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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60주년 특집] 미 해병대 최초의 아시아 계 장교 추엔 리


6.25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올해로 60주년을 맞았습니다. 한반도가 일제의 식민지배에서 해방된 지 5년만에 발생한 한국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양분된 공산진영과 자유진영의 대리전의 성격을 띤 분쟁으로 이후 미국과 소련을 중심 축으로 하는 동서 간 냉전이 본격화됐습니다. 미국은 북한 공산군의 불법 남침으로 시작해 3년 간 계속된 한국전쟁에 대규모 병력을 파견했고 미국 외에도 전세계 15개국이 유엔의 깃발 아래 남한을 지원했습니다. 저희 미국의 소리 방송은 9회에 걸쳐 한국전쟁을 되돌아보는 특집방송을 준비했습니다. 오늘은 그 다섯 번째 순서로 김영권 기자가 미 해병대 최초의 아시아계 장교로 참전한 미군의 얘기를 보내드립니다.

‘전쟁은 수많은 아픔과 죽음을 양산하지만 영웅도 그 속에서 태어난다’

지난 5월 말 한국전쟁 다큐멘터리 시사회가 열린 워싱턴의 한 박물관. 검은 해병대 베레모를 쓴 80대 노년의 신사가 많은 하객들에 둘러싸여 인사를 받고 있습니다.

160 센티미터 정도의 작은 키에 깡마른 체구. 구김살 하나 없이 반듯한 옅은 갈색의 정복 아래로 잘 손질된 검은 구두가 조명에 반짝입니다. 가슴에는 형형색색의 수많은 훈장과 메달들이 가득하고, 미간을 약간 찌푸린 진지한 얼굴은 아직도 전장의 비장함이 남아있는 듯 흐트러짐이 없습니다.

이 노인의 이름은 커트 추엔 리. 미군 역사상 최초의 중국계 해병대 장교로 6.25 한국전쟁에서 큰 공적을 남긴 장진호 전투의 영웅입니다.

“한국전쟁은 아마도 역사상 가장 치열한 전쟁일 겁니다. 3년 여 동안 3만 6천 명이 넘는 전우들이 숨졌습니다. 11년 간 4만 7천 명의 미군이 숨진 베트남 전쟁과 비교하면 한국전쟁은 분명 매우 치열한 사투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국전쟁 중에서도 가장 치열한 전투의 하나로 미 전사에 기록돼 있는 장진호 전투. 워싱턴의 민간 공익단체인 스미소니언 재단은 이 죽음의 전투에서 퇴로를 열어 중공군에 포위됐던 8천 명의 미 해병대원을 구해낸 추엔 리의 공적을 기려 50분 분량의 다큐멘타리를 제작했습니다.

행사에 참석한 수 십 명의 현역 해병대 장교들이 선배에게 박수 갈채를 보냅니다.

80살을 훌쩍 넘긴 이 왜소한 체구의 한국전쟁 참전용사가 미국에서 새삼 조명을 받는 이유는 대체 뭘까?

전쟁 역사가들과 스미소니언 재단은 추엔 리를 비범한 용기의 소유자라며 찬사를 보냅니다. 그가 혹한의 장진호 전투에서 수 많은 미군을 살렸을 뿐 아니라 당시 미군 안에 만연된 인종차별을 극복한 최초의 아시아 계 해병대 장교라는 겁니다.

중국 광동성 출신 이민자의 아들로 캘리포니아 주에서 태어난 추엔 리는 1944년 해병대 군관학교를 졸업한 뒤 통역장교로 하와이에 배치됐습니다. 추엔 리는 그러나 그 때의 상황을 치욕적이었다고 회상합니다.

“해병대원들은 통역장교를 상관으로 존중하지 않았습니다. 통역장교 스스로도 지휘관처럼 행동하지 않았죠. 일반 병사가 툭 치면서 “헤이 조” 하고 인사하면 통역장교는 씩~ 웃곤 했죠. 전 백인 사병들이 상관인 중국계 통역장교에게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 매우 못마땅했습니다. 그래서 전 다르게 행동하리라 마음 먹었죠.”

