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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아메리카] 새 나라의 역사를 만들어간 지도자, 토머스 제퍼슨 (2)


 [인물 아메리카] 새 나라의 역사를 만들어간 지도자, 토머스 제퍼슨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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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미국을 건설한 위대한 미국인을 만나보는 '인물 아메리카'. 새로운 나라의 역사를 만들어간 지도자, 토머스 제퍼슨의 두 번째 이야기입니다.

미국 버지니아주 리치몬드 '제퍼슨 호텔'의 토머스 제퍼슨 동상.
미국 버지니아주 리치몬드 '제퍼슨 호텔'의 토머스 제퍼슨 동상.

1800년 토머스 제퍼슨은 두 번째 대선에 도전해 접전 끝에 현임 존 애덤스를 물리치고 대통령으로 당선됐습니다. 제퍼슨은 1801년 3월 4일 제3대 대통령에 취임했습니다.

제퍼슨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다수가 나라를 이끌어가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지만 다수의 통치는 정당해야만 하며 소수도 똑같은 권리를 갖고 평등한 법에 의해 보호돼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제퍼슨은 공화제의 필요성을 거듭 강조하면서 사람들이 자유롭게 말하고 사고할 수 있을 때 국가는 오히려 위험하지 않다고 강조했습니다.

또 정부가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종교, 정치이념, 사회적 계층에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평등한 권리를 제공해야 하며, 모든 나라와의 평화, 교역, 우호 관계를 유지하고, 어떤 나라와도 전쟁을 위한 동맹을 맺지 않으며, 공화국의 최선의 수호자인 각 주 정부의 권리를 지원하는 일이라고 밝혔습니다.

제퍼슨 대통령은 인간의 권리를 무엇보다도 중요한 위치에 올려놓을 것이라며, 종교의 자유, 언론의 자유, 법의 보호를 받는 개인의 자유, 그리고 공정하게 선정된 배심에 의해 재판을 받을수 있는 권리 등을 지원할 것이라고 다짐했습니다.

제퍼슨은 임기 초반 정부의 고질적인 적자재정을 끝내고 국가채무를 탕감하는 데 온 힘을 쏟았습니다. 제퍼슨은 부채를 없애는 일을 행정부의 최우선 과제로 삼고, 이를 위해 연방정부의 공무원 수를 감축하고, 대통령 주변의 화려한 행사를 일절 금지 시켰습니다.

대통령 취임식 장소에도 혼자 걸어갔고, 취임식 기념 파티도 열지 않고 관사 식당에서 저녁을 먹는 것으로 대신했습니다.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의 1차 임기 중 가장 큰 업적으로 평가받는 것은 루이지애나 테리토리, 즉 프랑스가 차지하고 있던 영토의 매입이었습니다.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은 1762년 이래 전략적 요충지인 뉴올리언스항을 장악하고 있는 스페인이 이 땅을 프랑스에 넘길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제퍼슨은 뉴올리언스가 나폴레옹의 손에 들어가게 되면, 미시시피 계곡에 사는 미국인 정착민들이 이 항구를 자유로이 왕래할 수 없게 될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루이지애나 테리토리는 미시시피 강에서 훨씬 서쪽 로키산맥까지, 그리고 남쪽 멕시코만 해안에서부터 북쪽 캐나다 경계까지 있었습니다. 미국 본토의 중간, 한반도 넓이의 거의 10배에 가까운 영토입니다. 땅만 넓은 것이 아니라 여기에는 각종 지하자원, 삼림, 초원, 아름다운 경관의 산과 강 등이 있어 그야말로 측량할 수도 없는 가능성을 가진 곳이었습니다.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 재임기간 중 미국이 프랑스로부터 매입한 '루이지애나 테리토리'가 지도에 주황색으로 표시됐다.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 재임기간 중 미국이 프랑스로부터 매입한 '루이지애나 테리토리'가 지도에 주황색으로 표시됐다.

제퍼슨 대통령은 이 광대한 영토를 1ac당 불과 약 3센트, 총액 1,500만 달러에 사들인 것입니다. 사상 유례가 없는 대형 부동산 거래였습니다. 당시 프랑스 통치자 나폴레옹은 미 대륙에 강력한 프랑스를 재건할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통치령인 카리브해의 아이티에서 반란이 일어나 그것을 진압하는 데 골치를 앓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쓸데없는 땅을 팔아버리고 군비를 확보하자는 생각으로 미국에 이 땅을 넘긴 것입니다.

이 땅의 매입으로 개척민들의 서부 이주 열풍이 불었습니다. 백인 이주민들은 대형 농장들을 개발해 나갔습니다. 제퍼슨 대통령은 이어 새로운 영토에 대한 탐사를 단행했습니다. 당시 미국은 영토를 매입하기만 했지, 그 땅이 어떤 땅인지 잘 몰랐습니다.

제퍼슨 대통령은 군 장교 출신인 메리웨더 루이스(Meriwether Lewis)와 윌리암 클라크(William Clark)를 탐사대장으로 임명했습니다. 그리고 지리, 동식물 생태계, 천연자원 등을 알아보고, 대륙을 관통해 태평양으로 연결되는 강과 그 지류가 있는지를 확인해 보라는 임무를 부여했습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목적은 다른 나라들에 새로 얻은 영토가 미국의 영토임을 주장할 수 있는 근거를 확실히 해놓으려는 것이었습니다.

