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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인터뷰] 동구권의 강성대국 경험 - 3. 동독 프랑크 교수


저희 `미국의 소리’방송은 북한이 주장하는 2012년 강성대국의 해를 맞아 과거 동구권의 강성대국 운동 경험을 동구권 출신의 전문가들로부터 직접 들어보는 기획 인터뷰를 마련했습니다. 오늘은 세 번째 순서로 동독 편인데요, 라이프찌히 출신의 루디거 프랑크 오스트리아 비엔나대학 교수입니다. 김연호 기자가 프랑크 교수를 인터뷰했습니다.

문) 동독 역사에서 북한의 강성대국 운동과 비슷한 사례가 있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답) 동독에서는 공산주의 사회라는 신비로운 목표가 제시됐었습니다. 사회주의라는 중간 단계를 거쳐서 최종 목표인 공산주의에 도달한다는 거였죠. 하지만 북한처럼 목표 연도를 잡지는 않았습니다. ‘선진 사회주의 사회’라는 이름으로 사회주의의 단계적 발전을 표현했고, 특정 당 대회 때까지 이뤄야 할 목표가 제시됐습니다. 당 대회는 5년마다 열렸지만, ‘선진 사회주의 사회’의 구체적인 내용은 10년에서 15년 정도의 간격을 두고 정해졌습니다.

문) ‘선진 사회주의 사회’건설을 위해서 동독 공산정권이 내놓은 공약에는 어떤 것들이 있었습니까?

답) 당시 상황에 따라 목표에 맞는 구호를 정했습니다. 주택난을 해결하겠다는 구호도 있었고, 경제정책과 사회정책을 통합하겠다는 구호도 있었는데, 국민 생활수준을 높이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이런 중기 목표를 정해 놓고 선전활동을 벌였습니다.

문) 지도자의 통치 방식이나 야심도 ‘선진 사회주의 사회’건설이란 목표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습니까?

답) 물론 영향을 미쳤죠. 80년대 호네커 공산당 서기장이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면서 자신의 구상을 펼쳐 나갔는데, 특히 물가 문제에 신경을 썼습니다. 국가 보조를 통해 생필품 가격을 낮은 수준에 묶어두자는 거였습니다. 당 중앙위원회와 정치국의 경제 전문가들은 동독 국민들의 구매력이 이미 상당히 높아진 만큼 가격 보조는 국가재정에 큰 부담만 될 뿐이라고 주장했지만, 호네커는 듣지 않았습니다. 당 지도부 안에서 이 문제가 계속 제기됐지만 호네커는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문) 당시 동구권 국가들 중에서 동독은 생활수준이 상당히 높지 않았습니까? 그런 만큼 공산당 정권이 국민에게 약속한 내용도 다른 동구권 국가들과는 차이가 있었을 거 같은데, 어떻습니까?

답) 정부가 자동차를 더 많이 생산하겠다는 약속을 했죠. 국내에서 생산되는 자동차 수가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동차를 가지려면 오래 기다려야 했기 때문입니다. 수입품도 인기가 좋았습니다. 바나나, 오렌지 같은 열대 과일이나 커피가 대표적인 인기 품목이었습니다. 하지만 외화가 부족해서 수입이 많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독일 국민들은 해외여행을 자유화하고 주택난도 해결해달라고 정부에 요구했습니다. 정부는 다음 당 대회 때까지 아파트를 1천 채 더 짓겠다, 사회주의 우방국들과 교역을 늘려서 열대과일을 안정적으로 공급하겠다, 이런 약속을 했습니다.

문) 동독 공산정권이 그런 약속까지 한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텐데, 서독과의 체제경쟁도 한 몫 했습니까?

답) 물론 아주 중요한 요인이었죠. 동독에서는 서방세계의 텔레비전 방송을 쉽게 접할 수 있었기 때문에 국민들이 서방과 동독의 생활수준을 비교하기가 쉬웠습니다. 특히 분단국가였던 동서독은 상대방과 늘 체제경쟁을 했었죠. 따라서 동독 정부는 서방세계의 생활수준이 향상되는 만큼 거기에 대응하라는 압력을 아주 강하게 받았습니다. 당시 동서독의 생활수준은 양보다는 질적인 면에서 차이가 컸습니다. 동독에도 여러 종류의 포도주와 커피가 있었고 청바지도 들어왔지만 서독에 비해 질이 훨씬 떨어졌습니다. 대중음악 음반이 팔리고 록 가수들의 연주회도 열렸지만 서방의 수준에는 못 미쳤습니다.

