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행자: 미국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건국 250주년 소식을 전해 드리는 '역사 속 아메리카 250', 오늘은 이조은 기자와 함께합니다.
기자: 네, 미국 역대 대통령을 만나보는 시간입니다. 오늘은 15대 제임스 뷰캐넌 대통령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뷰캐넌 대통령에게는 기록이 두 개 붙어 있는데요. 하나는 백악관에 들어간 사람 가운데 정치 경력이 가장 화려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역대 대통령 순위에서 거의 언제나 최하위에 놓인다는 것입니다.
진행자: 정치 경력이 어느 정도였습니까?
기자: 펜실베이니아 주의회 의원으로 시작해 연방 하원의원과 상원의원을 지냈고, 러시아 공사와 영국 공사를 거쳐 11대 제임스 포크 대통령 밑에서 국무장관을 지냈습니다. 참고로 당시 공사는 현재의 대사 격입니다. 뷰캐넌은 연방대법관에 지명됐다가 스스로 사양한 적도 있습니다. 40년 가까이 워싱턴에서 일한 사람이었습니다. 대통령 후보가 된 경위도 공교로운데요. 캔자스-네브래스카 법을 둘러싸고 나라가 들끓던 시기에 영국 공사로 나가 있었습니다. 그 논쟁에 휘말리지 않은 덕에 1856년 민주당 후보가 됐고, 예순다섯에 마침내 백악관에 들어갔습니다.
진행자: 개인사에도 특별한 점이 있죠.
기자: 미국 역사에서 결혼하지 않은 유일한 대통령입니다. 젊은 시절 약혼한 적이 있었는데 파혼했고, 그 직후 상대 여성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후 평생 독신으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백악관 안주인 역할은 조카딸 해리엇 레인이 맡았습니다.
진행자: 조카딸이 영부인 역할을 한 거군요.
기자: 그렇습니다. 해리엇 레인은 열한 살에 부모를 모두 잃었고, 외삼촌인 뷰캐넌이 후견인이 됐습니다. 뷰캐넌이 영국 공사로 나가 있을 때 함께 런던에 머물렀는데요. 빅토리아 여왕이 그를 '친애하는 레인 양'이라고 부르며 미혼인데도 대사 부인에 해당하는 예우를 해줬습니다. 스물여섯에 백악관에 들어가 4년간 안주인 노릇을 했고, 미국 여성들이 그의 옷차림과 머리 모양을 따라 했습니다. 오늘날 해리엇 레인을 '현대적 의미의 첫 영부인'으로 부르는 연구자들이 많습니다.
진행자: 그런데 뷰캐넌 대통령 취임 직후부터 큰 사건이 있었다고요.
기자: 네, 취임 이틀 만이었습니다. 1857년 3월 6일 연방대법원이 드레드 스콧 판결을 내놓았습니다. 자유주에 살았으니, 자유인이라고 주장한 노예 드레드 스콧의 소송이었는데요. 대법원은 흑인은 미국 시민이 아니므로 소송을 제기할 자격조차 없다고 판단했고, 나아가 의회에는 준주에서 노예제를 금지할 권한이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남부는 환호했고, 북부는 들끓었습니다.
진행자: 뷰캐넌 대통령이 이 판결에 관여했다는 이야기가 있죠.
기자: 네, 취임 전에 이미 친분이 있던 대법관에게 편지를 보내 판결이 취임 전에 나올 것인지 물었고요. 북부 출신 대법관에게 남부 쪽 다수 의견에 합류해 달라고 설득했습니다. 공교롭게도 이 대법관은 앞서 뷰캐넌이 사양한 그 자리를 대신 채운 사람이었습니다. 판결이 지역 대결처럼 보이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고는 취임 연설에서 준주의 노예제 문제는 "실질적으로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문제"이며 대법원이 "신속하고 최종적으로" 정리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틀 뒤 판결이 나오자, 사람들은 대통령이 미리 알고 있었다고 의심했습니다.
진행자: 노예제 문제를 잠재우려던 것이었군요.
기자: 그게 뷰캐넌 대통령의 판단이었습니다. 법원이 못을 박으면 정치적 논쟁이 끝날 것이라고 봤습니다.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판결은 갈등을 가라앉히기는커녕 북부를 격분시켰고, 노예제 반대 여론이 오히려 결집했습니다.
진행자: 캔자스 문제도 있었죠.
기자: 네, 캔자스에서는 노예제 찬성파와 반대파가 각각 헌법 초안을 만들며 충돌하고 있었는데요. 뷰캐넌 대통령은 노예제를 허용하는, 이른바 렉컴턴 헌법을 밀어 캔자스를 노예주로 편입시키려 했습니다. 대통령 권한을 총동원했지만 주민 투표에서 큰 표 차로 부결됐습니다. 1만1천300표 대 1천788표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소속 당인 민주당이 남북으로 갈라졌고, 그 분열이 1860년 대선에서 링컨의 당선으로 이어집니다.
