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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국가 건설 못이룬채 사망 - 투쟁으로 점철된 아라파트의 생애 - 2004-11-11


팔레스타인 지도자 야세르 아라파트 자치정부 수반이 11일 75세를 일기로 사망했습니다. 1929년 8월 24일에 태어난 아라파트 수반은 팔레스타인 독립 국가 건설에 일생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그같은 독립국가 창설의 꿈은 아라파트 생전에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테러분자와 낭만적 혁명가라는 두 가지 서로 상반되는 모습으로 세상에 알려졌던 인물, 아라파트 수반의 생애를 되돌아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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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은 아라파트 수반을 테러분자라고 규탄했지만, 나중에는 그와 평화 협상을 벌였습니다. 아랍권 지도자들은 아라파트 수반을 때로는 정치가로, 때로는 반역자로 취급했습니다.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아라파트 수반을 아버지 같은 인물로 여겼고 또한 독립된 조국건설에 대한 열망을 현실로 이끌어줄 지도자로 여겼습니다.

아라파트 수반은 지난 1993년에 가자지구와 요르단 강 서안의 팔레스타인 자치를 위한 협정에 서명함으로써 독립 국가 건설이라는 꿈을 향한 중대한 진전을 이룩했습니다. 그후 사기가 충천한 아라파트 수반은 가자지구의 자택으로 귀환했습니다.

아라파트 수반은 그같은 공로로 다음해인 1994년 이스라엘의 이츠학 라빈 총리, 시몬 페레스 외무장관과 함께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아라파트 수반은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열린 노벨상 시상식에서 통역을 통해 평화가 이루어지면 팔레스타인 인들의 진정한 정체성을 전 세계에 보여 줄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996년, 아라파트 수반은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의 첫번째 직선 대통령에 당선됐습니다. 그것은 독립된 팔레스타인 국가의 대통령이 되겠다는 꿈을 이룩하는데 가장 근접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라파트 수반은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이든 아니면 자신의 사후에라도 결국은 팔레스타인이 독립 국가가 될 것임을 확신했습니다.

아라파트 수반은 독립 국가 건설을 위해 오랫동안 투쟁한 용감한 사람들을 위해 평화가 달성되기를 바란다고 말하고, 팔레스타인 독립 국가에서는 민주주의가 구현되고 어린이들이 보호를 받으며, 행복하고 건강한 어린이들의 웃음 소리가 들릴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아라파트 수반은 10대 청소년 시절부터 먼 길을 달려 왔습니다. 그의 첫번째 이스라엘과의 전투 경험은 1948년 전쟁 당시 아버지와 형을 위해 무기를 나르는 것이었습니다.

야세르 아라파트가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에 첫발을 내디딘것은 1950년대 카이로에서의 학생 시절이었습니다. 후에 쿠웨이트에 거주했을때 아라파트는,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P-L-O의 핵심 인 [파타 운동]을 결성했습니다. 아라파트는 1968년에 P-L-O 의장으로 선출된뒤 사망할 때까지 유임했습니다.

팔레스타인 해방운동 초기시절에만 해도 아라파트는 무자비한 테러분자라는 악명을 얻었습니다. 그러다가 1988년 경에 아라파트는 외교술로 전환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유엔에서 P-L-O가 이스라엘을 하나의 주권국가로 인정하겠다고 아라파트가 선언하면서 시작됐습니다.

아라파트의 변신은 오슬로 평화협정을 가능케한 비밀평화회담을 인정하고 지지한데서 극명하게 나타났습니다. 아라파트는 1993년 수십년에 걸친 분쟁을 종식시킬 수 있으리라는 희망 속에 백악관에서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와 잠정평화협정에 서명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까웁게도 그로부터 7년 후 평화에 대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희망이 깨지면서 중동지역은 다시 폭력의 악순환으로 빠져들었습니다.

그후 평화회담 재개를 위한 노력이 있었지만, 진전을 이룩하지 못했습니다. 이때 이스라엘은 아라파트가 폭력을 막지 않는다고 비난하면서 아라파트를 요르단강 서안 자치정부 본부건물에 억류했습니다. 그러나 아라파트의 독재적인 지도방식에 대한 불만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굴욕적인 이스라엘의 태도는 팔레스타인인들 간에 아라파트에대한 인기를 더욱 높여주었습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항상 야세르 아라파트를 독립국 수립을 위한 투쟁의 아버지로 생각했습니다.

아라파트는 “분명히 우리는 평화회담과 용기있는 사람들의 평화를 계속 추구할 결의이며, 평화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과 계속 함께 나아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아라파트의 징표로 알려진 흑백 점박이 두건인 카피야와 덥수룩한 턱수염은 전세계에 팔레스타인인들의 독립을 향한 대의를 전파했습니다. 아라파트는 여러 차례의 암살 기도와 항공기 충돌 위기에서 생명을 건졌으며, 심각한 정치적 군사적 패배를 딛고 오뚝이처럼 생명을 이어갔습니다.

야세르 아라파트는 그의 나이 62세 때 젊은 여비서 수하 양과 결혼해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이들 사이에는 1995년에 태어난 딸이 하나 있습니다. 아라파트는 항상 그는 팔레스타인의 대의와 결혼했다고 하면서 결혼을 거부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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