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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지금] 전설적인 뉴스 진행자 월터 크롱카이트 별세


미국 안에서 일어나는 흥미로운 소식과 화제를 전해드리는 미국은 지금 시간입니다. 오늘도 김정우 기자 함께 하겠습니다.

(문) 지금 들으시는 음성은 지난 1963년 존 F케네디 대통령의 암살 소식을 전하는 뉴스 진행자 월터 크롱카이트 씨의 목소리입니다. 바로 이 목소리의 주인공, 미국의 전설적인 앵커맨, 월터 크롱카이트 씨가 최근에 사망했죠?

(답) 그렇습니다. 미국 CBS 방송의 간판 앵커로 활약했던 월터 크롱카이트 씨가 지난 17일 밤 지병으로 92살을 일기로 사망했습니다.

(문) 그런데 크롱카이트 하면 항상 따라다니는 단어인 이 앵커란 말은 어떤 뜻인가요?

(답) 네, 간단하게 풀이하면 앵커란 방송 뉴스 진행자를 뜻합니다. 진행자가 남성이면 앵커맨, 반대로 여성이면 앵커우먼으로 부르죠. 앵커는 방송 뉴스 프로그램에서 준비된 뉴스를 읽어주거나 뉴스에 대해 간단한 평을 하는 것을 임무로 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유럽에서는 뉴스캐스터나 뉴스리더라고 불리기도 하죠.

(문) 앵커란 영어 단어는 한국말로 풀이하면 닻이란 뜻을 지니고 있는데, 방송 뉴스 해설자를 앵커로 부르게 된 이유가 뭔가요?

(답) 원래 앵커맨이라고 하면 글자 그대로 배에서 닻을 책임지는 사람을 말하거나 아니면 운동 경기 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을 의미했는데요, 20세기에 들어서 방송 뉴스에도 이 말이 쓰이기 시작합니다. 이 앵커맨이란 말은 처음에는 어떤 뉴스를 두고 연사들을 모아놓고 이들에게서 얘기를 듣는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단어로 쓰이더니, 크롱카이트 씨가 CBS 뉴스 프로그램에 등장 이후부터 점점 방송 뉴스 진행자를 의미하는 말로 굳어지게 되죠.

(문) 그렇다면 사망한 크롱카이트 씨가 미국에서 처음으로 앵커맨으로 불린 사람이었나요?

(답) 그렇지는 않습니다. 크롱카이트 이전에도 방송 뉴스 진행자란 의미로 앵커 칭호를 받은 사람이 미국 방송가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인들의 마음 속에 방송 뉴스 프로그램의 앵커로 확실하게 자리잡은 사람이 이 크롱카이트 씨였다는 그런 얘기입니다. CBS 방송은 1952년에 시카고에서 열린 민주, 공화 양당의 전당대회를 중계하면서 크롱카이트를 방송 진행자로 앉혔는데요, 크롱카이트가 이 중계에서 인상적인 역할을 했고요, 크롱카이트 씨의 이런 활약을 두고 미국 언론들이 크롱카이트 씨를 CBS 뉴스 팀의 앵커맨으로 부르게 되면서, 앵커맨이란 단어가 세상에 잘 알려지게 된거고요, 또 이후에는 방송 뉴스 진행자란 의미로 굳어지게 된거죠.

(문) 크롱카이트 씨는 원래 전장을 누비던 신문 기자 출신이었죠?

(답) 그렇습니다. 크롱카이트 씨는 2차 세계 대전이 막바지에 이른 1944년,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하던 날에는 폭격기를 타고 전장을 취재했고요, 또 그 유명한 101 공수 여단과 함께 직접 낙하산을 타고 네덜란드에 들어가 취재를 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UPI 통신의 전신인 UP통신사의 모스크바 지부장으로 일하다가 미국 지상파 방송사인 CBS에 들어갔죠.

