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노동자들이 학생 비자로 러시아에 들어가 러시아군에 전투식량용 식품을 공급하는 업체의 반려동물 사료 시설 등에서 일하고 있다는 국제 인권단체의 위장 조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또 모스크바 주재 북한대사관 관계자들이 노동자 배치에 앞서 러시아 사업장을 점검했다며 북한 당국이 이 사업에 관여한 정황이 있다고 밝혔는데, 북한 노동자 해외 파견은 유엔 제재에 따라 금지돼 있습니다. 조상진 기자가 보도합니다.
북한 노동자들이 유엔 제재를 피해 러시아 전시경제와 연결된 업체에서 일하고 있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국제법 전문 인권단체 ‘글로벌라이츠컴플라이언스(GRC)’ 는 29일 북한 노동자를 러시아 기업에 공급하는 중개망과 북한 당국의 관여 정황을 추적한 보고서를 발표하고 이같이 밝혔습니다.
GRC는 약 9개월 동안 공개 자료 분석과 위장 조사를 통해 러시아 사업가 블라디미르 소콜로프가 운영하는 노동력 중개망을 조사했다고 밝혔습니다.
보고서에 따르면 소콜로프의 온라인 중개 사이트 ‘KNDR.su’는 북한 노동자를 최소 50명 단위로 알선하며, 1명당 10만~15만 루블의 수수료를 받는다고 광고했습니다.
GRC 조사관들은 북한 노동자를 고용하려는 업체로 위장해 중개망의 운영 책임자 루슬란 주코프와 접촉했습니다.
주코프는 북한인들이 학생 비자로 러시아에 들어와 대학에 등록한 뒤 기업에서 현장실습을 하는 방식이라고 설명했다고 GRC는 전했습니다.
또 고용된 북한인들이 실제로는 학교에 다니지 않는 통신교육 형태로 하루 12시간씩 주 6일 일한다는 설명도 들었다고 밝혔습니다.
주코프는 이런 방식이 노동법 적용을 피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고 GRC는 밝혔습니다.
보고서에 따르면 러시아는 지난해 북한 주민에게 비자 3만6천413건을 발급했고, 이 가운데 98% 이상이 학생 비자였습니다.
국제법 전문 인권단체 ‘글로벌라이츠컴플라이언스(GRC)’ 가 보고서에서 공개한 사진. 북한 노동자들이 의류 제작 공장에서 작업하고 있다.
GRC는 이 중개망이 실제로 북한 노동자를 공급하는 계약을 맺은 기록도 찾아냈습니다.
주코프가 운영하는 회사는 올해 8월 러시아의 한 농업기업과 북한 학생 50명의 현장실습을 위한 13만3천800달러 규모의 공공조달 계약을 따냈습니다.
보고서는 이 계약이 학생 실습을 명목으로 북한 노동자를 공급하는 중개망의 사업 구조를 보여주는 드문 문서 기록이라고 평가했습니다.
다만 이 계약에 따라 실제로 노동자가 입국해 일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군수 공급망과의 연결이 드러난 곳은 모스크바주에 있는 식품업체 ‘KPP 루스콘’으로, GRC는 이 업체가 러시아군 전투식량에 쓰이는 통조림 식품을 생산하는 대형 업체라고 밝혔습니다.
GRC는 이후 소콜로프가 지난 7월 30일 공개한 영상에서 이 업체에서 일하는 북한 노동자 약 30명을 확인했습니다.
영상 속 노동자들은 같은 부지의 반려동물 사료 생산시설에서 개 사료를 만들고 포장하고 있었으며, GRC는 영상 속 설비와 포장재, 건물 특징을 대조해 위치를 확인했다고 밝혔습니다.
이번 보고서는 특히 북한대사관이 노동자 배치에 관여한 정황도 담겼습니다.
중개 사이트는 북한 노동자를 받으려는 러시아 기업이 승인 절차의 일부로 북한 측의 현장 점검을 받아야 한다고 안내했습니다.
GRC는 공개된 사진과 영상을 분석하고 얼굴 인식 기술 등을 활용해 모스크바 주재 북한대사관 관계자들이 러시아 공장 여러 곳을 방문한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습니다.
특히 방문단에는 북한대사관 참사 김진혁도 포함됐습니다.
이들은 KPP 루스콘에서 반려동물 사료 시설이 아니라 전투식량 등 사람이 먹는 식품을 만드는 본관 건물을 둘러봤고, 이후 이 업체에서 북한 노동자들이 일하는 모습이 확인됐다고 보고서는 밝혔습니다.
국제법 전문 인권단체 ‘글로벌라이츠컴플라이언스(GRC)’ 가 보고서에서 공개한 사진. 모스크바 주재 북한대사관 관계자들이 시설을 방문 후 둘러보고 있는 모습.
보고서는 이런 사전 점검 절차와 대사관 관계자들의 현장 방문, 이후 확인된 노동자 근무를 근거로 북한 당국이 노동자 공급 과정에 직접 관여하고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한편, 북한대사관 관계자들은 미국의 제재 대상인 금속가공업체 ‘아그리소브가즈’도 노동자 배치 후보지로 점검했습니다.
이 업체의 고객사에는 제재 대상인 국방, 항공우주, 해군 관련 기업들이 포함돼 있다고 보고서는 밝혔습니다.
이런 가운데 보고서는 북한 노동자들을 통제하는 방식도 지적했습니다.
중개 사이트는 북한 노동자들이 도망가지 않는다며, 신분 서류를 대사관이 관리하고 계약을 어기면 본국에서 심각한 불이익을 받는다고 광고했습니다.
GRC는 서류 압수와 이동 제한, 처벌 위협이 국제노동기구가 제시하는 강제노동의 징표에 해당한다고 평가했습니다.
유엔 안보리는 2017년 결의 2375호로 북한 국적자에 대한 신규 노동허가를 금지했고, 같은 해 결의 2397호로 해외에서 소득을 올리는 북한 노동자를 24개월 안에 송환하도록 했습니다.
보고서가 중개망 운영자로 지목한 소콜로프는 러시아 기업 블랙호스의 창립자이자 회장으로, 지난 12일 북한과의 산업협력 사업을 추진했다는 이유로 유럽연합(EU)의 제재 대상에 올랐습니다.
미국과 한국 등 11개국과 EU는 28일 공동성명에서, 다국적제재감시팀(MSMT)이 지난 9월 보고서로 북한의 해외 노동자 파견 실태를 공개했다며 모든 유엔 회원국에 대북 제재를 완전히 이행하라고 촉구한 바 있습니다.
VOA 뉴스 조상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