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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으로 배우는 역사] 화폐의 역사 (3)


안녕하세요? '호기심으로 배우는 역사' 시간의 부지영입니다. 기원전 7세기 고대 왕국 리디아에서 서양 최초의 동전이 탄생한 후, 로마 제국은 화폐에 기반을 둔 상업 중심의 사회를 이룩했습니다. 하지만 로마 제국이 발전시킨 서유럽의 통화제도는 서기 5세기 중엽에 서로마 제국이 게르만족에게 정복당하면서 무너지게 됩니다. 이후 중세 유럽은 상업 중심의 사회에서 장원 중심의 자급자족 사회로 변모하게 되는데요. '호기심으로 배우는 역사', 오늘은 중세 유럽의 화폐 제도에 관해 알아보겠습니다.

"1310년 5월 12일, 프랑스 병사들이 손발이 묶인 죄수 54명을 수레에 태우고, 파리 교외로 데려갔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병사들은 죄수들의 옷을 모두 벗기고, 장작더미 위에 세워진 기둥에 한 사람씩 묶었다. 죄수들은 무죄를 주장하며 소리를 질렀지만, 병사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장작더미에 불을 붙였다."

인류학자 잭 웨더포드 박사는 '돈의 역사'란 책에서 성전 기사단 기사들의 처형 장면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이날 파리 교외에서 벌어진 화형식은 유럽 최초의 국제 금융기관이 무너지는 신호탄이었는데요. 4년 뒤 성전 기사단 지도자들 역시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되면서, 2백여 년 동안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성전 기사단은 전설로 남게 됩니다.

"성전 기사단은 십자군 전쟁 당시 기독교 성지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순례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설립된 단체였다. 성전 기사단 기사들은 엄격한 금욕생활과 전장에서 물러나지 않는 용맹함으로 명성을 떨쳤다. 계속 입회자가 증가하고 기부금이 늘어나면서 성전 기사단은 유럽에서 중동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에 요새를 두게 됐고……. 전쟁에서 약탈한 재물을 다른 지역으로 옮기거나 영주들의 재산을 맡아 관리하는 역할을 하게 됐다."

그렇습니다. 세력이 비대해진 성전 기사단은 차츰 순례자 보호란 원래 목적에서 벗어나, 일종의 국제 금융기관 역할을 하게 됐습니다. 왕과 영주들의 재산을 관리하고, 돈을 빌려주기도 했는데요. 예를 들어 성전 기사단의 예루살렘 본부에 재산을 맡긴 영주는 유럽의 다른 지역 성전 기사단 지부에서 돈을 꺼내 쓸 수 있었던 겁니다.

하지만 이 같은 금융제도의 발전은 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나서 한참 뒤의 일이었습니다. 서로마 제국의 멸망은 화폐경제에 기반을 둔 최초의 제국이 멸망한 것을 의미했는데요. 로마를 무너뜨린 게르만인들 사회에서는 화폐가 별로 중요하지 않았던 겁니다. 게르만족의 거래는 주로 물물교환을 통해 이뤄졌고요. 모피나 노예 구입 등 중요한 거래에는 금이나 보석을 사용했습니다.

//머드 씨//
"서로마 제국이 멸망할 당시부터 은의 공급이 줄어들었다는 것 또한 문제였습니다. 은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거든요. 로마 제국 시대에는 중동에서부터 중국까지 무역이 매우 발달해 있었죠. 로마인들은 중국의 비단이나 후추 등 사치품을 구입하면서, 금이나 은으로 지불을 했는데, 주로 은을 사용했죠. 이런 일이 계속되면서 서유럽에서 은이 고갈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대에는 주화가 워낙 귀하기도 했지만, 혹시 있다고 하더라도 해도 대부분 금화였습니다."

미국 화폐연구협회 박물관의 전시책임자인 덕 머드 씨의 설명이었는데요. 이 같은 상황은 9세기 프랑크 왕국의 샤를 대제가 세력을 장악하면서 달라집니다.

"서기 481년 프랑크족을 통합해 프랑크 왕국을 건설한 클로비스 왕은 기독교로 개종해 로마 교황과 손을 잡고 유럽인들의 지지를 받게 된다. 클로비스가 죽은 뒤 아들들이 세력다툼을 벌이는 동안 총리대신 카롤루스 마르텔이 실권을 장악하고, 그의 아들 페팽이 왕위에 오른다. 이탈리아 중부에서 롬바르드족을 몰아낸 페팽은 빼앗은 땅을 로마 교황에게 바치는데, 이것이 로마 교황령의 시초가 된다."

이 페팽의 뒤를 이은 아들이 바로 카를로스 대제, 보통 샤를마뉴라고 불리는 샤를 대제였습니다. 샤를 대제는 많은 정복전쟁을 통해 프랑크 왕국의 영토를 넓혔고요. 영국과 이베리아 반도, 이탈리아 남부를 제외한 서유럽 전역을 손에 넣게 됩니다. 샤를 대제의 집권으로 서유럽 사회가 안정되고 교역이 증가하면서 다시 은화가 주조되기 시작했다고, 미국 화폐연구협회 박물관의 덕 머드 씨는 설명합니다.

//머드 씨//
"9세기 들어 프랑크 왕국의 샤를 대제 때 프랑스와 일부 지역에서 새로 은광이 발견되기도 했어요. 샤를 대제의 집권으로 어느 정도 유럽 사회가 안정되면서, 교역이 증가하기 시작했죠. 이에 따라 주화가 필요하게 됐고, 은화인 페니가 주조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아직 주화는 그리 흔한 것이 아니었고요. 로마 제국 시대 때처럼 널리 사용된 것도 아니었습니다."

