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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2월 17일 방송분 - '브라이언씨 이야기'


오늘은 미국에 살고 있는 탈북자들의 삶을 전해 드리는 세번째 순서로 난민 자격으로 미국에 입국한 탈북자 가운데 1호 운전면허증 취득자이자 자가용을 손수 운전해 출퇴근 하고 있는 브라이언씨의 삶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이 곳은 미국의 북부와 남부 문화가 가장 잘 조화돼 있다는 켄터키주의 한 도시! 일식 전문점에서 막내 스시맨으로 일하는 탈북자 브라이언씨가 뿔테 안경위로 구슬땀을 뚝뚝 흘리며 열심히 바닥 청소를 하고 있습니다.

“스시맨이란 것이 손님들 앞에 있으니까..음식물 찌거기가 있으면 냄새 나거든요. 그러니까…약치고 뭐…….”

브라이언씨가 북한이나 중국에서는 전혀 생소했던 스시맨이란 직업을 선택한지 이제 석달째!

“야~ 스쉬 배우면 수입이 짭짤하다고 그러더라구요 (웃으며) 그래서 시작하게 됐죠”

물고기가 그려진 일본식 간이 저고리와 새 하얀 주방모자를 푹 눌러 쓴 브라이언시씨의 단정한 모습에서 전형적인 스시맨의 향기가 느껴집니다.

그러나 상당한 칼 솜씨를 요구하는 스시맨의 일이 겉으로 보이는 것 만큼 쉽지만은 않아 보입니다.

“괜찮아요. 조금 베였어요.”

“몇번 베였어요?”

“한 스무번 베였어요 처음이니까. 좀 긴장도 하구요”

회를 뜨는 예리한 칼날에 손을 베인지도 벌써 스무번째!

실이 꽁꽁 묶여 있는 브라이언씨의 엄지 손가락이 퉁퉁 부어 있습니다.

붕대를 감고 손님 앞에서 생선을 손질 할 수 없고 그렇다고 베인 손 그대로 생선을 만지면 피가 생선에 뭍어 못 쓰기 때문에 응급수단으로 실로 손가락을 묶은 것입니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말이 있던가요? 미국 생활 7개월째! 브라이언씨는 이런 실수의 반복속에 상당히 빨리 새로운 삶에 적응하고 있습니다.

“전 미국에 오자마자 다음날 일을 했거든요. (웃음)”

문: “본인들이 그렇게 요구한 건가요?”

“내 저희가 요구했죠 그냥 부딪혀 보면서 실수도 하면서 할 수 있다 생각한 거죠”

미국에 도착한 다음날 베트남 식당에서 주방 보조일을 시작했던 브라이언씨! 하지만 언어 소통 문제와 출퇴근 거리가 너무 멀어 그 동안 직장을 두번 옮겨 이곳 일식당으로 왔습니다.

석달이 채 안되는 짦은 기간이지만 부단한 노력끝에 이제 왠만한 메뉴는 스스로 요리 할 수 있게 됐습니다.

“조금 뜸한데 그래도 일 잘해요. 여기서 2년 일한 미스터 리 라고 있는데 그 친구보다 잘해요. 빨빨하고 금방 배울 것 같아서..돈 좀 조금만 벌면 가게 차려서 금방 나갈 것 같은데요.”

이 일식점의 사장인 한인 케빈 사씨는 하루가 다르게 솜씨가 늘고 있는 브라이언씨가 참 대견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우선 착실해 보였으니까요. 실제로 착실하구! 이북 사람이니까 나도 좀 도와줘야 겠다는 생각을 했고, 일자리도 있었으니까요. 또 (미국에 온지) 석 달 밖에 안됐다고 하니까 데려다가 미국생활을 가르쳐줘야 겠다는 생각도 했구. 차라리 미국 사람 밑에서 있는 것보다 같은 한국말 하는 사람과 일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에 고용했습니다.”

사장에게 인정도 받고 수입도 조금씩 늘고 있어 보람을 느낀다는 브라이언씨! 오늘은 수십달러의 팁까지 받았다며 무척 행복해합니다. 그러나 오늘에 있기 까지 그의 인생은 참으로 험란했습니다.

“너무나 다르니까 북한 생각하면 막 숨이 막혀요”

함경도 산골 마을 출신인 브라이언씨는 북한에서도 매우 가난한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고난의 행군이 한창이던 1998년! 16살의 어린 나이에 주린 배를 움켜지고 중국으로 탈출한 브라이언씨는 연변의 시골에서 소를 돌보고 공사판에서 막노동일을 하며 힘겨운 청소년기를 보냈습니다.

“노가다판에서도 일한 적이 있었어요. 새벽 4시에 나가면 저녁 7시나 8시에 들어오거든요. 노임은 일당 30원! 한달이면 9백원이예요. 정말 여기 돈으로 따지다보면 (웃으며) 1백불 조금 더 되는거죠.”

어려서부터 힘든일을 겪어서 인지 브라이언씨는 지금도 가끔 자신의 삶이 평생 고생할 팔자 같다며 넋두리를 합니다.

