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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북 관계, 대결과 탐색의 58년


북한의 핵 신고서 제출에 상응해 미국이 대북 테러지원국 지정 해제 절차에 착수함에 따라 미-북 관계에도 적잖은 변화가 예상됩니다. 지난 1950년 한국전쟁에서 교전 상대로 처음 관계를 맺은 두 나라는 냉전 시절 줄곧 적대 상태에 있었고, 냉전 해체 이후 북한의 핵 문제를 둘러싸고 본격적인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조은정 기자와 함께 58년에 걸친 미-북 관계를 간략하게 알아보겠습니다.

문: 조은정 기자. 미국과 북한은 한국전쟁을 거쳐 1953년 중국과 함께 정전협정을 체결한 이후 '90년대 초반까지 약 40여년 간 직접적인 교류가 거의 없었죠?

답: 그렇습니다. 미국과 옛 소련을 주축으로 자본주의 세계와 사회주의 세계가 대립했던 냉전 시기에는 미국과 북한 간 군사적 충돌 사건이 몇 차례 있었을 뿐입니다. 1968년 미 해군 정보수집함 푸에블로 호가 원산 앞바다에서 북한군에 나포된 사건, 1969년 북한 전투기가 동해에서 미군 정찰기 EC-121를 격추한 사건, 1976년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미군 장교 2명이 북한군 50여 명에게 도끼로 살해 당하는 사건 등이 있었는데 이 때마다 미국과 북한은 비공식 또는 비밀접촉을 통해 타결을 봅니다.

문: 1980년대 말 사회주의 국가들이 체제 전환을 시작하고 냉전이 해체되면서 북한의 입장에 변화가 생겼나요?

답: 예. 북한은 심각한 안보불안을 갖게 됐고요, 이에 따라 한국,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나서게 됩니다. 미국은 지난 1988년 북한의 대화 제의를 받아들여 12월부터 미-북 간 비공식 참사관급 대화가 베이징에서 1991년까지 18회 이뤄집니다. 곧이어 1992년 1월, 당시 북한 노동당 국제 담당 비서 김용순이 뉴욕을 방문해 미 국무부의 아놀드 캔터 정무차관과 회담을 하는데, 이것이 미-북 관계 개선을 위한 최초의 고위급 회담입니다.

문: 그런데 미국과 북한이 이같이 상호 탐색을 벌이는 중에 제 1차 북 핵 위기가 불거지지 않습니까? 이후 체제 안전을 원하는 북한과 핵 확산을 막으려는 미국 사이에 지리한 줄다리기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데요. 1차 핵 위기 당시 미-북 관계는 어떤 양상을 보였습니까?

답: 옛 소련으로부터 원자력 기술을 일부 전수받은 북한은 '80년대 들어 원자로와 재처리 시설 등을 만들며 본격적인 자체 핵 개발을 시작했고, 이 때 핵무기도 염두에 둔 것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1992년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 IAEA에 제출한 핵 신고의 내용이 허위라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북한은 IAEA 탈퇴, 미사일 발사 등 초강수를 뒀습니다.

북한 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과 북한은 고위급 회담들을 열었고 이 때 관계개선 문제도 논의했습니다. 이 시기 북한의 벼랑끝 전술에 미국도 한 때 강경대응을 하며 빌 클린턴 행정부 시절 영변의 핵 시설에 대한 폭격 계획까지 세웠던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1994년 지미 카터 전 미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을 만나면서 위기 상황이 진정됐습니다. 또 미-북 고위급 회담의 결과로 1994년 10월에는 제네바 합의로도 알려진 기본합의서가 채택됩니다. 합의서는 북한의 핵 동결과 경수로 지원, 그리고 미-북 연락사무소 설치 등 관계 개선을 주요 내용으로 담고 있습니다.

문: 기본합의서 체결 이후에는 처음으로 미-북 간 관계 정상화가 시도됐지요?

