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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품에 안고 살아가는 미국인들


2007년은 한반도 기독교 역사와 전세계 기독교 부흥사에 빼놓을 수 없는 ‘평양 대부흥’이 일어난지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저희 미국의 소리 방송은 ‘평양 대부흥 100주년’을 맞아 어제부터 특집 ‘조선을 사랑하는 블랙마운틴의 미국인들’ 을 보내드리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두번째 순서로 ‘북한을 도우며 살아가는 조선의 친구들’ 편을 보내드립니다. 한국에서 태어나 자랐고 평양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뒤 한반도의 근대화에 기여했던 미국의 은퇴 선교사들과 후손들. 이제 그들이 다시 북한을 돕고 있습니다.

미국 동부 노스캐롤라이나주 블랙 마운틴시. 은퇴노인들이 모여 사는 한 한적한 동네의 주택 앞에 ‘부례문’이란 한글 명패가 선명합니다.

북한과 아프리카 어린이들에게 보낼 모자를 만들기 위해 열심히 재봉틀을 돌리고 있는 84살의 마리엘라 프로보스트 할머니가 이 집의 주인입니다.

“안녕하세요. 나 전라남도 광주가 내 고향입니다. 내 부모는 1910년부터 1957년까지 한국서 선교사 일 했습니다. 나는 1948년 전주예수병원 간호원일 나가러 갔습니다. 결혼한 후 대구로 이사하고 동산병원에서 일했어요. 한국말 많이 잊었지만 사랑은 잊지 않았어요. 늘 한국을 사랑하겠습니다.”

선교사 부모 때문에 조선 전라도에서 자랐고 평양외국인학교 출신이기도 한 마리엘라 할머니. 한국전쟁 때는 미국으로 귀환하지 않고 남한에 남아 간호사로 한국을 도왔습니다. 1960년대 미국으로 돌아온 뒤에는 초기 한국 유학생들을 위한 장학재단을 설립했고, 은퇴 뒤에는 블랙마운틴의 노인들과 함께 ‘조선의 기독교 친구들-Christian Friends of Korea’ 이란 단체에 가입해 북한을 돕고 있습니다.

블랙마운틴에 살고 있는 존 윌슨 박사 남매 역시 ‘조선의 기독교 친구들-CFK’의 회원입니다.

90대의 이 노 남매는 전라도 순천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어린시절 조선인 친구들과 함께 상두꾼들이 상여를 지고 가며 부르는 노래를 따라 부르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어느덧 1백 살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습니다.

윌슨 남매의 아버지는 한국에서 나병 환자의 아버지로 불리는 로버트 윌슨 선교사입니다.

“ 살려주쇼! 살려주쇼!…

거리에서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거지 나병 환자를 도우며 시작된 환자 사역.

로버트 윌슨은 광주에서 조선 최초로 나병 환자 요양소인 애양원을 세웠고 이후 일본정부의 박해로 여수, 소록도로 이동하며 1956년까지 1만명이 넘는 조선인 나병 환자들을 돌봤습니다.

역시 의사인 아들 존 윌슨 박사와 누나 엘리자베스도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애양원에서 환자들을 돌보며 젊음을 불태웠습니다.

이제 백발 노인이 된 윌슨 박사의 눈은 50년 전 남한의 의료 현실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듯한 북한으로 향합니다.

고난의 행군 소식을 들은 1990년대 중반. 존 윌슨 박사는 미국인 친구 의사들에게 연락해 결핵약을 모으고, CFK 친구들과 강냉이(옥수수)와 콩, 시금치씨 등 농사에 필요한 지원품을 사서 북한으로 보냈습니다.

1996년에는 북한 정부의 초청으로 평양외국인학교 졸업생들과 함께 북한에 들어가 비닐하우스 재배 기술을 전수하고 북한 내 의료시설을 둘러 봤습니다. 반세기만에 다시 찾은 평양. 윌슨 박사의 볼에는 그러나 눈물이 흘렀습니다.

전기부족으로 밤에는 암흑천지로 변하는 평양. 유일하게 거대한 조명을 받는 김일성 동상. 지원품 강냉이는 전동기차가 움직이지 않아 도착할 생각을 안하고, 병원은 엑스레이 기계 하나 없을 정도로 열악했습니다.

