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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년 철권통치, 가다피는 누구?


9월 혁명 8주년 기념연설을 하는 무아마르 가다피
9월 혁명 8주년 기념연설을 하는 무아마르 가다피

리비아의 전 국가지도자 무아마르 가다피가 시민군과 한달 간 대치한 끝에 결국 사망했습니다. 가다피는 끝까지 물러나길 거부했으며, 42년간의 독재 정치도 이 같은 고집스런 저항감으로 점철됐습니다. 중동의 최장기 집권자인 69세의 가다피가 후세에 어떻게 기억될 지 살펴보겠습니다.

1969년 27세의 젊은 나이의 육군 대위, 가다피는 당시 국왕에 맞서 군사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잡았습니다.

가다피는 즉시 서방 세계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군복을 벗은 가다피는 아랍인의 자존심을 강조하며 아랍 세계를 통합하려 했습니다. 이후 가다피는 화려한 장신구를 걸치고 장황한 연설을 되풀이하고 여성 경호원들을 대동하고 다니며 국제사회에서 괴짜 인물로 알려졌습니다.

미국 조지워싱턴 대학교의 제럴드 포스트 정치심리학 교수는 “우리는 가다피의 기행에 주목하지만, 대체로 그는 국제무대에서 꽤 유능했으며, 어느 정도 매력적으로 볼 수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포스트 교수는 그러나 가다피가 다소 별난 것은 확실하다고 말했습니다.

가다피는 아랍어로 민중에 의한 정부를 뜻하는 ‘자마히리야’ 체제를 선포하고 사회, 정치, 경제 정책에 적용했습니다. 가다피는 유명한 저서인 녹색 책에서 자신의 철학을 간략히 설명했습니다. 가다피는 사회 제도들을 철폐하고 자신이 이끌고 민중이 운영하는 국가를 천명했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이와 동 떨어졌다고 워싱턴의 민간 ‘중동연구소’의 대니엘 서워 연구원은 말합니다.

서워 연구원은 가다피가 1인 독재를 펼쳤다며, 리비아의 풍부한 석유와 천연가스 자산을 바탕으로 국내외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가다피가 자신과 심복들을 위해 자산을 빼돌렸다고 지적합니다.

가다피는 아울러 테러와 연루됐다는 의혹을 받기도 했습니다. 미국은 1986년 독일의 나이트클럽에서 폭탄 공격으로 미군 병사 두 명이 사망한 사건은 가다피가 명령한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가다피는 2003년 서방 세계와 화해 노력을 시작했습니다. 가다피는 1998년 270명이 사망한 미국 팬암기 폭파 테러에 대한 책임을 인정했습니다. 가다피는 아울러 대량살상무기와 테러 활동을 포기하기로 했습니다. 이에 따라 미국은 리비아에서 핵 개발 계획의 부품들을 제거하고, 제재를 해제하는 한편 외교 관계를 복원했습니다.

하지만 올해 초부터 리비아에서 수 천 명의 시민들이 가다피의 독재정치에 반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아랍세계를 휩쓴 민주화 운동 ‘아랍의 봄’에 동참하면서 가다피의 사퇴를 촉구했습니다. 가다피는 시민들의 시위를 폭력 진압했습니다.

곧 대부분의 국가들이 가다피에게 등을 돌리고, 유엔은 리비아에 제재를 가했습니다. 북대서양조약기구는 공습을 단행했습니다. 그러나 가다피는 물러나려 하지 않았습니다.

가다피는 리비아의 석유와 영토를 장악해 리비아를 다시 식민지로 만들려는 음모가 있다며, 리비아를 사수하기 위해 마지막 1명이 남을 때까지 끝까지 싸울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조지워싱턴 대학교의 제럴드 포스트 교수는 가다피가 언제나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했다고 지적했습니다.

포스트 교수는 가다피가 마치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이슬람계 아프리카 지도자가 누구냐?”라고 주문을 외운 뒤 “바로 무아마르 가다피 당신입니다”라는 답을 듣는 것처럼 자신을 합리화했다고 지적했습니다.

다른 전문가들도 가디피는 끝까지 민주주의에 저항하며 독재자의 길을 걸었고 실로 어리석고 망상에 사로잡힌 인물의 말로가 어떠한지를 입증했다고 평가합니다.

젊은 육군 대위로 권좌에 올라 리비아를 통합하고자 했던 가다피는 결국 많은 리비아인들의 반발을 자초했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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