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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장벽 붕괴 20주년 특집 2] 총성 없이 무너진 장벽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동서 냉전의 상징이었던 독일 베를린의 장벽이 붕괴된 지 9일로 20주년을 맞았습니다. 저희 `미국의 소리' 방송은 어제부터 베를린 장벽의 수립과 붕괴 배경, 이후의 변화 등을 살펴보는 특집방송을 보내드리고 있습니다. 오늘은 두 번째 순서로 베를린 장벽이 어떻게 세워졌고 붕괴됐는지 전해드립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승전국들은 얄타회담 합의에 따라 패전국 독일을 각각 미국과 영국, 프랑스, 소련 등 네 나라의 분할 점령 하에 둡니다.

그러나 서방 동맹국들과 소련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면서 1949년, 독일은 수도 베를린을 중심으로 친서방 독일연방공화국과 소련 연방의 공산체제인 독일민주공화국으로 갈리게 됩니다. 영국의 역사학자 프레데릭 테일러 씨는 이후 두 지역 사이에 국경이 만들어졌다고 말합니다.

테일러 씨는 1952년에 두 지역 사이에 국경이 만들어졌지만 이 때까지만 해도 주민들은 비교적 어렵지 않게 양측을 오갈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빈곤층이 많고 자유마저 제약을 받았던 동독 주민들이 서독으로 계속 탈출하면서 동독 정부는 위기감을 느끼게 됩니다. 테일러 씨에 따르면 1949년부터 1961년 사이에 동독 주민 2백 50만 명이 서독으로 이주했습니다.

결국 동독 정부는 1961년 8월 12일과 13일 사이 수t의 목재와 콘크리트 벽돌, 철망을 동원해 동베를린 국경 지역에 철조망을 설치합니다. 다음 날 잠에서 깬 베를린 시민들은 밤 사이 설치된 철조망을 보고 크게 놀랍니다. 시민들은 그러나 이 철조망이 가족과 이웃, 친구들과 몇 십 년 동안 만나지 못하게 하는 철의 장벽이 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동독 정부는 일주일 뒤 본격적인 장벽 설치를 시작해 마침내 1백10 km 의 동서독 국경 가운데 베를린 중심을 가르는 43 km 길이의 장벽이 완성됩니다. 이후 몇 십 년 동안 동독 주민들은 자유와 보다 나은 삶을 찾아 죽음을 무릅쓰고 벽을 넘거나, 지하터널을 통해 탈출을 시도합니다.

1960대 이후 서독은 비약적인 경제발전을 이룩합니다. 테일러 씨는 동독 역시 서독에 비할 수는 없지만 1974년까지 경제가 크게 발전했다고 말합니다.

"Between 1961 and around 1973-74….

동독 주민들은 삶의 수준이 높아져 세탁기를 사용하고 텔레비전을 시청했으며, 1975년에는 국민의 15%가 차량을 보유할 정도로 경제가 호전됐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발전은 소련의 연료와 자재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1970년대 석유 파동에 따른 원유값 폭등으로 동독에 대한 소련의 지원이 끊기면서 동독 지도부는 이전처럼 국민들에게 소비재를 공급할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동독과 소련 연방 국가들의 경제가 계속 내리막길로 치닫던1980년, 미국에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정부가 출범하고 소련에는 1985년 고르바초프 정부가 들어섭니다.

1980년대 소련과 독일에서 뉴욕타임스 특파원을 지낸 세르지 슈메만 씨는 고르바초프가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하면서 소련 연방의 결속력이 약화됐다고 말합니다.

"Once Gorbachev introduced this..

그 결과 동유럽 국가들의 공산당과 일반인들 사이에서 변화를 염원하는 운동이 일기 시작했고, 그 여파로 폴란드와 헝가리를 선두로 권력을 독점하던 공산당이 와해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가운데 동유럽에서 날로 확산되는 반체제 시위에 무력을 사용하지 않기로 한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1989년 결정이 역사적인 결과를 가져왔다고 역사학자인 테일러 씨는 말합니다.

"The really crucial point in 1989...

40여년 간 동독에 배치했던 25만 명의 붉은군대 병력을 철수한 고르바초프의 결정이 베를린 장벽 붕괴의 단초를 제공했다는 것입니다. 이후 많은 동독인들이 헝가리와 오스트리아를 통해 서독으로 탈출했으며 1989년 9월과 10월 동독에는 국민들의 평화시위가 계속됐습니다.

텔레비전을 통해 시위를 지켜 본 동독의 강경파 에리히 호네커 서기장은 시위대에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는 경찰과 군에 분노했습니다. 그러나 동독 육군 참모총장은 무력을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고, 호네커는 결국 서기장 자리에서 물러나고 동독의 새 지도부는 주민들의 자유로운 서독 여행을 허가합니다.

당시 동독 정부의 선전방송 대신 서독의 텔레비전 방송을 시청하던 대부분의 동독인들은 베를린 장벽이 열렸다는 뉴스 속보를 접한 뒤 국경지역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수많은 동독인들이 검문소를 무너뜨리고 서독으로 질주했습니다.

그날 밤 서독인들은 동독으로, 동독인들은 서독으로 이동하며 한바탕 축제를 벌였습니다. 이들은 서로 얼싸안고 장벽 위에 올라가 춤을 추며 샴페인을 터트리는 등 며칠 동안 축제가 계속됐습니다. 28여년 간 굳게 닫혔던 베를린 장벽은 이렇게 단 한발의 총성도 없이 무너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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