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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아메리카] 평가 엇갈리는 첫 서민 대통령, 앤드루 잭슨


[인물 아메리카] 평가 엇갈리는 첫 서민 대통령, 앤드루 잭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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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드루 잭슨 미국 대통령 초상.
앤드루 잭슨 미국 대통령 초상.

앤드루 잭슨은 미국의 제 7대 대통령입니다. 그에 앞선 6명의 대통령들은 모두 귀족들이었고 대 지주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잭슨은 가난한 고아로써, 스스로 노력해 변호사도 되고 군인도 되고 백악관까지 입성한 첫 평민 대통령이었습니다.

1829년부터 1837년까지 2차에 걸쳐 대통령을 지낸 잭슨 대통령은 나라의 영토를 넓히고 연방의 분열을 막는데 기여했으며, 보통 사람들의 권리를 증진하기 위해 애썼습니다.

고집스럽고 꼬장꼬장해 올드 히코리 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그는 백악관에 입성할 때도 인기였지만 나갈 때는 더 인기가 높았던 대통령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메리카 원주민, 즉 인디언 탄압, 영토 확장을 위한 여러 전투 등으로 비판을 받고 있기도 합니다.

잭슨은1767년 3월 15일 오늘날의 사우스 캐롤라이나의 왝스호스 지역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당시 개척지였던 그곳의 기록이 정확치 않아 오늘 날 노스 캐롤라이나와 사우스 캐롤라이나는 서로 자기 주가 잭슨의 출생지라고 주장하고 있기도 합니다.

잭슨은 정식 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나마 약간의 교육 기간도 이 지역에 침입한 영국군 때문에 계속할 수가 없었습니다.

영국군은 아직 10대의 소년인 잭슨을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군 병영에 수감중 영국군의 한 장교가 그에게 군화를 닦으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잭슨은 단호히 그것을 거부했습니다. 영국군 장교는 군용 대검으로 잭슨의 얼굴을 쳤습니다. 이로 인해 잭슨은 오른 팔과 얼굴에 상처를 입고 그 흉터는 오랫 동안 남아 있었습니다. 그의 형과 어머니도 영국군의 가혹한 행위로 결국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같은 일련의 사건들로 영국인에 대한 잭슨의 증오심은 마음 속 깊이 뿌리 박혔습니다.

잭슨은 10대 후반 약 2년에 걸쳐 법률을 열심히 공부해 법조인이 됐습니다. 잭슨은 오늘날의 테네시 주인 아팔라치안 산맥 서부로 옮겨가, 내쉬빌의 검사, 변호사 등으로 활동했습니다.

잭슨은 군 대령의 딸 레이첼 로바즈와 결혼했습니다. 성격이 급하고 명예를 매우 중요시 했던 잭슨은 종종 싸움에 말려들곤 했습니다. 어느 때 자신의 아내 레이첼을 비방한 남자와 결투를 벌여 목숨을 빼앗은 일도 발생했습니다. 잭슨은 변호사로 꽤 많은 재산을 모아 내쉬빌 부근에 ‘허미티쥐’ 라는 명칭의 대 저택을 구입했습니다. 노예도 사들였습니다.

잭슨은 1796년 연방 하원의원으로 당선됐습니다. 이어 상원의원으로도 당선됐지만 불과 1년만에 사임을 하고 테네시 주 대법원 판사가 됐습니다. 잭슨은 그 후 주 민병대의 사령관으로 추대됐습니다.

1812년 소장이 된 앤드류 잭슨은 영국군의 지원을 받으며 남부 변경지역을 위협하던 크리크 인디언과의 전쟁을 벌였습니다. 잭슨이 지휘하던 민병대는 5개월간의 전투끝에 인디언을 격파했습니다. 연이어 앨라바마의 토호페카 전투에서도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1814년 호스슈 벤드 전투에서는 800여 명의 레드 스틱스 크릭 원주민을 학살하기도 했습니다.

이 처럼 주요 전투에서 인디언과 그 배후의 영국군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면서 미국은 오늘날의 앨라바마와 조지아 주 일대의 광대한 땅을 차지하게 됐습니다. 그같은 승리로 잭슨은 국가적 영웅으로 떠올랐습니다.

1817년 미 육균 남부 사령관이 된 잭슨은 휘하 부대에 플로리다 침공을 명령했습니다. 당시 스페인이 장악하던 주요 지역을 잭슨 군이 점령함으로써 일대의 땅도 미국 차지가 됐습니다.

하늘을 찌를 것 같은 그의 인기로 잭슨은 대통령에 출마하라는 많은 권유를 받게 됐습니다. 1824년 잭슨은 대선에 나섰지만 근소한 차이로 퀸시 애담스에게 패했습니다. 앤드루 잭슨은 1828년 재 도전에 나섰습니다. 이번에는 큰 표 차로 당선됐습니다.

