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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아메리카] 장애를 극복한 작가·교육자·사회운동가 헬렌 켈러


[인물 아메리카] 장애를 극복한 작가·교육자·사회운동가 헬렌 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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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간에는 듣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는 3중의 장애를 갖고 있으면서도 이를 극복하고 20세기 미국의 저명한 작가, 교육자, 사회운동가로 활약한 헬렌 켈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헬렌 켈러(왼쪽)가 개인교사 앤 설리번의 입술 움직임을 손으로 느끼며 청각을 대신하고 있다.
헬렌 켈러(왼쪽)가 개인교사 앤 설리번의 입술 움직임을 손으로 느끼며 청각을 대신하고 있다.

‘장애는 불편하다, 그러나 불행하지는 않다’고 외친 기적의 여성헬렌 켈러는 장애를 갖고 좌절하고 있는 세상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준 횃불이었습니다.

헬런 켈러는 1880년 6월 27일 앨라배마 주 터스컴비아에서 농장주인 아버지 아서 H. 켈러(Arthur H. Keller)와 어머니 케이트 애덤스 켈러(Kate Adams Keller)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헬렌은 두 딸 중 첫째였습니다. 헬렌에게는 두 이복 오빠도 있었습니다.

헬런 켈러는 태어날 때부터 장애를 가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켈러는 태어날 때 시각과 청각에 이상이 없었고 6개월이 되면서부터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한살때는 걷기 시작했습니다.

헬렌 켈러가 시각과 청각을 잃은 것은 생후 19개월째부터였습니다. 가정의 주치의는 헬렌에게 고도의 열이 나는 증상이 나타나자 이를 뇌막염이라고 진단했습니다. 전문가들은 아직도 정확한 병명을 밝혀내지 못하고 있지만 성홍열이나 수막염이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열이 난지 며칠 안돼 어머니는 저녁 식사 종이 울려도 헬렌이 방향을 잡지 못하고 얼굴 앞에서 손을 흔들어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당시 헬렌은 성격도 거칠고 예의도 없었습니다. 화가나면 발로 차고 소리를 지르는가 하면 우스운 일이 있으면 주체할수 없이 웃어댔습니다. 주변에서는 헬렌을 특수 시설에 보내야 한다고들 말했습니다.

아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갈망하던 헬렌의 부모는 메릴랜드 주 발티모어의 특수교육 전문가인 줄리안 치섬 박사를 찾아갔습니다. 헬렌을 검사한 치섬 박사는 전화 발명가로 유명한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을 만나보라고 권했습니다. 벨은 청각 장애자 교육 전문가이기도 했습니다. 헬렌을 만난 벨은 매사츄세츠 주 보스톤에 있는 퍼킨스 맹아 학교에 가보도록 추천했습니다.

퍼킨스 학교의마이클 아나가노스(Michael Anaganos) 교장은 켈러 가족과 상담을 한 후 최근 그 학교를 졸업한 앤 설리번을 개인교사로 추천했습니다.

설리번은 다섯 살 때 트라코마에 감염돼 시각에 장애가 왔고, 수술후 어느 정도 시력을 회복해 퍼킨스 시각장애인 학교에서 공부를 한 여성이었습니다.

교장의 권고를 받은 설리번은 1887년 3월 앨라바마에 있는 헬렌 켈러의 집으로 갔습니다. 20대 초반이었던 설리번은 이후 약 50년을 헬렌 켈러의 개인교사이자 삶의 동반자로 살았습니다.

설리번은 6살짜리 헬렌에게 자신이 가지고 간 인형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그리고 손바닥에 인형, 즉 d.o.l.l.을 손가락으로 쓰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그 다음부터 차차 다른 단어들도 그렇게 쓸수 있도록 가르쳤습니다.

처음 헬렌은 호기심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차츰 저항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배우는 것도 싫어하고 협조도 거부했습니다. 그런 상황은 갈수록 악화됐습니다. 설리번은 부모들과 논의 끝에 농장의 외딴 오두막으로 옮겨 헬렌이 자신에게 의지하지 않을 수 없게 했습니다.

그런 적극적인 노력으로 설리번은 헬렌에게 단어를 가르치고 그 단어가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를 가르쳤습니다. 즉 물이란 단어를 손바닥에 써서 가르치고 나면 헬렌을 수도로 데리고 가 물을 만져보게 하는 식이었습니다.

머리가 명석한 헬렌 켈러는 차츰 설리번의 지도를 따르면서 입술에 손을 대고 상대방의 말을 알아듣는 방법, 말하기, 전자 책 읽기, 타이핑, 손가락으로 글자 쓰기 등을 익혔습니다. 1890년 헬렌 켈러는 보스톤에 있는 호레이스 만 농아학교에 입학했습니다.

