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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투병 중 북한 어린이 돕는 한국계 미국인


한국전쟁 뒤 미국에 입양된 한국계 미국인이 북한 어린이를 돕고 있습니다. 한상만 씨는 지난 해 한-슈나이더 국제어린이재단을 설립해 북한을 비롯한 개발도상국들의 어린이들을 돕고 있습니다. 올해 64살의 한상만 씨는 현재 암에 걸려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이진희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에 거주하는 한국계 미국인 한상만 씨가 한-슈나이더 국제어린이재단을 세운 것은 지난해 중반 입니다. 한상만 씨는 `미국의 소리’ 방송과의 전화인터뷰에서, 재단은 전세계 11개 개발도상국들의 어린이들을 지원하고 있다며, 그러나 최우선 순위는 북한 어린이라고 밝혔습니다.

한상만: “11개 나라 지원하고 있는 데서 제일 힘든 곳이 북한입니다. 그래서 우선적으로 북한을 지원하기로 했죠. 또 제가 한국 사람이고 해서. 북한 지원은 사리원과 평성 두 군데를 하고 있습니다. 두 곳에서 총 8백~9백50명 정도를 (북한 어린이)돕고 있습니다.”

한상만 씨는 재단 설립과 함께 즉각 대북 지원이 이뤄지길 희망했지만, 분배 모니터링 등과 관련해 북한 당국과 합의를 보지 못해 지연됐다고 말했습니다. 대북 지원 사업을 보류하고 캄보디아 어린이들에 대한 지원 활동을 하고 있는 와중에 북한 당국에서 연락을 해 왔습니다. 모니터링 등에 관한 재단 측의 조건을 들어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한상만: “저희가 요청한 대로 다 들어주겠다고, 저희의 요청이라는 것은 저희가 보내는 물품이나 식품이 필요로 하는 애들한테 전달이 되는지 안 되는지 확인이 되면 계속 지원을 하겠다는 것이죠.”
재단은 올 1월 처음으로 북한에 14만 여개의 포장 음식 (packaged meals)과 1천 개의 겨울 점퍼를 보냈습니다. 북한의 요청으로 사리원과 평성 고아원 이외에 다른 네 곳의 고아원 어린이들에게도 전달이 됐습니다.

포장음식에는 쌀과 콩 등 식물성 단백질, 비타민, 무기질이 혼합된 영양제 등을 담았습니다. 한상만 씨는 포장 음식은 미네소타에 있는 ‘굶주리는 어린이 돕기’(Feed My Starving Children)라는 단체가 지원했는데, 14만 여 개를 일일이 손으로 포장했다고 말했습니다.

한상만: “손으로 다 싸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기계로 싸면 빠른데… 싸는 사람들이 다 하나님 믿는 사람들이고 포장하면서 기도를 한다고 합니다. 먹는 아이들 하나하나 다 구원받을 수 있도록. 그 소리를 듣고 감격했습니다.”

한상만 씨가 북한과 인연을 맺은 것은 지난 1995년 입니다. 당시 사업차 북한에 갔다가 기근 상황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북한 어린이들을 도와야겠다고 결심했지만, 먹고 사는 데 바빠 결심을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다 몇 년 전 불치병에 걸렸다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다발성 골수종이라는 암이었습니다. 엄청난 병원비와 씨름하고 있던 한상만 씨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한상만: “잘못하다가는 제가 있는 거를 자신만을 위해서, 병원비가 많이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작년에 결정을 했습니다. 가진 게 별로 있지도 않지만 있는 거 다 저를 위해서 써서 안되겠구나 해서 있는 거 다 정리해서 재단에 다 넣고, 저는 지금 집도 없이 삽니다. 딸 집에 얹어서 살아요.”

한-슈나이더 국제어린이재단은 한 씨의 양아버지인 고 아더 슈나이더(Arthur Schneider) 박사를 기리기 위해 만들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직후 한국에 잠시 머물렀던 슈나이더 박사는 1954년, 서울대학교 재건축 사업 총 책임자를 맡아 다시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한상만 씨는, 서울대 병원에 일자리를 얻겠다며 나섰다가 슈나이더 박사와 인연이 닿았습니다. 아무런 약속도 없이 서울대병원 김주익 원장의 사무실을 찾았던 어린 소년은, 문전박대를 받았습니다. 당시 김 원장을 만나러 왔던 슈나이더 박사의 비서가 한 씨의 사연을 듣고 한 씨를 데리고 원장 사무실로 들어갔습니다. 한상만 씨는 어리다는 이유로 일자리를 얻지 못했지만 대신 슈나이더 박사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한상만: “일자리가 안 된다고 하니 어쩌겠어요? 터덜터덜 병원 입구에서 나와 한 70미터 갔습니다. 한 여자분이 꼬마야 하면서 저한테 손짓을 하는 거 같았습니다. 오라고 해서, 직장을 주나 보다 해서 얼른 뛰어갔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분이 저를 보길 원한다고 해서 따라 올라가니까 미국 분이 나오시더라구요. 그게 저희 아버님이었습니다. 사무실에서 2시간 동안 여러 가지를 물으셨습니다. 몇 살 때 어디서 가족을 잃고, 또 정말 공부하고 싶으냐고 물으셨습니다.”

슈나이더 박사는 한상만 씨와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 한국말까지 배울 정도로 한 씨에게 정을 쏟았습니다. 서울대 재건축 사업이 끝난 1961년, 슈나이더 박사는 당시 16살이었던 한상만 씨를 입양해 미국으로 함께 돌아왔습니다. 미혼이던 슈나이더 박사가 한 씨를 입양할 수 있도록 미네소타 주 연방 의원들이 힘을 모았습니다.

한상만 씨는 현재 항암 치료로 몸이 많이 쇠약해진 상태지만 북한 지원만은 멈출 수 없다고 말합니다. 재단은 오는 5월 초, 20여명의 의료진을 열흘 정도 일정으로 북한에 보낼 계획입니다. 한상만 씨는 건강이 허락하는 한 함께 북한에 가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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