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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 정정기씨 수기 II [탈북자 통신 김기혁]


북한에서는 지난 90년대 중반 극심한 식량난으로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는 비참한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이 시간에는 어제에 이어 두번째로 당시 열살의 어린 나이에 식량을 찾아 구걸을 해야 했던 탈북자 정정기 씨의 사연을 전해드립니다. 정 씨는 현재 남한에 정착해 새 삶을 살고 있습니다. 서울에서 김기혁 탈북자 통신원이 전합니다.

정정기 씨(21세, 2003년 입국)는 99년에 무작정 집을 나섰지만 먹고 살길이 막막했습니다. 한달간 혼자 떠돌던 중 같은 처지에 있는 한 여자 아이를 만나게 됩니다.

[정정기] “저 같은 애를 하나 만났는데 여자였어요. 저보다 2년 밑의 동생이었는데 걔는 (집에서) 나온지 3년 정도 됐으니까 어떤 식으로 먹고 사는지도 알고 있거든요. 걔 따라다니면서 조금씩 배우다가 그 다음에...”

정기 씨는 그 아이를 통해 남의 집을 다니면서 얻어먹는 요령 등 꽃제비로 살아가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정기 씨는 어떻게든 배를 채우면 잠은 아무 곳에서나 잤습니다. 겨울에도 아파트 복도에서 자기도 했고 이불이나 비닐을 구해 산속에서 잠을 자기도 했습니다.

[정정기] “겨울에는 그냥 아파트 높은 층 같은데 올라가게 되면 뜨스해요. 찬 공기가 잘 안 들어오니까 복도에서도 자고. 겨울에 산에 같은 데에서 잘 때 있거든요. 그 때는 가랑잎 같은 것을 쫙 깔고서, 거기서 이불 같은 걸 하나 사요. 시장 같은 데에서 이불 싼 걸로 하나 사서 그런 걸 덮고 자고 또 (비닐)박막 같은 걸 덮고 자고...”

정기 씨는 그렇게 6개월 동안 떠돌다가 유원지가 있는 평양 대성산으로 가 구걸도 하고 땅에 떨어진 먹을 것을 주워먹기도 하면서 생활을 하던 중 소매치기를 하는 꽃제비 집단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은 정기 씨에게 도둑질을 배워주겠다고 하면서 자기들을 따라 다니라고 제안했다고 합니다.

[정정기] “처음에는 나는 도둑질 할 줄도 모르고 하고 싶은 마음도 없기 때문에 안했다고 했는데 어떻게, 자연히 그 생활하다보니까 먹고 내가 살려면 그런 거라도 해야되기 때문에 같이 다니면서 배우고 그러면서...”

당시 14살이었던 정기 씨는 살기 위해서는 도둑질이라도 해야 됐었다고 토로했습니다.

[정정기] “남의 것 훔치지 않으면 얻어 먹는 빌어 먹든 해야 되는데 또 얻어 먹고 빌어 먹고 하려는 건 사람들이 잘 안주려고 하거든요. (살기 힘드니까). 예 잘 안주려고 하니까 그 방법밖에 없으니까 도둑질 하는 게 살길이고.”

이렇게 소매치기 집단에 들어갔지만 처음에는 몹시 망설였습니다. 죄책감과 소매치기를 하다 잡힐 경우 어떤 처벌을 받을 지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두려움과 망설임 끝에 처음으로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쳤다는 정기씨.

[정정기] “제일 처음으로 10원짜리 한 장을 훔쳐봤어요. 제일 처음 도둑질 해본게. 북한 돈 10원이면 빵 두 개 값이거든요.”

한번 성공을 하자 묘한 자부심이 생겼습니다. 그때부턴 죄책감도 사라지고 대범해 졌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정기 씨는 집이 그리워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집도 국가 소유인 북한이라 가족들이 없는 집에는 이미 다른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정기 씨는 그냥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99년부터 꽃제비 생활을 시작하면서 평양뿐만 아니라 지방까지 떠돌아 다녔던 정기씨는 안전부의 단속에 걸려 꽃제비 수용시설인 일명 ‘9.27 수용소’에 빈번하게 수감되었습니다. 이 수용소는 1998년 9월 27일 김정일이 “먹을 것을 찾아다니며 유랑 걸식하는 어린이들을 부모가 있는 집으로 돌려보내거나 고아원에 수용하라”는 지시를 내려 생겨난 수용소로 알려져 있는데 수감 기간은 보통 1-2개월입니다. 거주지역 보안원이 신병을 인수하러 오지 않을 경우에는 6개월간 수감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유롭게 떠돌아다니던 아이들은 수용소 생활을 답답하게 여겨 처벌과 위험이 따르지만 탈출을 빈번히 시도합니다. 정기 씨도 2001년 평양 대성구역에 있는 ‘9.27수용소’에서 탈출을 시도한 바 있는데 붙잡혀서 나무 막대로(가로, 세로 5cm) 심하게 맞았습니다.

[정정기] “제 나이가 몇 살이냐고 물어 보거든요. 그때 16살이면, 16살이라고 말하게 되면 도망친 숫자를 곱해서 곱한 숫자만큼 때리거든요. 때릴 때 ‘아’하는 그런 소리를 조금이라도 내게 되면 10대씩 불어나고 그래서 그때 500대 남아 맞았어요.”

식량 사정도 좋은 편은 아닌데 평양의 경우에는 통강냉이 불린 것이나 통밀, 국수 등으로 하루 세끼를 배급했습니다. 국은 나오지만 반찬은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수감된 아이들이 꽃제비로 떠돌았기 때문에 이미 밖에서 영양실조에 걸려 들어온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이들은 영양보충을 잘 해야 하지만 배급되는 음식 외에는 먹을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이 때문에 북한의 식량난이 채 풀리지 않았던 99년도 평양 형제산구역 간리 9.27수용소에서는 영양실조로 사망한 아이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아이들의 시체는 다른 아이들이 운반해 시체실에 넣어야 했습니다.

[정정기] “시체, 거짓말 안하고 한 이틀에 한 번씩 그렇게 나르고.”

그나마 평양의 경우에는 배급이 잘 나온 편이었지만 지방의 9.27 수용소 사정은 열악했습니다. 정기 씨는 99년 함흥 9.27수용소에 수감된 바 있는데 몇 끼를 굶길 때도 있었고 하루에 한 끼를 겨우 줄 때도 있었다고 합니다. 배급되는 음식도 통강냉이를 주거나 어떤 때는 국만을 주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탈출을 막기 때문에 안에 갖혀서 영양실조로 사망한 아이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정기 씨는 친구로 삼았던 아이가 다음날 죽어 있었다고 담담히 말했습니다.

지금까지 서울에서 보내드린 탈북자 통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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