총 44명으로 이루어진 탐사대는 1804년 5월부터 2년 4개월 동안, 약 1만 2천Km에 달하는 여정을 거치면서 태평양 해안까지 도달했습니다. 이들은 지형과 동식물을 관찰하고, 처음 보는 원주민 인디언과도 접촉했습니다.

그같은 업적으로 많은 인기를 얻고 있던 토머스 제퍼슨은 1804년 압도적인 지지로 재선됐습니다. 그러나 재임 기간은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1800년대 초 영국과 프랑스는 전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미국이 전쟁에 개입되는 것을 원지 않았던 토머스 제퍼슨은 중립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중립을 지키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영국은 미국이 프랑스 및 그 식민지와의 교역을 중단하기를 원했습니다. 영국은 프랑스로 가는 미국 화물선이 발견되면 끌어가기도 했습니다.

1807년이 저물어가면서 토머스 제퍼슨은 유럽과의 무역을 금지하는 조치를 내렸습니다. 미국 북부의 공업주들은 무역 봉쇄로 심한 타격을 받았습니다. 많은 담배를 유럽에 수출해 부호가 된 남부의 농장주들도 갑자기 큰 손실을 보게 됐습니다. 경제가 악화하자 제퍼슨의 금수 조치는 극심한 정치적 논쟁을 야기했습니다.

혼란 속에 토머스 제퍼슨은 2차 임기를 마쳤습니다. 대통령의 3차 임기를 금지하는 법 규정은 없었지만, 제퍼슨은 조지 워싱턴의 선례에 따라 한 차례 연임 후 물러나기로 했습니다.

미국 버지니아주 샬러츠빌 버지니아대학교에 설립자 토머스 제퍼슨의 동상이 세워져있다.
미국 버지니아주 샬러츠빌 버지니아대학교에 설립자 토머스 제퍼슨의 동상이 세워져있다.

전 생애를 통해 교육에 관심이 깊었던 토머스 제퍼슨은 1818년 버지니아대학교를 설립했습니다. 그리고 집 가까이에 있는 샬러츠빌(Charlottesville)에 들어설 캠퍼스를 직접 구상하고 건물을 설계했습니다.

제퍼슨은 교수와 학생들이 매일 매일의 생활을 한데 어울려 지내도록 교정을 배치하고,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아름다운 건물에서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따 건물을 설계했습니다. 설계는 워낙 뛰어나서 100년이 지난 후에도 학교 건물을 늘릴 때 제퍼슨이 지은 시설을 변경하거나 건물을 철거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는 또 최고의 교수들을 확보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는 유럽에까지 사람을 보내 교수를 알아보도록 했습니다. 드디어 1825년 3월 버지니아대학교(University of Virginia)가 개교했습니다.

대학교 설립에 열정을 쏟는 동안 제퍼슨의 건강은 극도로 악화했습니다. 그는 이미 82세의 고령이었습니다. 그는 류마티스와 당뇨를 앓고 있었으며, 가까운 거리밖에 걸을 수가 없었습니다. 제퍼슨의 기억력도 쇠퇴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알았습니다.

제퍼슨은 자기 집 아래 산자락에 간단한 묘지를 만들라는 유서를 썼습니다. 묘지의 모양도 그림으로 남겼습니다. 그는 묘비에 미국 독립 선언서와 버지니아 종교자유법을 작성한 사람, 버지니아대학교의 아버지 토머스 제퍼슨이라는 문구만 새겨주기를 원했습니다.

버지니아주 지사, 미국 국무장관, 제 3대 대통령 등 자신의 지위에 관해서는 쓰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 테리토리를 매입해 미국에 엄청난 영토를 늘려준 공적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토머스 제퍼슨은 여성 노예 샐리 헤밍스와의 관계에 대한 끊임없는 논쟁거리도 남겼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역사가는 샐리 헤밍스가 낳은 6명의 자녀 중 일부는 제퍼슨의 혈통이라는 견해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제퍼슨은 또, 당시 대부분의 건국 선조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주창했으면서도 노예제도를 인정했다는 비판도 받고 있습니다. 제퍼슨은 한때 200명의 노예를 소유하기도 했습니다. 그가 일생 소유했던 노예는 모두 약 600명에 달했습니다.

황혼기 제퍼슨의 몬티첼로 생활은 재정적으로도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제퍼슨은 부인이 가져온 재산과 함께 장인의 빚도 떠맡아 불어나는 이자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자신이 갖고 있던 넓은 땅도 값이 내려가 빚을 갚기엔 부족했습니다. 제퍼슨 자신이 미국 영토를 넓혀 놓은 후 사람들이 서부로 몰려가는 바람에 동부의 땅값은 형편 없이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1826년 7월 4일, 토머스 제퍼슨은 숨을 거두었습니다.

위대한 인물이 사망했다는 소식은 전국으로 퍼져나갔고 독립 기념일은 애도의 날로 변했습니다.

제퍼슨은 몬티첼로의 묘지에 묻혔습니다. 제퍼슨의 정신은 오늘날에도 독립 선언서와 종교적 자유의 전통 속에, 그리고 그가 사랑했던 버지니아대학교에 살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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