윌슨 박사에게 한반도는 남북으로 분단된 곳이 아니라 하나의 조선이며, 자신이 태어나 자랐고 친구들과 뛰놀던 모교가 있는 푸근한 집과 같은 곳이었기에 마음이 더욱 아팠습니다.

노스캐롤라니아주 블랙마운틴에 사는 조선 출신 선교사 노인들과 후손들은 대부분 CFK 회원들입니다. 이들의 북한사랑에 물고를 튼 사람은 세계적인 부흥사 빌리 그레엄 목사 부부입니다.

1992년 김일성 주석은 그레엄 목사의 부인 루스 그레엄 씨가 평양외국인학교를 졸업한 인연을 들어 그레엄 부부를 평양에 초청했고, 이들의 이웃이자 한국어를 잘하는 린튼가의 어른 중 한 명인 드와이트 린튼 목사가 통역으로 함께 북한에 들어갔습니다.

린튼 목사는 당시 빌리 그레엄 목사는 한반도 분단 이후 서방세계 지도자로는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했기 때문에 큰 주목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레엄 목사는 김일성 주석의 특별허가로 평양의 한 실내체육관에서 기독교 집회까지 열었습니다.

1994년 그레엄 목사는 다시 김 주석의 초청을 받아 북한을 방문했고 당시 통역을 맡았던 드와이트 린튼 목사의 조카 스테판 린튼 현 유진벨 재단 회장은 두 노인이 마치 오래 사귄 죽마고우처럼 평화롭게 대화를 나눴다고 말합니다.

드와이트 린튼 목사는 김일성 주석이 당시 그레엄 목사와의 대화에서 자신과 기독교와의 인연에 대해 언급했다고 말합니다.

목사인 외삼촌이 교회에 가자고 여러 번 제의했지만 김일성 주석은 낚시를 더 좋아해 교회에 따라가지 않았다고 말했다고 린튼 목사는 전합니다.

김일성 주석의 어머니 강반석 씨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고 외삼촌인 강량욱 씨는 기독교 목사였습니다. 북한은 그러나 반세기가 지난 지금 세계 최악의 기독교 탄압국가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빌리 그레엄 목사의 통역을 계기로 북한의 현실을 보게 된 린튼가 사람들은 1995년 스테판 린튼 회장이 주축이 돼 북한주민을 돕기 위한 인도주의 단체 ‘조선의 기독교 친구들-CFK’ 를 세웁니다. CFK는 현재 의료와 식량, 농기계, 비상구호품, 우물 찾는 기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대북 인도지원 활동을 펴고 있습니다.

창립자인 휴 린튼 선교사의 차남 스테판 린튼 박사는 이후 한국 내 활동을 넓히기 위해 ‘유진벨 재단’ 을 세워 독립했고 CFK는 현재 블랙마운틴에 거주하는 삼남과 사남인 제임스 (54)와 앤디 린튼, 그리고 앤디의 아내인 하이디 린튼 씨가 맡아 운영하고 있습니다.

블랙마운틴 노인들의 조선 사랑을 이제 후손들이 이어받아 계속 돕고 있는 것입니다. 가난했지만 늘 인정이 넘쳤던 조선의 친구들. 블랙마운틴의 노인들은 그런 조선을 외면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평양외국인학교 출신으로 남한에서 의료선교를 했던 91살의 케네스 스콧 박사. 그에게 평양은 예수를 만난 곳이자 자신의 믿음을 뜨겁게 해준 신앙의 고향입니다.

조선 사람들과 선교사 자녀로 조선에서 자란 자신들은 한 가족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마리엘라 할머니!

90대의 윌슨 남매가 애절하게 부르는 조선의 전통 구전가 ‘나비야’ 가 블랙마운틴의 사랑을 싣고 지금도 조선으로 날아가고 있습니다.

특집방송 ‘조선을 사랑하는 블랙마운틴의 미국인들’ 내일은 세번째, 마지막 순서로 4대째 조선 선교를 하며 북한에 인도적 지원을 하고 있는 ‘린튼가의 조선 사랑’에 대해 전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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