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렴 증세로 입원 치료를 받고 있던 김 전 대통령이 오늘 오후 1시 43분 입원 중이던 서울 세브란스병원에서 서거했습니다. 감기 등 증세로 병원에 입원한 지 37일 만인데요. 병원 측은 오늘 오전 투석 과정에서 김 전 대통령의 혈압 등이 낮아지면서 상태가 악화됐으며 오후 1시 35분부터 맥박이 갑자기 느려지다가 8분 뒤인 43분쯤 김 전 대통령의 심장이 멎었다고 설명했습니다.
병원 측은 또 비상대기 중이던 의료진이 곧바로 혈압을 올리는 약물을 투여하는 등 응급 조치에 들어갔지만 의식을 회복하진 못했다고 전했습니다. 서울의 김은지 기자로부터 자세한 소식 들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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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전 대통령은 지난 달 13일 폐렴으로 입원해 23일 폐색전증으로 악화됐으며, 29일에 기관지 절개 시술을 받은 뒤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아 왔습니다.
김 전 대통령의 최측근인 민주당 박지원 의원은 기자회견을 통해 김 전 대통령의 서거 사실을 공식 발표했습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 각국의 여러분, 김대중 대통령께서 8월18일 오후 1시 43분 서거하셨습니다. 그동안 쾌유를 기원해주신 국민 여러분과 세계의 모든 분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정성을 다해 치료해준 의료진에게도 감사의 말씀 올립니다."
임종에는 부인인 이희호 여사 등 가족들과 권노갑, 한화갑 의원 등 이른바 동교동 측근들이 함께 했습니다. 임시빈소는 신촌세브란스병원에 마련됐습니다.
문) 김대중 전 대통령이 어떤 분인지 소개해주시죠.
답) 한국의 민주화 운동과 인권 신장에 평생을 헌신해 온 김 전 대통령은 한국 내에서 독재종식과 민주주의 정착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요, 김 전 대통령은 지난 1924년, 전남 신안군 하의도의 한 농가에서 태어났습니다.
1950년대 장면 당시 부통령이 이끌던 민주당에 입당하며 정치에 입문한 김 전 대통령은 군사독재 시절 민주화 운동의 상징이었습니다.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도전했다 패한 김 전 대통령은 이후 납치와 투옥, 가택연금, 망명 등 수난을 겪었습니다. 1980년 5.18 민주화 운동 때는 신군부에 의해 내란음모죄로 사형선고까지 받게 됩니다.
각국의 구명운동 결과 2년 7개월 간 복역을 마치고 미국 망명길에 오른 김 전 대통령은 1985년 귀국해 야당지도자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과 함께 야권을 이끌게 됩니다.
1971년 첫 대권에 도전했다 낙선한 김 전 대통령은 4번째 도전 끝에 제 15대 대통령에 당선돼 50년 만에 첫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루게 됩니다. 김 전 대통령의 당시 취임사 들어보시죠.
[김대중 대통령 취임식 녹취]"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국민의 자유와 복지를 증진 및 민족문화 창달에 노력하며 대통령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합니다"
재임기간 동안 김 전 대통령은 한국의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정보화 사회를 앞당기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문) 김 전 대통령은 지난 2000년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정상회담을 여는 등 남북관계 개선과 통일 문제에 헌신하지 않았습니까? 남북관계에서 김 전 대통령의 업적으로 어떤 것들을 꼽을 수 있나요?
답) 네 그렇습니다. 김 대통령이 남긴 업적 가운데 첫 번째로 꼽을 수 있는 것이 바로 남북 화해협력의 문을 열었다는 점인데요.
김 전 대통령은 '98년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공존과 교류를 핵심으로 하는 '3단계 통일론'의 실천방안으로 '햇볕정책'을 제안하게 됩니다. 햇볕정책은 쉽게 말해 북한을 적이 아닌 대화의 상대이자 동반자로 인식하자는 것인데요.
갈등과 대결이 아닌 화해의 남북관계를 만들기 위한 김 대통령의 이 같은 노력은 결국 '남북한 첫 정상회담'이라는 결실로 이어집니다.
분단 55년 만에 이뤄진 남북정상회담은 정치 경제 문화 등 남북관계의 모든 분야에서 새 지평을 여는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정상회담 후 김 전 대통령의 말 들어보시죠.
정상회담 후 김대중 대통령 연설 녹취] "이번에 가서 확인함으로써 나는 우리의 미래에 화해도 협력도 통일도 모두 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돌아왔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
6.15공동선언에 따라 이산가족 상봉이 이뤄졌고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이 열리면서 해마다 수 만 명이 남북을 오갔습니다.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도 획기적으로 줄어들었습니다.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하려는 김 대통령의 노력은 국제사회에서도 인정받아 한국인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받게 됩니다. 김 대통령의 대북 포용정책은 후임 노무현 정부에도 그대로 계승돼 2007년 제2차 남북 정상선언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하지만 정상회담 직전 북측에 돈을 건넨 사실이 나중에 밝혀지고, 2006년 북한이 핵실험을 감행하면서 햇볕정책의 의미는 퇴색된 채 미완의 숙제로 남게 됐습니다. 아울러 재임 당시 북한에 대한 대규모 지원은 한국사회에 이른바 `퍼주기' 논란을 빚기도 했습니다.
문) 김 전 대통령이 남북 간 화해협력에 기여했다는 점에서 북한의 반응이 궁금한데요. 북한에서 나온 반응이 있나요?
답) 네 현재까지 북한에선 공식 반응이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만, 일각에선 남북관계 개선에 많은 기여를 한 김 전 대통령의 서거에 조문단을 보내올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북한은 지난 2001년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사망했을 때 김 위원장의 조전과 송호경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부위원장 등 4명의 조문단을 파견했습니다. 2003년 숨진 정몽헌 회장에 대해서도 송 부위원장을 추모행사에 파견했습니다.
북한은 그러나 남북관계가 극도로 경색된 지난 5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땐 조문단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남북경색 국면이 아직 풀리진 않았지만 김 전 대통령이 햇볕정책을 실천하고 첫 남북정상회담의 주역이었다는 점에서 북한의 조문단 파견 여부가 주목됩니다.
한국 정부는 북한이 조문단을 파견할 경우 이를 받아들일 방침이어서 북한 조문단의 서울 방문이 이뤄지면 경색된 남북관계를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문) 김 전 대통령의 장례 절차는 어떻게 되나요?
답) 한국 정부는 한승수 국무총리 주재로 긴급 관계장관 회의를 열고 김 전 대통령의 장례를 위해 필요한 조치를 논의하고 있습니다.
아직 확정되지 않았지만, 전례를 보면 김 대통령의 장례는 국민장으로 치러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지난 5월 서거한 노무현 전 대통령과 최규하 전 대통령 등 역대 전직 대통령의 장례가 대부분 국민장으로 치러졌기 때문인데요. 국민장으로 결정될 경우 최대 일주일 간 장례가 치러지며 공식 빈소 외에 전국 각지에 김 전 대통령을 추모할 수 있는 분향소가 설치될 예정입니다. 하지만 국장으로 치러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한국 정부는 유족의 뜻을 최대한 반영해 장례 형식과 일정을 조율한 뒤 내일쯤 임시 국무회의를 열고 관련 절차를 최종 논의할 전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