답: 예. 그런데 이같은 관계 진전은 짧은 위기 기간을 거쳐 나타납니다. 기본합의서 이행이 3년 이상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은데다 북한 금창리에 지하 핵 시설이 있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북한은 이에 대해 장거리 미사일 발사로 대응했습니다. 이후 미국은 실효성 있는 대북정책을 모색하게 되고, 윌리엄 페리 대북정책조정관은 '페리 보고서'를 통해 미국이 북한 붕괴론에서 벗어날 것을 제안합니다.

다시 화해의 길에 들어선 미국과 북한은 2000년 미-북 공동코뮤니케를 발표해 적대관계 해소를 천명하고, 북한의 조명록 국방위원회 수석 부위원장이 워싱턴을 방문해 빌 클린턴 대통령을 면담하고, 이어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만나는 등 관계 정상화를 위한 활발한 움직임을 보입니다. 양측의 대화는 당시 클린턴 대통령의 평양 방문 가능성이 제기될 정도로 진전을 이뤘습니다. 하지만 공화당이 주도하는 미 의회가 클린턴 행정부의 대북 포용정책을 견제하고, 또 임기 말을 맞은 클린턴 대통령이 중동평화 문제에 매달리면서 방북은 결국 성사되지 못했습니다.

문: 이후 조지 부시 행정부가 출범하면서, 미-북 관계가 다시 급격히 경색됐지요?

답: 부시 대통령은 취임 1년 뒤인 2002년 1월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같은 달 미 국방부는 의회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핵무기를 사용해 공격할 수 있는 나라에 북한을 포함시켰습니다. 몇 개월 뒤 미국 정부는 제임스 켈리 국무부 차관보를 평양에 보내 북한의 고농축 우라늄 개발 의혹을 추궁했습니다. 미-북 간 신경전이 벌어지는 와중에 우라늄 관련 의혹은 기정사실이 되고 미국은 1차 핵 위기 때 북한과 타결한 기본합의서를 폐기했습니다. 북한은 이에 대응해 핵확산금지조약 NPT를 탈퇴하고 플루토늄 제조에 힘을 쏟았습니다. 이 것이 이른바 제2차 북 핵 위기입니다.

문: 당시 미-북 관계가 또다시 최악으로 치달았는데 어떻게 양측이 다시 대화에 나서게 됐습니까?

답: 한국과 중국, 러시아가 적극 중재해 2003년 8월 베이징에서 미국과 남북한, 중국, 일본, 러시아 등 여섯 나라가 참가하는 제1차 6자회담이 개최됩니다. 그렇지만 미국이나 북한이나 서로 먼저 양보하라며 입장을 굽히지 않았는데요. 2005년 한국 정부가 미국에 북 핵 해법을 제안하고 동의를 얻은 뒤 북한을 적극 설득해 6자회담 참가국들은 비핵화 원칙을 담은 9.19 공동성명을 타결합니다. 하지만 불과 사흘 뒤 미 재무부가 불법 금융 거래를 들어 북한에 대한 금융제재 조치를 취했고, 이후 6자회담은 13개월 간 중단됩니다.

문: 중단 기간 동안 북한은 미사일 시험발사와 핵실험을 강행하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대북 제재결의안을 채택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오히려 이후 대화 국면이 조성됐지요?

답: 그렇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부시 행정부의 태도가 바뀐 점입니다. 부시 행정부는 북 핵 해결에 강한 의지를 보이며 대북 관계 개선과 안전보장 제공, 평화협정 체결 용의를 밝혔습니다.

이후 6자회담도 큰 위기 상황 없이 전개돼 비핵화 초기단계 이행에 대한 2.13 합의, 2단계 조치에 대한 10.3 합의 등이 타결됐습니다. 비핵화 조치들이 처음 예상보다는 오래 걸린 부분도 있지만 북한이 6개월여 늦게 마침내 미국에 핵 신고를 해 2단계가 마무리 됐습니다. 현 시점에서 관심사는 미-북 양국이 얼마나 정치적 의지를 갖고 이번 호기를 잘 활용해 국교 정상화를 달성할 수 있을지 여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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