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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난민 입국한 탈북자, 투병 중 사망


태국에서 암 투병 중 지난 달 난민 지위를 받아 미국에 입국한 탈북여성 이성애(가명)씨가 지난 7일 사망했습니다. 남편과 어린 아들을 남긴 채 눈을 감은 이 씨의 장례예배가 어제 지역 교회의 후원 속에 워싱턴 남부에 위치한 리치몬드 시에서 열렸습니다. 김영권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남편: (흐느낌. 울음소리)

너무 서러웠습니다.

2년 전 죽음을 무릅쓰고 두만강을 건너 중국, 태국, 그리고 태평양 건너 꿈에 그리던 자유의 땅 미국에 도착했는데. 이제 병도 완쾌하고 새 꿈을 펼칠 수 있을 것이라며 환하게 웃었는데. 사랑스런 아내는 결국 도착 한 달도 채 못 돼 눈을 감았습니다.

아내의 싸늘한 주검 앞에서 흐느끼는 남편 신모세(가명) 씨!

그저 미안한 마음 뿐 입니다.

남편: “나의 아내는 그저 순진한 여성이예요. 가정 주부로서 그저 소박한, 큰 포부가 있거나 그런 여자가 아니었어요.”

관 안에 누운 엄마의 얼굴을 하염 없이 바라보며 손을 놓지 않는 아들 유민이.

아들: 울음소리

초롱초롱한 눈을 가진 이 11살 소년에게 엄마의 죽음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충격입니다.

아들: “엄마가 (임종 전) 제게 아버지말 잘 듣고 공부 잘하라고 그랬어요. 그래서 저도 사랑한다고 엄마에게 말했어요. 그런데 엄마가 정신을 다시 잃었어요.”

30대 중반의 한창 나이였던 이성애씨. 그녀는 지난 2006년 여름 태국에 도착한 직후 자신이 폐암에 걸렸음을 의료진으로부터 통보받았습니다.

국제 난민단체의 도움으로 수술을 받았지만 병은 호전되지 않았고, 간호해 주던 남편 신씨 마저 태국 경찰에 체포돼 이민국 수용소에 수감돼야 했습니다. 그래도 이들 부부는 미국행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남편: “미국이라는게 법치 국가구 자유가 한국보다 더 보장된다는 나라라고 믿고 있어요. 자유를 그리며 북한에서 억눌려 살던 것 다 지워버리고, 진짜 자유세상을 찾아가자. 그런 소망 하나 뿐이었어요.”

자유를 위한 갈망. 그리고 아들만은 좋은 환경에서 키우고 싶다는 소망 때문에 아내 이성애 씨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남편: “미국에 가서, 자유 세상에 가서 열심히 살고 아들이 성공하는 것 보자. 그래서 미국행을 택해서 왔어요.”

그러나 태국에 입국한 지 1년 반이 지나도 미국과 태국 정부는 뚜렷한 응답도, 언제 갈 수 있다는 확신의 말도 주지 않았습니다. 남편 신씨는 ‘미국의 소리’ 방송에 전화까지 시도하며 아내를 살려달라고. 아내를 도와달라고 호소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아내의 암은 척추 등 다른 곳으로 번져갔습니다.

남편: “전화로 매일 통화하면서 숨소리가 그저 쌔~쌔 기관지 폐암이라는게 숨이 나오기 힘들어요. 목에 항상 암이 걸려서. 숨소리 들을 때마다 진짜 내 심장이 찢어지는 것 같구. 밤잠을 못자구.”

이민국 수용소에 수감되면서 아내를 간호해 줄 수 없었던 남편 신씨. 그에게 남은 것은 오직 태국에 와서 믿은 예수를 의지해 기도하는 것 뿐이었습니다.

남편: “진짜 하루에도 오십번 백 번씩 기도했어요. 우리 부인좀 살려달라구. 금식기도를 정말 몇 번을 한줄 몰라요.”

그리고 태국에 도착한 지 1년 10여개월 만인 지난 4월 14일, 신모세 씨 부부와 아들 유민 군은 기적적으로 미국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미국행 비행기 안에서 신씨와 아내 이성애 씨는 병을 고칠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었습니다.

남편 : “미국에 왔으니까 그저 살았구나 그렇게 생각했어요. 미국은 그 어떤 병도 고치는 그런 의학을 갖고 있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고 왔어요.”