리 중위에게 한국전쟁은 장교로서 지휘력을 발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추엔 리 중위는 전쟁이 발발하자 전투장교로 자원해 참전했습니다.

그리고는 전투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가장 앞장 서서 부대를 지휘했습니다. 그러자 처음 상대하는 아시아 계 장교를 미심쩍어 하던 부하들이 그의 용기를 보며 진정으로 따르게 됩니다. 당시 부하였던 로날드 버브리스 씨 입니다.

“많은 장교들은 처음에 기관총 조차 분해하지 못하면서 자신들을 장교로 대우해주길 바랬죠. 그들은 일병들에게 일을 시키거나 무거운 무기들을 들게 했습니다. 하지만 리 중위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장교라는 것에 개의치 않고 몸으로 궂은 일을 솔선수범 한 거죠. 그래서 부하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습니다.”

1950년 11월 27일. 강원도 원산에 상륙해 계속 북진하던 1만 6천 명의 미 해병대는 개마고원 아래자락에 있는 장진호에서 12만 명에 달하는 중공군에 포위됩니다. 그리고 17일 간, 피비린내 나는 사투가 시작됩니다.

영하 30도를 넘나드는 혹한 속에 병사들의 시체가 매일 눈보라 속에 쌓여갔습니다. ‘Devil Dog-지옥에서 온 개’ 라는 별명을 갖고 있던 용맹스런 미 해병대 조차 수적으로 6 배가 넘는 중공 군을 당해내지 못한 채 계속 수세에 몰렸습니다. 수 천 명이 전사하거나 부상 당했고, 병사들의 발은 동상으로 얼어갔습니다.

미 해병대는 결국 흥남으로 퇴각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추엔 리 중위는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류담리에서 다른 부대와 합류해 퇴각로를 확보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우리 앞에 어떤 상황이 닥칠지 아무 것도 예상할 수 없는 채 야밤에 작전을 수행해야 했습니다. 어디에 어느 규모의 적들이 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리 중위는 야밤에 5백 명의 병력을 이끌고 오로지 나침반에 의지해 산악 9 킬로미터를 행군했습니다. 허를 찔린 중공군 예하부대는 추엔 리 중위의 부대에 섬멸되고, 결국 미군은 흥남으로 연결된 퇴각로를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중공군 4만 여명이 사망했지만 미군 역시 2천 명 이상이 장진호 전투에서 전사했습니다. 당시 미 언론들은 장진호 전투가 미군 전투 사상 최악의 패전 가운데 하나라고 지적했습니다. 추엔 리는 그러나 전우들의 사투가 매우 값진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미 해병대는 장진호에서 중공군의 남하를 17일 간 저지해 연합군이 전열을 재정비 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중공군은 미 8군을 섬멸해 한반도에서 연합군을 몰아낼 수 있었습니다. 당시 서부전선이 손쉽게 무너져 중공군은 남쪽으로 진격하고 있었죠.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다시 워싱턴의 시사회장. 소령으로 전역한 추엔 리는 이날 아프가니스탄으로 떠나는 미 해병대 장교들에게 ‘용기’에 대해 말합니다.

“용기를 가져야 한다. 살기 위해 죽음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추엔 리의 다큐멘터리를 감상한 미 해병대의 톰 오닐 중위는 선배가 정말 자랑스럽다고 말합니다.

소수의 대원으로 엄청난 병력에 맞서 싸운 그와 선배들의 용기는 감동적이었고, 특히 아프가니스탄과 당시 한국의 지형 조건이 비슷해 마음이 많이 움직였다는 겁니다.

용기! 추엔 리는 아직도 분단된 한반도의 상황이 매우 안스럽다며 북한의 주민들에게도 힘을 내라고 말합니다.

“죽음과 불의를 두려워하지 말고 용기 있게 행동하세요. 그것이 사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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