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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요도호 납치범들 보호 확신하고 북한행


북한은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일본과의 관계정상화 실무그룹 회의에서 일본항공 요도호 납치범 인도에 협조하기로 했습니다. 이연철 기자가 지난 1970년 발생한 일본 적군파의 요도호 납치 사건에 대해 자세한 소식 전해드립니다.

일본의 1960년대는 학생운동의 열기로 뜨거웠습니다. 일본이 본격적인 경제성장 궤도에 진입하던 이 때 낡은 권위주의의 틀에 도전하는 학생운동이 불길처럼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1968년 도쿄대학 강당 점거 사건 이후, 노선 갈등과 과격투쟁으로 국민의 지지를 잃으며 쇠퇴의 길을 걷게 된 일본 학생운동은 소수의 과격 활동으로 치닫게 됩니다.

대표적인 조직이 적군파로, 일체의 기존체제를 파괴한다는 폭력제일주의를 내세운 이들은 일본항공 여객기 요도호를 납치해 북한으로 들어가는 사건으로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1970년 3월31일. 적군파 요원 9명은 도쿄를 떠나 후쿠오카로 향하던 요도호 여객기를 공중 납치했습니다. 당시 요도호에는 승무원 7명과 승객 1백22 명 등 모두 1백29명이 타고 있었습니다. 적군파는 기장을 권총으로 위협해 평양으로 갈 것을 요구했습니다.

후쿠오카 공항에서 일부 인질들을 석방한 적군파는 북한으로 가던 중 한국 김포공항에 비상착륙했습니다.

적군파는 승무원과 승객을 인질로 잡고 북한까지 안전한 비행을 보장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일본의 하시모토 운수상이 사태 수습을 위해 급히 한국을 방문했고, 한국 정부도 적군파 설득에 나섰습니다.

결국 나흘 만인 4월3일, 적군파는 나머지 인질 전원을 석방했습니다. 적군파는 대신 야마무라 신지로 당시 일본 운수성 정무차관을 인질로 잡고 북한으로 떠났습니다.

그 후 북한 미림공항에 도착한 적군파는 북한 당국에 망명을 요청해 그 곳에 눌러 앉았습니다.

워싱턴의 민간연구기관인 우드로 윌슨 센터의 이영종 연구원은 적군파는 북한에 가면 보호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북한으로 갔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 그 당시만 해도 (북한이) 소련이나 중국으로부터 탄탄하게 지원을 받고 있었으니까... 그런 것 때문에 북한으로 갈 수 있다, 안전하다, 이런 것을 확신하고 갈 수 있었던 거죠."

그 후 북한에서 생활하게 된 적군파 가운데 주모자 3명은 사망하고 당시 16살이던 한 명은 1998년 일본에 잠입해 지하활동을 벌이다 체포돼 형기를 마치고 석방됐습니다.

또 다른 한 명은 2000년 6월 태국에서 달러위조 혐의로 체포돼 일본으로 송환돼 재판을 받았습니다.

일본 공안당국은 현재 북한에는 나머지 4명과 일본인 처, 그리고 20여 명의 자녀들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일본 정부는 그동안 요도호 납치범들을 인도해 줄 것을 북한에 꾸준히 요구했지만, 북한 측은 이를 거부해 왔습니다.

또한 미국은 북한이 요도호 납치범들을 보호하고 있는 것을 대북 테러지원국 지정의 이유 중 하나로 꼽았습니다.

이런 가운데, 북한이 국외추방 형식으로 요도호 납치범들을 일본으로 돌려 보낸다면, 이는 일본과 미국 두 나라 모두를 겨냥한 것이라고 우드로 윌슨 센터의 이영종 연구원은 말했습니다.

"북한이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해결해야 될 것이 북-일 관계 정상화고 그걸 통해서 배상금이 들어와야 북한이 생존할 수 있단 말이예요. 그걸 보고 가는 거고, 또한 요도호를 지금 테이블에 올려놓는 것은 미국하고의 테러지원국 해제 그것이 있으니까 이 참에 털고 가기에 좋은 타이밍이라고 본 거죠."

북한이 요도호 납치범 문제에 대한 입장 변화 가능성을 처음 내비친 것은 2002년 7월입니다. 북한은 당시 외무성 대변인의 논평 형식으로 "요도호 관계자들이 귀국 의사를 밝혔다"며, "일본인들이 제 나라 땅으로 돌아가겠다는 데 대해 우리로서는 구태여 막아 나설 필요가 없다"고 밝혔습니다.

북한은 이어 지난 해 9월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열린 북-일 국교정상화 실무그룹 회의를 마친 후에도 요도호 납치범을 인도할 뜻을 내비친 바 있으며, 지난 10일에는 외무성 성명을 통해 테러에 반대하는 입장을 강하게 표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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