1894년부터 1896년 까지는 뉴욕 시에 있는 라이트 허마슨 농아학교에 들어가 의사 소통 기능을 향상시키는 동시에 정규 학과 공부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896년 케임브리지 여학교에 들어가 대학 예비과정을 이수했습니다.

이 무렵 헬렌 켈러의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됐고, 유명 인사들을 만날 기회가 생겼습니다. 그 중에는 유명 작가인 마크 트웨인도 있었습니다. 트웨인은 헬렌 켈러의 성장과정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친구가 됐습니다. 트웨인은 켈러를 자신의 친구이자 대기업 스탠다드 오일 사 간부인 헨리 로저스에게 소개했습니다.

켈러의 재능과 끈기, 결의에 감탄한 로저스는 명문 래드클리프 대학에 입학한 그녀의 학비를 대주기로 했습니다. 래드클리프 대학은 하바드 대학교 여자대학입니다. 설리번도 함께 래드클리프 대학에 진학해 켈러의 옆에 앉아, 강의와 교과서를 해석해 주었습니다. 켈러는 24살때인 1904년 쿰 라우데, 즉 우등으로 래드클리프를 졸업했습니다.

켈러는 1905년 첫 저서 ‘내 삶의 이야기, The Story of My Life’를 내놓았습니다. 이 책은 어린 아이 시절부터 21살 대학생이 될 때까지,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말도 못하게 된 심각한 장애를 극복하고 자신을 변화시킨 과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세상과의 소통이 막힌 채 살다 암흑의 세계를 뚫고 세상 밖으로 나오기까지 이를 극복하는 과정을 이야기 한 그의 자서전은 그후 텔레비젼 드라마, 브로드웨이 작품 등으로도 만들어졌습니다.

켈러는 대학 졸업 후 세계 문제에 대해 그리고 다른 사람의 삶을 개선하는데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진지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런 헬렌 켈러는 20세기 전반 모든 시간을 사회, 정치적 문제, 여성 참정권, 파시즘, 산아제한, 사회주의 등에 집중하며 보냈습니다.

헬렌 켈러는 유명인사가 됐고, 여러 곳에서의 강의를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알려주었습니다. 그것은 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들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헬렌 켈러는 의회에 나가 시각 장애인들의 복지 개선을 강력히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1915년 헬렌 켈러는 'Helen Keller International'이라는 기구를 설립했습니다. 시각 장애와 영양결핍의 원인을 제거하고 장애를 가진 자들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는 기구였습니다.

1921년에는 미국 시각장애 연맹을 결성하고, 시각 장에에 대한 인식을 바로잡고 그들을 돕는 자금 마련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켈러는 또 영구실명 전쟁기금과 같은 조직 등 불우한 처지에 빠진 사람들을 돕는 기구에도 들어가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켈러는 대학을 졸업했했을 때 부터 사회당 멤버가 됐습니다. 1909년부터 1921년까지 헬렌 켈러는 사회주의와 사회당 대통령 후보 유진 뎁스를 지지하는 여러 편의 글을 썼습니다. 어둠으로부터의 탈피라는 제목의 사회주의 엣세이 시리즈는사회주의와 세계 문제에 대한 그녀의 견해를 담은 것이었습니다.

그때까지 미국 언론은 그녀의 재능과 용기에 전폭적인 찬사를 보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사회주의적 견해를 내놓기 시작하자 일부에서는 장애를 이용해 관심을 끌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1946년부터 1957년 사이 헬렌 켈러는 5개 대륙 35개국을 여행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장애 극복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1955년 헬렌 켈러는 생애에서 가장 길고 가장 힘든 아시아 여행을 감행했습니다. 75세라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켈러는 5개월 동안 6만 4천여 Km에 달하는 거리를 여행했습니다. 여러 차례의 강연과 집회 참석을 통해 헬렌 켈러는 수 백만 아시아인들에게 감동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헬렌 켈러는 자신이 이룩한 놀라운 성취로 많은 명예 학위와 훈장을 받았습니다. 하버드 대학, 템플 대학 등 미국 대학은 물론 스코틀랜드, 독일, 인도, 남아프리카 등 여러 나라 대학에서도 그녀에게 명예 박사학위를 수여했습니다.

헬렌 켈러는 시어도어 루즈벨트 명예 서비스 메달, 대통령 자유 메달을 받았으며, 여성 명예의 전당에도 헌정됐습니다.

‘세상을 볼 수 있다면 첫째날은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보겠다’는 간절한 소망을 간직했던 헬렌 켈러는 88세 생일을 며칠 앞둔 1968년 6월 1일, 미국 동북부 코네티컷 자택에서 타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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