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의 노르돔 시아누크 국왕이 지난 주에 양위를 선언함에 따라 캄보디아 국왕선출 위원회는 시아누크의 차남인 노르돔 시아모니 공을 후임 국왕으로 선출했습니다.
시아모니공은 예술분야에 열중하면서 대체로 정치권 밖에 있었습니다. 시아모니공은 부친 시아누크 전 국왕이 불과 열 아홉 살의 나이에 즉위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51세의 나이에 국왕이 됐습니다. 고전 발레 교사 출신인 시아모니공은 유엔 교육과학문화기구, 유네스코 주재 캄보디아 대사로 유네스코 본부가 있는 파리에서 20여년간 살았습니다.
시아모니공은 최근까지도 왕위에 오르는 것에 관심이 없다고 말해왔습니다. 캄보디아의 왕족 관측통들은 술수에 능했던 부친과는 크게 다른 국왕이 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시아누크 전 국왕은 왕위에 오르자 곧바로 국정에 관여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두 차례나 총리직을 겸임했었습니다.
그러나 부친과는 딴판인 시아모니공은 캄보디아 수도, 푸놈펜 정가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입니다. 왕가의 전기작가이자 캄보디아 전문가인 밀튼 오스본씨의 말입니다. 시아모니공은 적어도 캄보디아 국정면에서 볼 때 정치 문외한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점 때문에 시아누크 전 국왕이 여러 왕자들 가운데 둘 째 아들인 시아모니공을 자신의 후임 국왕으로 낙점해 두었는지도 모른다고 관측통들은 말합니다. 캄보디아의 정치 지도자들은 시아모니공의 형으로 국회의장인 노르돔 라나리드공을 포함해 모두가 지난 해 총선거 이래 극심한 분열상을 드러내 왔습니다. 캄보디아 정치 지도자들의 분열상은 이 나라가 제대로 정부도 구성하지 못한채 거의1년이 지날 정도로 심각합니다.
시아모니공은 캄보디아의 문화담당 대사로 유럽에 주재하면서 보인 활동과 예술에 대한 열성적인 지원으로 좋은 평판을 얻었습니다. 시아모니공은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체크 공화국 수도, 프라하에서 서양 고전 무용을 공부했습니다.
그는 한때 북한에서 영화제작에 관해 공부했고 1981년에는 파리로 이주해 발레 교사로 활동하다가 후에 고전무용 단체인 크메르 댄스협회의 회장직을 맡기도 했습니다. 그후 시아모니공은 1993년에 유네스코 주재 캄보디아 문화대사로 임명됐고 그때부터 문화활동과 캄보디아를 위해 열성을 다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유네스코 동남아시아
시아모니공은 지역개발 문제에서부터 정치적 화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제들에 언제나 문화적 관점을 이용해 접근하곤 했다고 엥글하트 위원은 회상합니다. 시아모니공의 그런 점은 어쩌면 캄보디아를 위해 매우 현명하고도 좋은 일이었는지도 모른다고 엥글하트 위원은 평가합니다.
시아모니공은 시아누크 전 국왕의 다섯 번째 부인인 현 모니아트 왕비의 유일하게 생존하는 아들입니다. 시아모니공의 친형은 지난 해에 파리에서 심장질환으로 사망했습니다. 시아모니공은 독신으로 있으며 그에겐 자녀도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