취임식 날에는 2만여명에 달하는 지지자들이 국회의사당에서부터 백악관 까지 그가 지나가는 길에 늘어서서 환호를 보냈습니다. 그중에는 수백 킬로미터나 떨어진 먼곳에서 올드 히코리를 보겠다고 찾아온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백악관 안까지 따라왔습니다. 문으로 들어갈 수가 없자 창문을 넘어 들어가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밀려들자 부엌의 접시가 깨지고 바닥에는 쥬스가 엎질러지는가 하면, 대통령을 더 잘 보려고 소파건 의자건 사람들이 올라서서 난장판을 이루었습니다. 질서 유지가 어려워지자 대통령은 백아관 뒤 창문으로 빠져나가 근처의 호텔에서 그날 저녁을 자야 했습니다.

대통령에 취임하자 그는 즉각 평생 녹봉을 받는 만여명의 연방공무원 중 거의 천명이나 되는 인원을 해임하고 자기를 지지하는 사람들로 채웠습니다. 잭슨은 가게 점원, 농부 등 보통 사람들도 정치적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센스를 가진 사람들이며 그런 사람들도 정부 관리로 일할 기회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잭슨 대통령 1기의 가장 중요한 정책은 원주민 이주 계획이었습니다. 1830년 원주민 이주법을 만든 잭슨 대통령은 그 법에 근거해 인디언들을 남부에서 미시시피 강 서쪽으로 이주시켰습니다. 체로키, 치카소, 촉타우, 세미놀 등 인디언 부족들은 수억 에이커나 되는 광대하고 기름진 땅을 포기하고 서쪽으로 밀려나 재 정착을 해야 했습니다.

수많은 인디언들이 걸어간 먼 이주길은 ‘눈물의 길’로 불리웠습니다. 인디언들은 이동 중 질병,기아,추위,백인들의 공격 등으로 4천여 명이 희생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잭슨이 주도한 인종 정책에 의해 미시시피 강에서 대서양에 이르는 넓은 땅에 더 이상 원주민들은 없어졌습니다. 인디언 강제이주는 앤드루 잭슨의 명성을 손상시킨 가장 큰 정책의 하나였습니다.

잭슨 대통령 스스로 가장 잘한 일이라고 내세웠던 정책은 합중국 제2의 중앙은행 폐지였습니다. 이 은행은 표면적으로는 민간기업의 성격을 띠고 있지만 실제로는 정부를 배경으로 독점적인 지위를 남용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잭슨의 태도는 국민들로부터 큰 지지를 얻었습니다. 미국은 애드루 잭슨 대통령의 얼굴을 20달러짜리 지폐에 새겨 그에 대한 존경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1832년 대선에서 그는 상대 클레이 후보 득표수의 거의 다섯 배에 가까운 지지를 얻으며 압승을 거두었습니다.

잭슨 대통령은 2차 임기 마지막 해 남부의 텍사스 문제 해결에 주력했습니다. 당시 멕시코 통치 아래 있던 텍사스에는 차츰 미국 정착민들이 늘어났습니다. 정착민들은 급기야 멕시코 정부로부터의 독립을 추진했습니다. 멕시코 정부는 군대를 파견해 반란을 제압했습니다.

그러나 반란 지도자 샘 휴스턴은 1836년 반격을 가해 끝내 독립을 쟁취했습니다. 이듬해 잭슨은 그의 오랜 친구 샘 휴스톤 (Sam Houston)이 이끄는 신생 공화국을 승인하는데 동의했고, 미국 의회는 텍사스의 독립을 승인했습니다. 그로부터 9년 후 한반도의 3배가 넘는 거의 70만 제곱 킬로미터의 대평원이 미국 연방에 통합됐습니다.

1837년 앤드류 잭슨은 대통령직을 마틴 밴 뷰렌 ( Martin Van Buren)에게 넘기고 백악관을 떠나게 됐습니다. 앤드루 잭슨과 밴 뷰렌은, 마차에 동석해 펜실베니아가를 지나 국회 의사당으로 갔습니다. 길가에 있던 군중들은 환호를 멈추고 침묵속에 모자를 벗고 잭슨에 경의를 표했습니다.

한 상원의원은 그 광경을 “지는 태양이 떠오르는 태양을 무색하게 했다”라고 표현했습니다.

잭슨은 고향집인 테네시 주 허미티지로 돌아갔습니다. 잭슨은 그로부터 8년을 더 살고 1845년 6월 8일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여러가지 정책들은 그후 반세기 동안 미국 역사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거의 모든 여론조사에서 인기 순위 10위권 안에 머물던 그도 시대가 달라지면서 평가가 달라지고 있습니다. 특히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으로 미국 전역에서 흑인의 생명도 중요하다는 시위가 극에 달했을 때, 백악관 인근에 위치한 그의 동상이 훼손됐습니다.

미국의 일부 언론은 "그가 사후에 찬사를 받을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몇 년째 이뤄지고 있다"고 보도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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