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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아메리카] '가장 고독했던 우주인' 마이클 콜린스


[인물 아메리카] '가장 고독했던 우주인' 마이클 콜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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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문화, 다양한 인종이 함께 모여사는 미국, 오늘의 미국이 있기까지 중요한 발자취를 남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인물 아메리카입니다. 이 시간에는 미국의 역사적인 첫 달 착륙 계획에서 사령선 콜럼비아 호의 조종사로 활약했던 마이클 콜린스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지난 1969년 7월 미국의 첫 달 착륙 임무를 성공시킨 우주비행사 중 한 명인 마이클 콜린스.
지난 1969년 7월 미국의 첫 달 착륙 임무를 성공시킨 우주비행사 중 한 명인 마이클 콜린스.

1969 년 7월 20일, 미국 우주인 닐 암스트롱이 인류 최초로 달에 착륙했습니다. 착륙선 ‘이글’을 타고 달에 내린 암스트롱은 한 사람의 작은 발걸음이 인류의 거대한 도약이라고 첫 메시지를 보내왔습니다.

그 뒤를 이어 버즈 올드린도 내렸습니다. 이들은 달에 내리자마자 성조기를 꽃고, 과학 기기를 설치하며, 사진도 찍고, 돌을 수집하는 등 바쁘게 움직였습니다. 전 세계 약 6억 5천만명이 역사적인 이 순간을 숨죽이며 지켜보는 동안 또 한사람의 우주인은 달 주위를 비행하고 있었습니다. 달 궤도를 도는 사령선 콜럼비아 호의 조종사 마이크 콜린스입니다.

그는 초조한 마음으로 다른 두 사람이 달에서 임무를 마치고 다시 하늘로 치솟을 때를 기다리며 달 상공을 돌고 있었습니다. 역사적인 최초의 달 여행을 간 우주인 3명중 그는 유일하게 달에 발을 딛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두명의 우주인이 워낙 세상에 널리 알려지다보니 그는 흔히 ‘잊혀진 우주인’ ‘역사상 가장 외로운 우주인’으로 불리우기도 합니다.

달에서 21시간 36분이 지난 다음 달 착륙선 이글은 암스트롱과 올드린을 태우고 다시 이륙했습니다. 기다리던 콜린스는 사령선과 착륙선을 연결해 두사람을 옮겨 싣고 지구로 향했습니다. 그는 달에 내리지는 않았지만 이 계획에서 누구 못지 않은 공헌을 한 역사적 인물이었습니다. 만약 그가 털끝만한 오차의 실수라도 범했다면 세사람은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었습니다.

마이클 콜린스는 1930년 로마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제임스 로튼 콜린스 미 육군 소장으로 당시 존 퍼싱 장군의 부관이었습니다. 마이클은 아버지가 이탈리아에 주둔하고 있을 때 태어난 것입니다. 삼촌, 동생, 사촌도 군인이었습니다. 삼촌은 6·25전쟁 당시 미국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조지프 로턴 콜린스 장군입니다.

군인 집안에서 태어난 그의 일생에서 봉사와 임무는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벌어진 다음 콜린스 가족은 워싱턴 디시로 옮겼습니다. 마이클 콜린스는 이곳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다음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졸업 후에는 미시시피 주 콜럼버스에서 비행훈련을 받았습니다.

뛰어난 실력을 인정받은 그는 F-86 세이버 전투기에 이어 전투폭격기 조종 팀에 합류했습니다. 이때 콜린스는 핵무기 투하 훈련도 받았습니다. 그는 이어 캘리포니아에 있는 에드워드 공군기에서 제트 전투기 테스트 파일러트가 됐습니다.

마이클 콜린스는 어려서부터 우주 여행을 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콜린스는 존 글렌의 머큐리 애틀러스 6 우주 비행을 보고 난 후, 우주인이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항공우주국 NASA에 우주비행사로 지원했으나 선발되지 못했습니다. 실망했으나 포기하지 않은 콜린스는 우주를 좀더 공부하기 위해 미국 공군의 항공우주 연구 조종사 학교에 들어갔습니다.

드디어 1963년 항공주주국은 콜린스를 제 3 우주인 그룹으로 선발했습니다. 그는 우주국에 들어가 두 차례 우주 여행을 했습니다. 첫번째는 제미니 10호 비행이었습니다. 제미니 계획은 우주를 비행할 수 있는 비행사의 양성과 달착륙을 위한 기술을 개발하고 훈련하는 계획이었습니다. 여기에는 랑데부 ·도킹, 우주공간에서의 작업 등이 포함됐습니다.

1호부터 12호까지 계속된 이 계획에서 콜린스는 10호 비행에 선발됐습니다. 선장 존영과 함께 파일럿으로 참여한 콜린스는 이미 우주에 있던 무인 위성 아제나 10호와의 도킹, 궤도 상승, 아제나 8호와의 랑데부 등을 진행했습니다.