문) 그런 상황에서 정부가 생활수준을 더 높여주겠다고 공약했다면 동독 국민들의 반응도 좋았겠군요.

답) 약속을 해 놓고 지키지 못하면 다음에 다른 약속을 해도 국민들이 믿지 않죠. 동독 정부가 안고 있었던 문제가 바로 이거였습니다. 처음에는 국민들 사이에서 기대가 컸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동독이 서방의 생활수준을 따라잡을 가능성이 없다는 게 분명해졌습니다. 서방과의 생활수준 격차는 오히려 더 커졌습니다. 동독 정부가 일정한 성과를 거둬도 국민들의 기대수준과 요구를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동독이 전보다 더 잘 살게 될수록 불만은 더 커졌습니다. 서독과의 생활수준 격차를 더 민감하게 느끼게 됐기 때문입니다.

문) 동독 정부가 국민의 기대에 못 미치는 성과를 거둘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뭡니까?

답) 순전히 체제의 문제였죠. 사회주의 경제는 동기 부여가 잘못됐기 때문에 저마다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는 시장경제를 따라갈 수가 없었습니다. 외국에서 통용되는 자국화폐를 갖지 못한 것도 동구권 사회주의 경제의 큰 약점이었습니다. 국제시장에서 물자를 수입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생산물을 수출해야 했습니다. 자국화폐로 결제할 수가 없었던 겁니다. 상황이 그랬기 때문에 미국 달러화나 서독 마르크화로 수출대금을 받을 수 있다면 낮은 가격으로도 수출을 해야 했습니다. 게다가 동구권의 분업체계도 어리석기 짝이 없었습니다.

문) 예를 들어 어떤 문제가 있었습니까?

답) 2차대전을 겪으면서 독일은 항공산업이 크게 발달했습니다. 군용기 뿐만 아니라 첨단 민간 항공기도 개발했죠. 독일이 동서독으로 갈라진 뒤에도 동독에 항공산업이 남아 있었지만 소련은 동독에서 더 이상 항공기가 생산돼서는 안된다고 결정했습니다. 결국 동독에 남아있던 항공기 생산공장이 모두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자동차산업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독일이 분단되기 전에 이미 아우디와 메르세데스 같은 유명한 자동차 회사들이 있었기 때문에 축적된 기술과 숙련 노동자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소련은 첨단 자동차 엔진 생산을 동독에서 하지 못하게 하고 대신 소련과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로 생산지를 옮기게 했습니다. 동구 사회주의권의 분업체계가 생성되면서 경쟁력있는 산업이 동독에서 사라져버린 겁니다.

문) 동독 공산정권이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건데, 이런 결과에 대해서 책임지려는 태도를 보였습니까?

답) 공식적으로는 모든 게 완벽했기 때문에 책임질 사람이 없었죠. 항상 계획을 초과달성했다고 정부가 선전했습니다.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비효율을 비판할 방법도 없었습니다. 비판할 경우 사회주의 국가의 존재 자체를 위협하는 게 되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불가능했습니다. 소련의 압력도 이런 분위기에 한 몫 했습니다. 소련식의 교조적인 경제정책을 동독에 강요했기 때문에 동독 정부가 새로운 경제실험을 할 수 없었습니다.

문) 호네커 서기장은 동독이 무너지기 직전인 지난 1989년에 건국 40주년 기념행사를 강행했습니다. 폭발적인 민주화 요구로 정권이 흔들리는 상황에서 이런 성대한 행사를 치른 이유가 뭘까요?

답) 당시 호네커 서기장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건국 기념행사를 하지 않았다면 정권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걸 인정하는 게 될테니까요. 게다가 호네커 서기장은 늙고 고집이 셌습니다.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개혁개방으로 나아가자고 설득했지만, 옆집이 색칠을 좀 다시 한다고 내집을 뜯어 고칠 이유가 있느냐, 이런 식으로 대꾸했습니다. 과거의 방식만 고집하고 새로운 상황을 받아들이지 않은 겁니다.

진행자: 과거 동구권의 강성대국 운동 경험을 동구권 출신의 전문가들로부터 직접 들어보는 기획 인터뷰, 동독편을 끝으로 모두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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