었습니다. 학교는 인종 별로 따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흑백 갈등은 계속되고 있었고, 그에게는 희망이라는 것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테네시주의 버나드 고등학교에 다니던 때, 그는 자신의 삶을 바꾸어 놓은 여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영어와 역사를 가르치는 베씨 테일러 구윈 선생님이었습니다. 베씨 선생님은 칼에게 너만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보도록 노력하라고 말했습니
그런 선생님의 도움으로 칼은 고등학교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것도 수석으로 졸업했습니다. 졸업 후 칼은 대학에 가기 위해 결핵 병원에서 현관 청소를 하며 돈을 모았습니다.

칼은 1942년 테네시 주립대학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돈이 없어 두세 달 만에 학교를 그만두어야 할 처지에 놓였습니다. 학교를 떠나 버스를 타러 가는 길에 칼은 우연히 길에서 20달러를 주웠습니다. 그 돈이면 당장 학교를 떠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테네시 주립대학과 워쉬번 대학에서 계속 공부하던 칼은 성적이 뛰어나자 미 해군에 발탁이 됐습니다. 그리고 미 해군 사상 최초의 흑인 장교 15명 중 한 사람이 됐습니다. 칼은 2차 대전 중 함선에서 복무했습니다. 제대한 뒤에는 복학했다가 오하이오주에 있는 오벌린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이어 미네소타 대학에서 언론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1948년 그는 미네소타에서 발행되는 ‘미니애폴리스 트리뷴’ 신문에 들어가 기자가 됐습니다. 칼은 대형 신문사 최초의 흑인 기자의 한사람이 된 것입니다. 젊은 기자로서 칼은 민권운동 당시 남부의 인종 문제에 관한 취재를 담당했습니다. 1956년에는 수에즈 운하 분규를 취재하기 위해 중동으로 파견됐습니다. 그 후 유럽, 인도를 비롯한 아시아 여러 곳을 여행하면서 기사를 썼습니다. 칼은 특종을 자주 써 기자들에게 주는 상도 많이 받았습니다.

남부의 인종 갈등에 관한 그의 기사는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눈에 띄었습니다. 1961년 케네디 대통령은 칼 로완을 국무부 부 차관보로 임명했습니다. 1962년 쿠바 위기 때에는 유엔주재 미국 대표단의 한사람으로 활동했습니다. 그 후에는 핀란드 주재 미국 대사로 임명됐습니다.

케네디 행정부에서 일하다 보니 칼 로완은 자연 린든 B. 존슨 부통령과도 알게 됐습니다. 1963년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되자 존슨 부통령이 그 뒤를 이었습니다. 1964년 존슨 대통령은 칼 로완을 해외공보처(USIA) 처장으로 임명했습니다. USIA는 세계 각지의 미국 문화원과 미국의 소리(VOA) 방송 등을 산하에 두고 있는 정부 기구였습니다. 이로써 당시 칼은 미국 정부 내 흑인으로서는 최고위 관리가 됐습니다.

칼 로완은 해외공보처와 VOA를 맡게 된 것은 생애에 큰 영광의 하나였다고 말했습니다. 로완은 그러나 1년 후 정부를 떠나 신문에 글을 싣는 데 전념했습니다. 로완은 정치, 경제, 사회 등 여러 분야의 중요 문제에 대한 칼럼을 썼습니다. 1966년에서 1998년까지 그는 시카고 선 타임스에 칼럼을 썼습니다. 그의 글은 신디케이트 시스템을 통해 100군데가 넘는 신문이 게재할 만큼 미 전역에서 인기와 권위가 있었습니다.

그 후 라디오와 텔레비전 프로그램에도 출연했습니다. 그는 시사 프로그램인 ‘인사이드 워싱턴(Inside Washington)’의 고정 토론자로 나갔습니다. 그는 전 생애에 걸쳐 미국의 인권문제, 인종관계 개선을 위해 강력한 목소리를 냈습니다. 동시에 흑인 젊은이들에게는 공부를 열심히 하고 부지런히 일해서 자신을 발전시키라고 충고했습니다.

1987년 칼 로완은’Project Excellence’라는 흑인 우수 학생 지원계획을 설립했습니다. 여러 해에 걸쳐 이 계획은 수백만 달러를 투입해 많은 흑인 학생들에게 대학 입학금을 지원해 주었습니다.

1991년 칼 로완은 ‘장벽을 허물다(Breaking Barriers)’라는 제목의 자서전을 펴냈습니다. 칼 로완은 자신의 저서 장벽을 허물다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커뮤니케이션 분야에는 흑인에 대한 큰 장벽이 있었다. 내가 언론계에 들어갔을 때 일간지에서 정규직으로 일하는 기자는 전국적으로 다섯 손가락 이내였다. 그러나 오늘날은 온갖 신문, TV, 라디오, 대기업의 홍보 분야 등에 많은 흑인이 진출해 있다. 나는 그렇게 되도록 하는 데 어느 정도 기여를 했다고 생각한다”

칼 로완은 워싱턴에서 정상급 언론인들의 모임인 ‘그리디런 클럽(The Gridiron Club)’의 회장이 됐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의 사상이 너무 진보적이라고 생각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너무 온건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의 주장이
그는 언론인에게 수여되는 ‘시그마 델타 시(ΣΔΧ)’ 메달을 3년 연속 수상한 사상 최초의 언론인이었습니다. 미국의 언론인 단체인 ‘내셔널 프레스 클럽’은 1999년 그가 숨지기 전 해에 평생성취상을 수여했습니다. 콜비 칼리지는 그에게 명예박사

로완은 일생 부인 비비안 머피와 함께 살았고 3남매를 두었습니다. 말년에 이르러 로완은 당뇨와 심장병으로 시달렸습니다. 그러나 어떤 불운한 일도 그의 의지를 꺾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마지막까지도 신문 칼럼 쓰는 일을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칼 로완은 2000년 9월 23일 워싱턴 D.C.에서 타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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