“운이 조금 따랐을 뿐이예요. 저는 평생 고생할 팔자인 것 같아요. (웃으며) 평생 일을 해야될 사람이다! 그런 느낌이 조금 들어요.”

브라이언씨는 그러나 일한 만큼 대가를 받을 수 있다는 지금의 생활이 참으로 기쁘고 감사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이런 생활은 북한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일한시간에 해당하는 보수를 받아요. 그런데 북한은 안그렇잖아요. 자유! 첫째는 자유예요. 너무나 다른 것이 많아서…차이점이 정말 많아요.”

북한의 생활이 너무 악몽같아서일까요?

브라이언씨는 미국과 중국의 생활을 비교하는 자체가 북한에서 자란 자신에겐 둘다 과분하다며 중국에서의 삶도 가치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여기 사람들은 그러더라구요. 미국과 중국중에 어디가 더 낫냐구요. 미국에 와 보지 않은 중국쪽 사람들은 야 그래도 미국이 낫지! 그러잖아요. 근데 제 생각은 안 그래요. (웃으며) 근사(비슷)합니다. 글쎄 돈을 버는데서는 미국이 수입이 많이 남으니까 미국이 낫겠다 하겠지만 그래도 중국 역시 맘껏 일할 수 있잖아요. 자기 일한 만큼 보수를 받을 수 있고. 월급이 좀 싸서 그렇지. 그 것 하나만으로도 북한과 비교해 봤을 때 충분한 것 아닌가…싶어요.”

경제 논리는 중국과 미국이 모두 비슷하다고 말하는 브라이언씨! 그러나 미국에서 난생 처음 만끽하는 자유의 기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거기서는 남들이 신고할까 봐 겁이 많았죠. 여기는 그런 것이 없잖아요. 자유!…”

지난 2005년 가을! 연길에서 앞을 기약할 수 없는 생활을 하던 브라이언씨는 자유롭게 일하고 공부하는 세상을 꿈꾸며 한국행을 결심합니다.

브로커를 통해 찰리씨처럼 대련의 한국국제학교로 들어가 선양주재 한국영사관에 대기하던 브라이언씨!

그러나 대기 기간이 8개월 이상 길어지자 마음속에 조바심이 생겼고 그러던중 텔레비젼을 통해 탈북자들이 미국에 입국하는 장면을 시청하고 행선지를 미국으로 바꿉니다. 그리고 한 밤중에 바로 옆의 미국 영사관으로 다시 탈출을 시도했습니다.

“탈북자들 다들 잘 때였죠. 새벽 3시에…아 그런데 밖에 나오자 마자 (탈북자 지키는 젊은 친구가) 소리치는 거예요. 얼마나 급했는지 아세요. 싹~ 뛰어 내려서 2층으로 뚝뚝뚝 떨어져서 담장까지 3분도 안 걸렸어요. 완전히…(웃으며) 특공대 아시죠?”

문: “다치지 않았나요?”

브라이언: “나와 조여사는 다치지 않고 나머지 두 명은 다리를 다쳤죠. 내 말 안들었죠. 그럴때 일수록 조심조심 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참..”

문: “캄캄해서 그런게 아닌가요?”

브라이언: “캄캄한게 뭐예요. (웃으며) 훤한 달밤 이었는데.”

그리고 두 달여간 미국 영사관에서 머문 끝에

7월 23일 미국 땅에 첫 발을 내디뎠습니다.

“너 앞으로 영어 빨리 배우고 잘 해야해! 죄 짓지 말아야 하구! 넌 역사에 남는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잘해야 돼요. 그리고 북한 사람들이 미국으로 들어 올 수 있게 하는 첫 다리를 놓은 사람이기 때문에 잘해야 돼요.”

사장인 케빈씨는 틈날 때마다 브라이언씨에게 미국 역사에 남을 초기 탈북자가 됐으니 책임이 막중하다며 그에 걸맞게 살아야 한다고 격려합니다.

“난 이북 사람에게 선입관이 있었어요. 왜냐! 이북에는 일을 하든 안하든 배급을 줘었잖아요. 이 사람들이 여기와서 배급을 주니까 뭐 시키는 일만 하지 않을까 우려했는데 이 친구는 조금 다르더군요. 중국에서 일한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자기가 알아서 스스로 일을 많이 하더라구요.”

브라이언씨가 일하는 일식 음식점 주방에는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설거지와 청소를 담당하는 멕시코와 엘살바도르인, 이들을 관리하며 음식 재료 구입을 담당하는 네팔 출신의 밍씨!

이들이 모두 브라이언씨가 미국에서 사귄 친구들입니다.