그는 우주유영으로 아제나 8호로부터 우주 실험장치를 회수했습니다. 콜린스는 이로써 우주유영을 한 네번째 미국 우주인이 됐습니다. 콜린스는 우주유영이 달 여행을 위한 모든 것을 실험하고 확인하기 위한 중요한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이어서 그는 달 탐사계획인 아폴로 계획에 합류했습니다. 그리고 인류 최초로 달에 사람을 보내는 아폴로 11호의 조종사로 선발됐습니다. 아폴로 11은 콜린스의 마지막 우주여행이었습니다.

1969년 7월 16일, 사령관 닐 암스트롱, 달 착륙선 이글 선장 버즈 올드린, 사령선 콜럼비아의 조종사 콜린스를 태운 아폴로 11호가 플로리다에 있는 케네디 우주센터에서 발사됐습니다.

거의 나흘간의 비행끝에 이들은 달 궤도에 도달했습니다. 암스트롱과 올드린이 달 착륙선을 타고 내려간 다음부터 콜린스는 9만 6천여 Km 상공의 달 궤도를 돌고 있었습니다.

휴스톤 지휘본부에서 텔레비젼에 비치지 않는 사람은 당신밖에 없다며 미안한듯 말하자 그는 그런건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달에 내릴 기회가 없었다는 점에 대해 전혀 불만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늘 자신의 역할에 대해 ‘우주인으로써 세상에서 가장 우수한 임무를 수행했다고 믿는다’고 강조했습니다.

두 우주인은 달에서 약 22시간 동안 머물렀습니다. 세계는 이들이 달에서 움직이는 장면에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콜린스는 공중에서 황량한 달 표면을 내려다 보고 또한 멀리 떨어진 지구도

돌아봤습니다. 콜린스는 작고 푸른 색과 흰색으로 빛나는 지구는 너무나 아름답고 고요하며 손상되기 쉬운 존재로 보인다고 지구에 소감을 보내왔습니다.

그는 ‘세계의 지도자들이 10만 마일 거리에서 자신의 행성을 바라볼 수 있었다면 그들의 관점은 근본적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모든 중요한 국경은 보이지 않게 되고 시끄러운 논쟁도 조용해질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전 세계가 암스트롱과 올드린의 모습에 흥분해 있는 동안 궤도 비행을 하던 사령선은 달의 뒷면을 돌았습니다. 그곳은 춥고 어두운 곳이었습니다. 지구와의 교신은 끊겼고, 콜린스는 48분간 절대 고독의 상태를 경험했습니다. 그것은 실수가 아니라 본래 계획된 비행이었습니다. 그는 처음으로 달의 뒷면을 관측한 사람이었습니다.

달 여행 후 3인은 닉슨 대통령은 물론 전 국민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이들은 세계를 여행하며 각종 환영행사에 참석했습니다. 1969년 11월에는 한국도 방문해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훈장도 받았습니다.

항공우주국에 있는 동안 콜린스는 준장으로 진급했고 그후에는 예비역 소장이 됐습니다. 1970년 항공우주국을 떠난 콜린스는 미 국무부에 들어가 공보담당 차관보로 일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워싱턴 디시에 있는 스미소니언 연구소 산하 항공우주 박물관 관장으로 임명됐습니다. 그는 새로운 시설의 건설을 주도했고 1976년 있기 있는 우주 박물관을 개관했습니다.

콜린스는 달 여행을 다녀온지 오랜 세월이 흘러도 그는 달을 쳐다 볼때면, ‘오 마이 갓, 내가 저길 갔다니’ 라며 놀란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항공우주국에 있을 때가 생애 가장 빛나는 시기 중 하나였다고 회상했습니다.

그는 늘 인류의 우주 연구에 대한 밝은 희망을 갖고 살았습니다. 앞으로 50년 60년 후에는 오늘날 누구도 정확이 예측하지 못했던 엄청난 일들을 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연로해서도 쉴줄을 몰랐습니다. 평소 낚시를 즐겼고, 인간체력의 한계에 도전하는 트라이애슬런에다, 그림 까지 그리며 바쁘게 살았습니다.

그는 2019년 달 착륙 50주년을 맞아 국가적 영웅으로 다시 태어났고, 그의 업적은 화려한 재조명을 받았습니다. 그는 대통령 자유훈장, 콜리어 트로피를 포함한 수많은 훈장과 상을 받았고, 6개 대학에서 명예학위를 받았습니다. 인류의 우주과학 기술사에 큰 업적을 남긴 마이클 콜린스는 2021년 4월 28일, 플로리다주 자택에서 90세를 일기로 타계했습니다. 유족들은 그가 암투병중이었다고 밝혔습니다.

그가 몸 담았던 항공우주국은 콜린스의 일이 무대 뒤에서 있었든 전면에서 있었든 그는 우주를 향한 첫걸음을 뗀 지도자의 한 사람이었으며, 인간 잠재성의 봉합을 열기 바라는 모든 사람의 친구라고 불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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