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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거주 한국 첼리스트, 북한 윤이상 음악회 참가


평양에서는 지난 15일부터 사흘 간 윤이상 씨를 추모하는 '윤이상 음악회'가 열렸습니다. 그런데 미국에서 음악을 공부하고 있는 한 한국인 첼로 연주자가 이 음악회에 초청돼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유미정 기자와 함께 자세한 내용 알아보겠습니다.

진행자: 이번에 초청된 한국인 연주자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합니다.

기자: 네, 미국 보스톤에 있는 뉴잉글랜드 음악원(The New England Conservatory)에서 석사 과정을 밟고 있는 23살의 젊은 첼로 연주자 고봉인 씨입니다. 고봉인 씨는 하버드대학교 학부에서 생물학을 전공한 과학도인데요, 12살 때 차이코프스키 국제 청소년 콩쿠르 첼로 부문에서 1등을 차지했고, 또 14살의 어린 나이에 독일 베를린음대로 유학을 떠나 음악신동으로 주목을 받았었습니다.

진행자: 그런데 북한 측에서 고봉인 씨를 어떻게 초청하게 된 겁니까?

기자: 고 씨는 '미국의 소리' 방송과의 전화인터뷰에서 지난 2003년 경남 통영에서 열린 국제 콩쿠르가 계기가 됐다고 말했습니다.

"콩쿠르에 나가보니까 참가자가 한 40명 됐거든요. 그런데 저만 윤이상 선생님의 곡을 본선 때 연주하도록 준비를 했더라구요. 국제 콩쿨이라 외국에서 첼로 연주자들이 많이 참가했는데, 제가 다행히 본선까지 올라가서 선생님 곡을 연주하게 됐는데, 안타깝게도 2위를 하기는 했지만 그 소식이 선생님의 부인인 이수자 여사님의 귀에 들려서 북한까지 전달이 된 것이죠."

이후 고 씨는 윤이상 탄생 90주년을 맞아 지난 해 서울에서 40년 만에 한국을 방문한 이수자 씨가 참석한 가운데 열린 윤이상 페스티벌 개막 공연에서 같은 곡을 연주해 기립박수를 받았습니다.

진행자: 고봉인 씨가 북한을 방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일텐데, 소감이 어땠다고 하던가요?

기자: 고봉인 씨는 먼저 북한의 음악 수준에 대해서 가장 큰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제가 북한의 문화 수준이 높을 것으로 예상은 하고 있었는데 가서 경험을 했는데요, 예상보다 10배 이상이나 인상적이더라구요. 윤이상 관혁악단이 세계 최고 수준의 오케스트라라고 칭찬을 하고 싶구요, 그리고 만경대 어린이 공연이 있잖아요? 거기 가서 공연을 관람하게 됐는데 정말 실수도 하나도 안 하구요…."

고 씨는 북한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도 그처럼 높은 문화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고 말했습니다.

진행자: 남북한의 음악인이 한 무대에서 윤이상의 작품을 연주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죠? 이번 음악회는 북한의 한철 문화성 부상과 윤이상 씨의 부인 이수자 씨도 관람했다지요, 반응이 어땠답니까?

기자: 반응이 아주 좋았다고 합니다. 연주가 끝나자 이수자 씨는 눈물을 흘렸고, 무대로 나올 때는 감정이 북받쳐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제가 연주 후에 앵콜이 나왔는지를 물어봤는데요.

"북한에서는 재창이라고 하는데요, 흔하지는 않나봐요. 그래서 제가 앵콜이 나오면 어떤 곡을 할지 고민을 많이 했었는데요. '엄마야 누나야'를 편곡한 것을 꼭 연주하고 싶었는데, 미리 여쭤봤는데, 그 곡이 어떤 곡인지 계속 물어보시더라구요. 그래서 허락을 받아야 된다고. 연구소 내부에서 하는 연주회 곡도 허락을 받아야 된다는 것이 조금 좌절스러웠구요…"

고봉인 씨는 짧은 방문기간 중 방문한 묘향산 국제친선 전람관과 이수자 씨가 정성껏 준비한 소풍이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습니다.

진행자: 끝으로, 윤이상 씨에 대해 소개해 주시죠.

기자: '상처입은 세기의 거장', '서양현대음악 기법을 통한 동아시아적 이미지의 표현' 또는 '한국 음악의 연주기법과 서양악기의 결합' 등이 윤이상 씨를 말할 때 흔히 등장하는 표현들입니다.

1917년 한국의 경상남도 통영에서 출생한 윤이상 씨는 일본, 프랑스, 독일에서 음악을 공부한 뒤 1971년에는 독일에 귀화해 그 이듬 해인 72년 뮌헨올림픽 개막 축하 오페라에서 <심청>, <나비의 꿈>, <광주여, 영원하라> 등을 연주했습니다.

윤이상 씨는 당시 현존하는 '유럽의 5대 작곡가'로 꼽혔고, 독일연방공화국 대공로 훈장인 '괴테 메달' 등을 수상했습니다.

앞서 '상처입은 세기의 거장'이라고 표현했듯이 윤이상 씨는 지난 1967년 동백림 간첩단 사건에 연루돼 한국에서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가, 이후 두 차례에 걸쳐 10년이 감형됐고, 결국 동료음악가들과 독일 정부의 도움으로 석방됐습니다. 조국인 남한에서 살고 싶어도 살지 못했던 윤이상 씨는 늘 고국을 그리워했습니다. 윤이상 씨는 복권이 이뤄진 1994년 9월 한국에서 열린 윤이상 음악축제에 참석하려 했지만, 한국 정부와의 갈등으로 끝내 귀국하지 못했고, 이듬 해인 1995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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