(문) 이 크롱카이트 씨가 앵커맨으로 있던 1962년부터 1981년까지의 기간은 미국 현대사에서 굵직굵직한 사건이 일어났던 시기죠?

(답) 네, 60년대엔 케네디 대통령과 인권운동가인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가 암살됐고, 또 미국역사에 있어서 결코 잊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베트남 전쟁이 진행됐고요 그리고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다시피 우주선 아폴로 11호가 달에 최초로 착륙했습니다. 70년대로 넘어와선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현직 대통령이 물러나는 등 크롱카이트가 뉴스를 진행하던 시기는 미국 역사에서 바람 잘 날이 없던 시기죠.

(문) 한때는 미국인 약 2,600만명이 매일 밤 이 크롱카이트가 진행하는 CBS EVENING NEWS를 지켜봤다고 하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이 크롱카이트가 진행하는 뉴스를 본 이유는 단지 이 시기에 큰 사건들이 많이 일어났기 때문만은 아니겠죠?

(답) 물론입니다. 당시 CBS말고도 NBC와 ABC방송사도 뉴스 프로그램을 내보내고 있었는데요, 크롱카이트가 미국민들의 눈길을 사로잡은 이유는 크롱카이트가 보여준 정직함과 공정함, 신뢰성 그리고 성실함 때문이었습니다.

(문) 크롱카이트는 뉴스를 전달함에 있어서 주장보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공정하게 전하려고 노력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 않나요?

(답) 그렇습니다. 언젠가 미국에서 여론조사를 해보니까, 미국에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사람으로 이 크롱카이트 씨가 뽑힌 적이 있었고요, 대통령 말은 못 믿어도 크롱카이트의 말은 믿어도 된다는 소리도 있었을만큼 크롱카이트에 대한 신뢰는 대단했습니다. 사실 크롱카이트가 뉴스 앵커직에 오른 1960년대 초만 하더라도 미국 언론계에는 뉴스 보도에 있어서 사실에 대한 정확한 전달보다는 기자 자신의 주장을 강조하는 경향이 강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크롱카이트 씨는 당시 이런 세태를 거슬려 사실에 대한 정확하고 공정한 전달을 강조해서 미국인들의 신뢰를 얻은 거죠.

(문) 크롱카이트 씨의 이 같은 성향은 특히 베트남 전 보도에서 잘 드러난 것 같은데요?

(답) 그렇습니다. 당시 미국의 주류 언론들은 여러가지 이유 때문에 베트남 전의 실상을 국민들에게 알리는 것을 주저하는 편이었습니다. 하지만 크롱카이트 씨는 1968년 그 유명한 월맹군의 구정 대공세 기간 중에 베트남을 방문하고 돌아와, 베트남 전쟁의 실상을 그대로 보도하게 됩니다. 크롱카이트는 이 보도에서 미국의 베트남 전쟁은 수렁에 빠져 있고, 미국 정부가 취해야 할 정책은 전쟁이 아닌 협상이라는 보도를 해서 미국 사회에 충격을 주기도 했습니다.

(문) 크롱카이트 씨는 공정하고 신뢰성 있는 보도로 명성을 얻었지만, 19년동안 뉴스를 진행하면서 인간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고 하더군요?

(답) 그렇습니다. 아까 처음에 들려드렸다시피, 크롱카이트는 케네디 대통령 암살 소식을 전하면서 끝내 텔레비젼 카메라 앞에서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고요, 또 1969년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하는 장면을 중계방송하면서 계속 좋아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스웨덴에서는 앵커맨을 크롱카이커로 부르기도 할 만큼, 이 크롱카이트 씨는 그동안 뉴스 앵커를 상징하는 인물이었습니다. 미국 언론사에서 한 시대를 풍미한 인물이 사라졌는데요, 앞으로 누가 미국 안에서 이 크롱카이트 같은 위대한 앵커맨의 반열에 오를 수 있을 지 지켜보는 것도 아주 흥미로울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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