네팔인 밍씨는 브라이언씨가 북한에서 왔다는 얘기를 듣고 어떻게 그런 무시무시한 나라에서 왔냐며 무척 놀랐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함께 지내다 보니 한국에서 온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고 오히려 더 열심히 하는 모습에 자신이 도전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밍씨는 그러나 브라이언씨가 남한에서 온 사람들과 다른 것이 없었고 열심히 일하고 영어실력도 좋아지고 있다며 그를 만나서 자신도 뿌듯하다고 말합니다

밍씨는 브라이언씨가 매우 부지런하고 영어실력도 조금씩 향상되고 있다고 말하고 그러나 브라이언씨의 짧은 영어 때문에 아직 많은 대화를 가지 못해 아쉽다고 말합니다.

브라이언씨도 영어공부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도 못 알아 듣겠더라구요. 그런데 여기 나와서 보니까 필요한 거예요. 전 중국에서 중국말 배울때에도 혼자 자습을 했거든요. 그 때는 상황이 안되니까 학교를 못 간 거구, 여기서는 당당히 학교 갈 수 있잖아요. 그런데 보니까 학교에서 배우는 영어가 낫겠더라구요. 집에서 혼자 자습한다는 것이 한계가 있어요.”

브라이언씨는 자리가 잡히면 가을부터 학원에 등록해 영어공부를 본격적으로 해 볼 생각이라고 말합니다. 북한에서부터 독서를 좋아했다는 브라이언씨! 그러나 어려운 가정형편과 신분때문에 상급 학교 진학은 꿈도 궈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기자를 처음 만나자 마자 미국의 이민제도와 교육에 관한 질문 공세를 했습니다.

“불체자들에 대한 입법 개정이 발표된다고 하던데 그 것은 어떻게 됐나요? 또….”

이런 적극적 자세와 실패를 두려워 하지 않고 계속 도전한 보람의 열매일까요?

브라이언씨는 얼마 전 운전면허를 취득했습니다.

“좋죠 (웃으며) 막 소리 질렀는데요. 제가 면허증 보여드려요?”

운전면허증 얘기가 나오자 얼굴이 환해지며 지갑에서 면허증을 꺼내 자랑하는 브라이언씨! 미국에서 본인의 노력으로 취득한 첫 자격증인만큼 감회가 남다르다고 말합니다.

“(어려움은) 없었어요. 많은 준비를 하려고 했는데 일 때문에 많이 준비를 못했어요. 그런데 다행이 그날 운이 좋았던것 같아요. 송 박사님과 목사님들이 자원해서 저의 운전 연습을 도와줬어요.”

탈북자 본인의 노력과 지역 한인들의 도움이 뭉쳐져 작은 열매가 맺힌 것입니다. 브라이언씨에게 운전을 가르쳐 준 한 한인 목사는 운전면허 취득 기념으로 중고 자동차까지 선물했습니다.

“어느날 갑자가 그냥 (차를) 가지래요. 15만 마일 정도 됐는데 잘만 관리하면 1~2년 정도는 더 탈 수 있을 것 같아요.”

일한 만큼 열매를 맺어가는 기쁨도 있지만 젊은 나이인 만큼 외국 생활에서 느끼는 외로움도 적지 않겠죠.

여자 친구를 사귀어 보고 싶지않냐는 기자의 질문에 브라이언씨는 “왜 데이트 비용을 남자가 내야 하냐”고 반문합니다. 돈을 벌어야 여자친구도 사귈 수 있지 않냐는 말을 둘러서 얘기하는 것입니다.

“남녀 간에 데이트를 하면 무조건 남자가 써야 한다는 것은 없잖아요. 사실 그건 좀 (크게 웃으며)

찰리: (웃으며) 불공평한 거 아닌가 하하하

기자: “그럼 여자친구 사귀기가 아마 쉽지 않겠죠”

브라이언: “사실 그렇기 때문에 여자친구를 못 사귀는 것이죠. 돈이 없기 때문에”

광일씨는 그러나 능력은 있지만 우선 돈을 벌고 정착하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에 자중하는 것이라며 자신감을 보입니다.

“근데 실제로 껄찍한 능력은 속 안에 있죠. 겉으로만 보이는 것이 아니고 (웃으며) 그러니까 그 것은 제가 여기서 안 말하겠습니다. 하하하.”

기자: “ 껄찌가 무슨 말이죠?”

챨리: (옆에서 끼어들며) 그러니까 얼마든지 능력은 있는데 자중한다! 이런 말이죠 하하”

브라이언씨의 말을 옆에서 설명해주는 찰리씨!

이렇게 브라이언씨와 찰리씨는 한 아파트에 형제처럼 함께 지내며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삽니다. .

“첫 월급을 받았을 때! 많이는 못 받았어요. (초보자 였기 때문에) 한달에 8백불 벌었어요.”

브라이언씨는 미국에 와서 첫 월급을 받았을 때 느꼈던 희열과 감사! 그 순수한 마음과 열정을 끝까지 간직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운전면허증을 취득한 것은 이제 시작일뿐! 브라이언씨가 개척의 땅 미국에서 얼마나 많은 꿈들을 일구어 가며 열매들을 맺을지 귀추가 주목됩니다.

켄터키주에서 VOA 뉴스 김영권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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