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쟁이 끝난 뒤 납북된 민간인이 한국에서 처음으로 국가유공자로 등록됐습니다. 한국 정부는 오늘 (8일) 6.25 전쟁 당시 미 극동군사령부 소속 '8240 유격부대'에서 활동한 뒤 납북된 최원모 씨를 참전 국가유공자로 인정했다고 밝혔는데요. 서울에서 김은지 기자가 전해드립니다.
한국의 국가보훈처는 8일 6.25 전쟁 당시 미 극동군사령부 소속 '8240 유격부대'에서 활동한 뒤 납북된 최원모 씨를 참전 국가유공자로 인정했다고 밝혔습니다. 6·25 전쟁 이후 납북된 민간인 가운데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은 사람은 최 씨가 처음입니다.
국가보훈처 관계자는 "국방부로부터 최 씨가 유격부대에 참전했던 사실을 확인 받았고 이에 지난 6일 참전 국가유공자로 인정했다"고 말했습니다.
"신청은 유족인 아드님이 국방부 장관을 상대로 신청해 참전 사실 확인서를 발급받았고 이를 근거로 보훈처에서 국가유공자 증서를 수여한 것입니다. 참전유공자법은 본인이 생존할 경우 예우와 지원을 하도록 만든 법이므로 유족한테 예우와 지원을 하는 것이 없고 다만 정부로부터 최 씨의 명예회복을 인정받았다는 의미가 크다고 봅니다."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최 씨는 지난 1950년 11월 평안북도에 진격했던 유엔군이 중공군의 개입으로 퇴각하게 되자 당시 오산학교 출신들이 주축이 돼 창설한 유격부대에 합류했습니다.
최 씨는 부대에서 유일한 동력선인 40t급 북진호의 함장을 맡아 부대 내에서 보급과 포로 수송 등을 담당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당시 부대 대대장으로 근무했던 한봉덕 8240 유격부대 전우회장은 "최 씨는 병력이 2천6백 명에 달하는 부대의 물품 수송과 민간인 대피 등을 맡았다"며 "최 씨가 없었다면 도서 지역에서의 유격전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전쟁 당시 8240 유격부대는 북한군 3천 여명을 사살하고, 중공군 6백 여명을 포로로 잡는 성과를 올렸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최 씨는 1967년 6월 풍복호 선원 7명과 함께 서해 연평도 부근에서 조업을 하다 납북됐습니다.
다른 선원 6명은 풀려났지만 최 씨는 다른 선원 1명과 함께 북한에 억류된 채 현재까지 소식이 끊겼습니다.
지난 2002년 4차 이산가족 상봉 당시 최 씨 가족들은 북측에 최 씨의 생사 확인을 요청했지만 '생사 여부 확인이 불가능하다'는 통보만 받았습니다.
아들 최성용 씨는 "6.25전쟁 당시 부친이 했던 반북 행위가 드러나 억류된 것으로 추정된다"며 "2000년도에 한 납북자로부터 부친이 1970년경 처형당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고 말했습니다.
"북측 적십자사가 대한적십자 측에 보낸 정식공문에 따르면 확인불가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북측의) 정식 문서인 셈이지요. 이후 67년도에 잡혀간 탈북자한테 들은 바에 따르면 부친과 같은 장소에 있었는데 아버지가 없어졌다, 흔적이 없다고 얘길 하더라구요."
정부 관계자는 "귀환한 납북자들의 증언으로 미뤄볼 때 북한이 6.25전쟁에서 활동한 최 씨의 전력을 문제 삼아 억류한 것으로 보인다"며 "1백살 가까운 최 씨가 지금까지 생존해 있을 가능성은 희박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습니다.
아버지의 처형 소식을 듣고 납북자가족모임을 결성해 납북자 송환 운동을 펴 온 최성용 대표는 지금까지 약 50명의 납북자와 국군포로, 그 가족들의 탈북을 도왔습니다. 북한과 중국에 있는 정보망을 통해 1백50여 명의 납북자 생사 확 인도 했습니다.
최 대표는 "지난 10년 간 납북자 문제 해결을 위해 뛰어다녔지만 정부 차원에서 실질적으로 푼 것이 없다"며 "한국 정부는 이제라도 북한에 납북자의 생사 확인을 요구하는 등 보다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야 한다"고 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