뉴욕에서 응급치료를 받고 하룻만에 다시 병원 구급차에 실려 버지니아의 주도 리치몬드까지 내려올 때도 아내 이성애 씨는 반드시 일어서겠다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유신혜 사모: “맨 처음에는 굉장히 받아들이지 못하셨어요. 내가 여기 미국까지 오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데 그리고 내가 나이도 젊고 아이도 어린데, 이렇게 죽을 수 없다. 제발 살려달라! 생에 애착을 갖고 계셨죠.”

리치몬드 MCV 병원에서 만난 한인 수간호사 유신혜씨. 목사의 사모이기도 한 유씨는 큰언니 역할을 하며 2주 동안 지극 정성으로 이성애 씨를 간호했습니다.

유신혜 사모: “미국 음식은 전혀 느끼해서 못 잡수시는데, 제가 갈 때 마다 오늘 저녁에는 만두국을 해 오겠다고 말하면 아침 점심을 먹지 않고 기다리다가 제가 갖고 오면 먹으려고 하는데, 먹으면 속이 안 좋으니까 계속 토하구.”

생에 대한 애착이 강했던 탈북자 이성애 씨. 결국 숨지기 이틀 전 그녀는 냉혹한 현실을 담담히 신앙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유신혜 사모: “하늘나라에 가는 것을 확신한다. 맘이 정말 편안하다. 내 걱정하지 말라. 나는 준비 됐으니까 괜찮다. 남편과 아들이 걱정된다고 얘기하시더라구요.”

임종을 앞둔 몇 시간 전. 이 씨는 잠시 정신을 차렸습니다. 그리고 곁에서 하염 없이 울고 있는 남편을 위로했습니다.

남편: “(흐느끼며) 제가 가슴이 아파서 계속 우니까 (울며) 울지 말라고 천국에 가면 볼 수 있는데 왜 우냐고 (울음)”

울지 말라고. 천국에서 함께 다시 만나 영원히 살자고. 아내 이성애씨는 그렇게 미소를 머금은 채 30대 중반의 한 창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장례예배: (찬송가 소리)

북한에서부터 험란한 길을 걸어왔던 탈북자 이성애 씨. 그러나 그녀가 떠나는 길은 결코 외롭지 않았습니다. 리치몬드의MCV 병원은 진료비 전액을 무료로 해줬고

지역 한인교회 신도들이 지극 정성으로 장례를 도왔으며, 미국 가톨릭난민단체에서 무료 장례식장을 주선해 줬습니다.

이 씨 부부를 뒤에서 조용히 도왔고, 장례예배를 직접 집도한 엠마오감리교회의 어윤호 담임목사는 숨진 이 씨가 가정에 디딤돌을 놓고 평안하게 잠들었다고 말합니다.

어윤호 목사: “태국에서도 돌아 가실수 있었거든요. 그런데 여기 와서 돌아가시므로 주변에 많은 돕는 분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가시게 됐고. 그러니까 이런 것을 보구서 돌아가시도록 하나님께서 인도하시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 가정을 위한 일종의 희생양이 되서 좋은 디딤돌로 새롭게 출발하도록 하는 그런 일이 되지 않았나 싶어요. 지금까지 가정을 도와서 여기까지 오게 했었던 아내의 역할. 어머니의 역할을 다 잘 감당했던 것이었죠.”

이런 지인들의 위로와 사랑 때문인지 장례식을 마친 아들 유민 군의 얼굴은 금세 펴집니다.

아들: “끝가지 아는 노래가 이 것 밖에 없어요. (웃으며) 예수 사랑 하심은 거룩하신 말일세. 그 이름은 약하나…”

태국에서 조금만 더 일찍 미국에 왔었으면 좋으련만. 안타까움을 뒤로 한 채 아내의 관을 떠나며 남편 신씨는 작별 인사를 합니다.

남편: “자기야 시름 놓고 가. 아들은 내가 잘 키울 테니까. 시름 놓고 가. (사이) 앞으로 천국에 가서 아들과 나랑 다 같이 만나서 살 날이 꼭 올 거야. 걱정말구 편안히 가”

이성애 씨의 시신은 9일 화장된 뒤 리치몬드시의 한 납골 공원에 안치되며, 11일 엠마오감리교회에서 추모예배가 열릴 예정입니다.

한편 미국 국무부의 난민 담당 관계자는 8일 ‘미국의 소리’ 방송과의 통화에서, 이성애 씨 사망 소식을 듣지 못했다며, 고인에게 애도를 표한다고 말했습니다.

리치몬드에서 미국의 소리 김영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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