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아메리카 250] 미국의 제13대 밀러드 필모어 대통령

밀러드 필모어 13대 대통령

진행자) 미국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건국 250주년 소식을 전해드리는 '역사 속 아메리카 250', 오늘은 김미옥 기자와 함께합니다. 안녕하세요?

기자) 네,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미국 역대 대통령을 만나보는 시간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40년을 군인으로 살면서 대통령 선거에서 한 번도 투표해 본 적이 없지만, 결국엔 대통령 자리에 오른 12대 재커리 테일러 대통령을 소개해 드렸는데요. 오늘은 1850년부터 1853년까지 재임한 13대 밀러드 필모어 대통령을 만나보겠습니다.

진행자) 재커리 대통령도 그랬지만, 필모어 대통령도 미국 역사에서 독특한 인물이라고요?

기자) 그렇습니다. 오늘날 미국 대통령이라고 하면 공화당이나 민주당 소속을 떠올리게 되는데요. 필모어는 휘그당 소속이었습니다. 휘그당은 이후 사라졌기 때문에 필모어는 마지막 휘그당 출신 대통령이고요. 또 필모어의 인생을 살펴보면, 대통령이 된 과정부터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진행자) 대통령이 되기 전에는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기자) 필모어는 1800년 1월 7일, 뉴욕주의 가난한 농가에서 8남매 가운데 둘째이자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의 농장에서 일했고, 15살이 되던 해에는 직물 제조업자의 제자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당시 도제 생활은 상당히 혹독했습니다. 필모어는 교육을 제대로 받을 형편도 아니었는데요. 하지만 공부에 대한 열망은 대단했습니다. 틈만 나면 책을 읽으며 독학했고, 결국 30달러를 빌려 도제 계약을 끝낸 뒤 집으로 돌아갔는데요. 필모어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약 100마일, 그러니까 160km가량을 걸어갔다고 합니다.

진행자) 비록 가난하고 힘겨운 생활이었지만, 공부에 대한 열정만큼은 남달랐던 것 같네요.

기자) 맞습니다. 그리고 필모어는 자신의 인생에 큰 영향을 준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요. 바로 애비게일 파워스라는 여성입니다. 필모어가 지역 학교에 다닐 당시 만났는데요. 애비게일은 당시 두 살 연상인 19살의 교사였고, 필모어의 공부를 격려하고 도와줬습니다. 그러다 두 사람은 결국 결혼하게 됐고요. 필모어는 이후 변호사가 됐고, 뉴욕주 의회와 연방 하원에서 정치인으로 활동했습니다.

진행자) 정치인으로서의 이력을 볼까요?

기자) 네, 1847년에는 뉴욕주의 회계감사관, 즉 주의 재정을 담당하는 고위 공직자로 당선됐고요. 1848년에는 휘그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재커리 테일러의 러닝메이트로 출마해 이듬해 부통령 자리에 올랐습니다.

진행자) 그런데 필모어가 부통령으로 있다가 갑자기 대통령이 됐죠?

기자) 그렇습니다. 1850년 당시 미국은 노예제를 둘러싸고 북부와 남부가 극심하게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7월 4일, 재커리 테일러 대통령이 독립기념일 행사에 참석한 뒤 갑자기 병을 앓기 시작했고, 7월 9일 사망했습니다. 테일러가 취임한 지 불과 16개월 만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부통령 필모어가 대통령 자리를 이어받았는데요. 말 그대로 준비할 틈도 없이 백악관의 주인이 된 것입니다.

진행자) 대통령이 된 필모어 앞에 놓인 과제는 무엇이었습니까?

기자) 바로 노예제 문제였습니다. 당시 미국은 멕시코와의 전쟁을 통해 서부의 광대한 영토를 새로 확보했는데요. 가장 큰 문제는 이 새로운 지역에서 노예제를 허용할 것인지였습니다. 정치 거물 헨리 클레이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안을 하나로 묶은 이른바 ‘1850년 타협(Compromise of 1850)’을 추진했습니다. 하지만 의회에서 남부와 북부의 의견이 팽팽하게 맞서면서 법안은 교착 상태에 빠졌습니다.

진행자) 이런 상황에서 필모어가 대통령이 된 거군요?

기자) 맞습니다. 필모어는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분명히 했습니다. 타협안을 지지하겠다는 것이었죠. 필모어는 테일러 행정부의 각료들이 사임하자 새 내각을 꾸리고, 타협을 지지하는 대표적인 휘그당 정치인 대니얼 웹스터를 국무장관으로 임명했습니다.

진행자) 1850년 타협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이 담겼습니까?

기자) 다섯 가지가 핵심입니다. 첫째, 캘리포니아를 자유주로 연방에 편입했습니다. 둘째, 텍사스와 뉴멕시코 사이의 경계를 정하고 텍사스에 1천만 달러를 보상했습니다. 셋째, 뉴멕시코와 유타를 준주로 조직하고, 노예제 문제는 이른바 주민 주권(popular sovereignty)에 맡겼습니다. 넷째, 워싱턴 D.C.에서 노예 매매를 폐지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이 가장 논란이 컸습니다.

진행자) 논란이 된 조항, 어떤 내용이었나요?

기자) 바로 도망노예법(Fugitive Slave Act)을 강화한 것입니다. 이 법에 따라 노예주에서 도망친 노예를 찾아 주인에게 돌려보내는 과정에 연방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도록 했습니다. 도망친 노예를 돕거나 숨겨주는 사람에게는 처벌도 가해졌습니다. 하지만 이 타협으로 미국의 노예제 갈등이 해결된 건 아닙니다. 필모어는 타협을 통해 당장의 국가적 위기를 피하고 연방을 지킬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타협은 남북 간의 충돌을 늦추는 역할에 그쳤고요. 필모어는 타협을 통해 연방을 지키려 했지만, 결국 남부와 북부 양쪽에서 비판받았습니다.

진행자) 필모어 대통령의 외교 정책은 어땠나요?

기자) 흥미로운 부분이 있는데요. 바로 일본과의 관계입니다. 당시 미국은 아시아와의 무역을 확대하려 했고, 일본은 미국 상선들이 중국과 동남아시아로 가는 길에 들러 물자를 보충할 수 있는 중요한 지역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필모어는 매슈 페리 제독의 일본 파견을 결정했습니다. 페리가 일본에 도착한 것은 필모어의 퇴임 후인 1853년이었고요. 이 외교적 노력은 1854년 가나가와 조약으로 이어졌습니다. 이 조약은 미국이 아시아로 활동 영역을 넓혀 가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진행자) 필모어 대통령은 재선에 도전할 수 있었습니까?

기자) 그러지 못했습니다. 1850년 타협을 둘러싸고 휘그당 내에서 분열이 일었고요. 결국 1852년 휘그당 대통령 후보 지명에서 필모어는 윈필드 스콧 장군에게 패했습니다. 그리고 퇴임 후인 1856년 아메리칸당의 대통령 후보로 다시 출마했지만, 결국 낙선했습니다. 필모어는 이 선거를 끝으로 정치에서 사실상 물러났습니다.

진행자) 네, 오늘은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미국 대통령 자리에 오른 밀러드 필모어 대통령을 만나봤습니다. 김미옥 기자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