진행자: 외교 쪽에서는 동아시아와 접점이 있었다고요.
기자: 네, 1860년 봄입니다. 일본 최초의 미국 사절단이 워싱턴에 왔습니다. 앞서 전해드렸듯 13대 밀러드 필모어 대통령이 매슈 페리 제독을 보냈고 14대 프랭클린 피어스 대통령 때 가나가와 조약이 맺어졌는데, 그 후속으로 일본 사절단이 미국 땅을 밟은 겁니다. 이들은 워싱턴에 열흘간 머물렀고, 백악관에서 뷰캐넌 대통령을 만났습니다. 뉴욕타임스는 1860년 5월 18일 자에 이 장면을 크게 실었습니다.
진행자: 당시 분위기는 어땠습니까?
기자: 미국 사회의 큰 구경거리였습니다. 만찬은 해리엇 레인이 주관했는데, 닭고기와 넙치, 햄, 아이스크림, 바닷가재, 비둘기 요리, 거북 수프가 나왔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사절단에 있던 한 젊은 통역은 미국에서 꽤 유명해졌는데요.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통령도 뵈었는데 훌륭한 신사였다, 그리고 레인 양도 보았다면서, 말끝에 감탄사를 남겼습니다.
진행자: 그런데 임기 마지막이 문제였죠.
기자: 네, 1860년 대선에서 뷰캐넌 대통령은 재선에 도전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취임할 때 한 번만 대통령을 지내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인데요. 대신 존 브레켄리지 부통령을 대선 후보로 지지했습니다. 하지만, 11월 선거에서 노예제를 반대하는 공화당 소속 에이브러햄 링컨이 대통령으로 당선됐습니다. 그리고 링컨이 취임하기까지 넉 달, 그 사이에 남부 주들이 연방을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12월 사우스캐롤라이나를 시작으로 뷰캐넌이 아직 대통령이던 기간에 7개 주가 탈퇴해 남부연합을 세웠습니다.
진행자: 뷰캐넌 대통령은 이렇게 남부 주가 연방을 탈퇴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대응했습니까?
기자: 그해 12월 의회에 보낸 연례교서에서 두 가지를 지적했습니다. 주가 연방을 떠나는 것은 위헌이라는 것, 그리고 연방정부에는 그것을 무력으로 막을 권한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연방 탈퇴는 잘못됐지만 자신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이야기였는데요. 이 입장 때문에 뷰캐넌 대통령은 지금까지도 비판받습니다. 넉 달 동안 사실상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나라가 쪼개지는 것을 지켜봤다는 겁니다.
진행자: 링컨에게 넘길 때는 어땠습니까?
기자: 1861년 3월 취임식 날, 뷰캐넌이 링컨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당신이 백악관에 들어가는 것이 내가 휘틀랜드로 돌아가는 것만큼 기쁘다면, 당신은 행복한 사람이라고요. 휘틀랜드는 펜실베이니아 랭커스터에 있던 뷰캐넌 대통령의 집입니다.
진행자: 퇴임 후에는 어떻게 지냈습니까?
기자: 휘틀랜드로 돌아갔는데, 남북전쟁이 터지자, 여론의 비판이 그에게 쏟아졌습니다. 전쟁을 막지 못한 책임자로 지목된 겁니다. 뷰캐넌 대통령은 1866년 자신의 임기를 변호하는 회고록을 냈습니다. 그리고 1868년 일흔일곱으로 세상을 떠나 랭커스터의 우드워드힐 묘지에 묻혔습니다. 죽기 전 자신에 대한 역사의 평가가 언젠가 바로잡힐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해지는데, 그런 일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진행자: 유적지는 어디에 있나요?
기자: 펜실베이니아주 랭커스터의 휘틀랜드가 박물관으로 보존돼 있습니다. 태어난 곳인 머서스버그에도 기념 공간이 있고요. 워싱턴 D.C.에도 그를 기리는 기념물이 하나 있습니다. 메리디언힐 공원의 뷰캐넌 기념비인데요. 여기에도 사연이 있습니다. 1903년 세상을 떠난 해리엇 레인이 유언으로 외삼촌의 기념물을 세우라며 10만 달러를 남겼습니다. 그런데 반발이 컸습니다. 당시까지 토머스 제퍼슨이나 존 애덤스, 제임스 매디슨의 기념물도 없는 수도에 왜 뷰캐넌이냐는 것이었고, 남북전쟁 당시 그의 처신을 문제 삼는 목소리도 있었습니다. 15년 가까운 논쟁 끝에 의회가 건립을 승인했고, 1930년 6월에야 제막됐습니다.
진행자: 가장 준비된 대통령으로 기대를 모았지만, 결국 가장 낮은 평가를 받고 있는 15대 제임스 뷰캐넌 이야기, 이조은 기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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