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아메리카 250] 텔레비전에서 시작된 비디오게임의 혁명

랠프 베어(Ralph H. Baer)가 개발한 ‘브라운 박스(Brown Box)’

진행자: 미국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건국 250주년을 맞아 되돌아보는 미국 역사 이야기, ‘역사 속 아메리카 250’입니다. 조진우 기자 나와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기자: 안녕하세요.

진행자: 오늘은 미국의 혁신을 돌아보는 시간입니다. 요즘은 집에서도 콘솔이나 컴퓨터로 다양한 비디오게임을 즐길 수 있는데요. 이런 가정용 비디오게임의 출발점에 미국에서 활동한 한 발명가가 있었다고요?

기자: 그렇습니다. 오늘날 전 세계에서 즐기는 비디오게임 산업의 초기 역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랠프 베어(Ralph H. Baer)입니다. 1960년대 당시 미국 가정에 텔레비전이 빠르게 보급되고 있었지만, 화면으로 직접 게임을 한다는 발상은 낯설었는데요. 베어는 TV를 단순한 시청 기기가 아니라 게임을 즐기는 도구로 활용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베어는 방위산업체였던 ‘샌더스 어소시에이츠(Sanders Associates)’에서 근무하며 동료들과 함께 TV용 게임 장치를 개발하기 시작했고, 1968년 무렵 여러 사람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시제품을 만드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 장치가 바로 ‘브라운 박스(Brown Box)’입니다.

진행자: 브라운 박스라면 ‘갈색 상자’라는 뜻인데요. 이런 이름이 붙은 이유가 있습니까?

기자: 네. 시제품 겉면에 갈색 나뭇결 무늬를 입혔기 때문입니다. 투자자들에게 제품을 좀 더 보기 좋게 보여주려는 목적이었습니다. 겉모습은 오늘날 게임기와 비교하면 투박했지만, 여러 게임을 선택해 즐길 수 있고 두 개의 조작 장치를 이용해 게임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게임도 다양했습니다. 화면 속 점을 움직여 탁구를 하거나 체커를 둘 수 있었고, 별도의 장치를 이용해 표적을 맞히는 게임도 가능했습니다. 오늘날처럼 정교한 그래픽이나 입체적인 화면은 없었지만, TV화면을 게임 공간으로 활용한다는 아이디어를 실제 제품으로 발전시킨 겁니다.

진행자: 시제품을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 소비자들이 사용할 수 있는 제품으로도 이어졌다고요?

기자: 그렇습니다. 당시 ‘샌더스 어소시에이츠’는 군수 기업이었기 때문에 직접 생산해 판매하는 것보다 가전 기업과 라이선스 계약을 맺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판단하고 기술을 상용화할 기업을 찾았습니다. 이후 전자제품 회사 ‘마그나복스(Magnavox)’와 생산 계약을 맺었고 1972년 세계 최초의 가정용 비디오게임기인 ‘마그나복스 오디세이(Magnavox Odyssey)’를 출시됐습니다. 베어의 아이디어가 실제 시장에 나온 것이죠. 다만 오디세이의 화면은 오늘날 게임기와는 크게 달랐습니다. 화면에는 몇 개의 흰색 블록과 선 정도만 나타났기 때문에, 게임의 배경이나 경기장을 표현하기 위해 텔레비전 화면 위에 반투명한 색깔의 필름을 붙여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주사위나 카드, 게임용 돈 같은 실물 도구도 함께 활용했습니다.

진행자: 오디세이에 실물 주사위나 필름을 붙여 썼다니 재미있네요. 그런데 당시에 TV 화면을 향해 총을 쏘는 게임도 가능했다면서요?

기자: 맞습니다. 랠프 베어와 연구진은 오디세이에 사용된 최초의 '광선총(Light Gun)' 주변기기도 개발했습니다. TV 화면의 빛을 감지해서 표적을 맞혔는지 판별하는 방식이었는데요. 당시 아이들에게는 TV 속 목표물을 실제로 쏜다는 사실 자체가 대단히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화면 속 그래픽은 단순했지만, 오디세이는 이미 오늘날 게임들이 제공하는 다양한 주변기기와 상호작용의 기초를 거의 다 갖추고 있었던 셈입니다.

진행자: 지금 기준으로 보면 단순한 게임기지만, 당시에는 새로운 경험이었겠군요.

기자: 그렇습니다. 마그나복스 오디세이는 약 35만 대가 판매되며 가정용 비디오게임기 시장의 출발을 알렸습니다. 같은 해 전자제품 회사 ‘아타리(Atari)’가 탁구를 본뜬 오락실용 게임 ‘퐁(Pong)’을 내놓으면서 비디오게임은 대중적인 인기를 얻기 시작했는데요. 오디세이는 오락실 동전 게임이 아니라, 가정의 TV에 연결해 즐기는 기기였다는 점에서 차별화되었습니다.

이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미국 스미스소니언 국립미국사박물관에도 브라운 박스와 마그나복스 오디세이가 소장되어 있습니다.

진행자: 이렇게 비디오 게임의 시초를 연 랠프 베어는 이후 어떤 평가를 받았습니까?

기자: 랠프 베어는 원래 독일 태생의 유대인으로, 나치의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이주한 이민자 출신입니다. 평생 150개가 넘는 특허를 낸 정통 발명가였는데요. 가정용 비디오 게임을 발명해 새로운 산업과 문화의 기틀을 마련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6년 미국 정부로부터 발명가로서 최고 영예인 ‘국가 기술혁신 훈장(National Medal of Technology)’을 받기도 했습니다.

진행자: 지금은 비디오게임이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대중문화이자 거대한 산업이 됐는데요. 오늘날 그 규모는 어느 정도입니까?

기자: 미국 ‘엔터테인먼트 소프트웨어 협회(ESA)’에 따르면, 2025년 미국 소비자들의 비디오게임 관련 지출은 약 608억 달러였습니다. 게임 콘텐츠뿐 아니라 게임기와 주변기기 구매 비용까지 포함한 수치입니다. 미국 게임 산업은 경제 전반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ESA는 2025년 미국 게임 산업이 직간접적으로 약 25만1천 개의 일자리를 창출하거나 뒷받침했고, 미국 경제에 미친 전체 경제적 영향은 약 958억 달러로 추산했습니다.

진행자: TV화면에 점과 선을 띄우던 초기 실험이 오늘날에는 세계적인 산업으로 발전한 거군요.

기자: 그렇습니다. 랠프 베어와 동료들이 개발한 브라운 박스는 오늘날의 게임기와 비교하면 매우 단순했지만, 텔레비전을 게임을 즐기는 공간으로 바꾸려는 발상이었습니다. 이후 가정용 게임기가 발전하고 컴퓨터와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즐기는 시대가 열리면서, 비디오게임은 단순한 오락을 넘어 문화와 기술, 경제를 아우르는 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오늘날에는 현실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의 그래픽과 온라인으로 연결되는 게임을 즐길 수 있지만, 그 출발점에는 텔레비전 화면 속 점과 선을 움직여 보려 했던 초기의 실험이 있었습니다. 일상적인 가전제품을 새로운 방식으로 활용하려는 아이디어가 하나의 산업을 만들어낸 사례입니다.

진행자: 텔레비전 화면 속 작은 점과 선에서 시작해 세계적인 산업으로 성장한 비디오게임의 역사, 조진우 기자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