서기 8백 년 교황 레오 3세는 샤를 대제를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 선포합니다. 이는 동로마 제국과의 단절, 나아가 동방과의 단절을 의미했는데요. 지중해 봉쇄로 상업의 중심지가 내륙으로 이동하게 되면서, 폐쇄적인 경제사회로 돌아서게 되고요. 다시 상업이 후퇴하면서 그나마 발행되던 금화마저 더 이상 나오지 않게 됐습니다. 지중해 봉쇄로 금을 수입할 수 없었던 이유도 있지만, 금화가 사용되지 않을 만큼 경제활동이 축소됐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서기 814년 샤를 대제가 사망한 뒤 그의 아들들에 의해 프랑크 왕국이 분열되면서 화폐가 난립하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교회 주교라든지, 강력한 영주들이 개인적으로 화폐를 발행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된 건데요. 이는 장원제도의 발달과도 밀접한 영향이 있습니다.

//머드 씨//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 지방 중심의 사회가 되면서 영주가 한 지방 사람들의 보호자가 됐습니다. 영주가 있고, 그 아래 기사들이 있었고요. 영주는 기사들에게 보수를 주거나 땅을 하사했죠. 그리고 영지 안에 살고 있는 농민들이 영주나 기사의 지배아래 들어가는 것입니다. 농민들은 다른 영주나 도적들로부터 보호를 받는 대가로 농작물의 일부나 노동력을 제공했죠. 또 교회도 토지를 소유했고, 영지 내의 농민들을 소유했습니다.

"십자가 군병들아, 주 위해 일어나 기 들고 앞서 나가 굳세게 싸워라. 주께서 승전하고 영광을 얻도록 그 군대 거느리사 늘 이김 주시네."

'예수를 향해 일어서라'는 기독교 찬송가 가사입니다. 이 노래는 십자군 병사들에게 신의 영광을 위해 나가 싸우라고 촉구하고 있는데요. 과연 당시 십자군 병사들은 이렇게 신앙심 하나만으로 전쟁에 나갔던 것일까요?

"11세기말 이슬람 세력이 예루살렘을 점령하자, 교황은 이슬람 교도에 대항해 성지를 탈환할 것을 가톨릭 교도들에게 호소했다. 서유럽 각국의 왕과 영주들이 이에 호응하면서 8차례에 걸쳐 단행된 대 원정이 바로 십자군 원정이었다. 십자군은 원래 기독교적인 성격이 강한 군대였지만, 점차 정치적, 경제적 이권에 따라 움직이게 됐다. 교황은 세력을 키우기 위해, 왕과 영주는 영토를 넓히기 위해, 그리고 상인들은 재물을 획득하기 위한 욕망에서, 또 농민들은 봉건사회의 중압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쟁에 참가했던 것이다."

그렇습니다. 성지 탈환은 명분이었을 뿐, 이처럼 저마다 다른 속셈으로 전쟁터에 나갔던 건데요. 십자군은 11세기부터 13세기말까지1백70여 년 동안 이슬람 세력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지만, 예루살렘을 차지한 기간은 얼마 되지 않았고요. 결국 성지 탈환이란 애초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십자군 원정은 서유럽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고 미국 화폐연구협회 박물관의 덕 머드 씨는 지적합니다.

//머드 씨//
"십자군 전쟁은 새로운 무역로를 열었습니다. 이 무역로가 워낙 장거리이다 보니, 화폐가 다시 필요하게 됐죠. 12세기 들어 무역이 증가하고 도시가 성장하면서, 화폐가 점점 중요해진 겁니다. 또 십자군 원정으로 동방에서 금이 들어오면서, 수백 년 만에 다시 금화가 주조되기에 이르렀습니다. 13세기 들어서는 일상생활에서 다시 주화가 사용되기 시작했는데요. 적어도 도시에서는 주화가 흔해졌습니다."

이 같은 현상이 벌어지는 가운데 원래 순례자 보호를 목적으로 세워진 성전 기사단이 일종의 국제 은행 역할까지 맡게 된 건데요. 앞에서도 말씀 드렸지만 성전 기사단은 왕과 영주들의 재산을 맡아 관리하고, 자금을 빌려주기도 했는데요. 이처럼 세력이 막강했던 성전 기사단은 잘 생긴 외모로 미남 왕이란 별명을 갖고 있던 프랑스 왕 필리프 4세에 의해 무너지게 됩니다.

"1295년 성전 기사단에 맡겼던 재산을 빼낸 필리프 4세는 파리 루브르에 왕실 금고를 세웠다. 1307년, 심각한 재정난에 직면한 필리프 4세는 성전 기사단의 막대한 재산을 독차지하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 성전 기사단 기사들이 악마와 결탁해 우상을 숭배하는 등 배교 행위와 비도덕적인 행위를 저지르고 있다는 소문을 퍼뜨린 것이다. 파리의 성전 기사단 본부를 급습해 기사들을 체포한 필리프 4세는 고문 끝에 자백을 받아낸 뒤, 이들을 화형에 처했다."

필리프 4세의 계속된 압력에 굴복한 교황은 1312년에 성전 기사단에 해체령을 내리는데요. 성전 기사단 사건은 십자군 원정의 실패로 인해 교회의 권력이 약해진 반면, 왕권이 강화됐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로마 제국이 무너진 이후 처음으로 서유럽 국가 정부가 금융기관을 통제할 권력을 갖게 됐다는 것을 의미하는데요. 근세에 들어 절대주의 왕정은 봉건 영주들의 화폐 주조권을 빼앗아, 통일된 화폐제도를 시행하게 됩니다.

'호기심으로 배우는 역사', 다음 시간에는 지폐의 탄생과 미국 화폐의 역사에 관해 전해 드립니다. 다음 시간도 기대해 주시고요. 저는 여기서 물러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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