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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전 북한 근로자 수천명 러시아 벌목장에서 탈출 [탈북자 통신: 강혁]


북한이 해외 외화벌이의 한 수단으로 러시아에 설치한 벌목작업장에서 지금부터 10년전 수천명의 북한 근로자들의 대규모 탈출사건이 있었던것으로 뒤늦게 밝혀졌다는 소식을 서울에 있는 [강혁] 탈북자 통신원이 그들가운데 현재 한국에 입국해 살고 있는 두명의 전직 벌목공등을 만나 다음과 같이 전해왔습니다. 당시 러시아 벌목작업장에는 약 2만명의 북한인들이 나가있었고 현재는 그 수가 많이 줄어든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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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초, 북한 당국이 외화벌이를 목적으로 러시아 현지에 설치한 벌목전문 기업소인 연합기업소(총 2개, 규모는 96년 당시 1연합에 약 7개 사업소, 2연합에 약 6개 사업소가 있었고 한 사업소에는 대략 200-300명의 노동자고 있었다고 함. 총 2만여 명 정도) 소속 북한 노동자들이 숙소를 대거 이탈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95년에 러시아에 파견된 이른바 재소출신 탈북자 이태학(가명, 2004년 입국), 장영준(가명, 1997년 입국)씨에 따르면 한 사업소에 70여명만이 남아 있고 모두 탈출할 정도의 대규모 탈출 사건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수천명이 탈출을 했다”고 당시를 떠올렸습니다. 가족들을 위해 러시아에까지 나간 북한 노동자들이 탈출을 감행한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잘 알려졌다시피 북한에서 외국에 나가는 건 매우 힘든 일입니다.

특히 일반 주민들은 평생을 가도 외부세계를 보기 힘들고 혹시 기회가 주어진다 해도 그 절차나 조건이 매우 까다롭습니다. 러시아에 벌목노동자로 파견되는 것도 매우 까다로운 절차와 검증이 끝난 후에야 가능합니다. 장영준 씨의 설명을 들어보겠습니다.

[장연준]

“대체로 거기(러시아) 오기가 굉장히 힘들어요. 그쪽에서 외국에 나간다 그래가지고 이제 절차가 여러 가지, 한 7-8개 단계를 거쳐 가지고 그쪽에서 모범적인 사람이다 이래가지고 선발을 해가지고 뽑지요.”

가족의 기대, 이웃들의 부러움을 안고 3년 계약으로 독신으로 러시아에 파견되는 북한 남성들, 3년간 가족들의 얼굴을 볼 수 없는 외로운 생활이지만 돈을 벌어 가족을 도울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은 채 러시아로 떠나갑니다. 하지만 그들의 기대는 러시아 사업소에 도착하면 이내 실망으로 바뀌고 만다고 합니다. 러시아에 도착하면 우선 사업소별로 배치가 되는데 사업소 안에서는 중대와 소대로 사람을 묶어 군대식으로 집체생활을 해야 합니다.

북한에서보단 강도는 약하지만 생활총화와 학습이 진행되고 보위부의 감시망도 항상 가동됩니다. 아침 6시부터 저녁까지 노동을 하지만 지급되는 식량은 형편 없습니다. 쌀이 배급되지만 허기나 겨우 면할 정도이고, 반찬은 염장무와 미역이 전부라고 합니다. 간혹 명태 같은 부식물이 들어오기는 하지만 극히 드물기도 하고 그 양도 적습니다.

이태학 씨는 “재소 들어오면 미역을 3천미터 먹어야 집에 갈 수 있다는 말이 있다”면서 “다른 부식물이 없기 때문에 그 만큼 미역을 많이 먹는다”고 쓴 웃음을 지었습니다. 이태학, 장영준 씨는 열악한 환경속에서도 열심히 일했다고 합니다. 일을 한만큼 북한에 남아 있는 가족들에게 그만큼 돈을 보낼 수 있다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1년 동안 월급을 현금으로 손에 쥐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이야기 합니다.

매월 월급날에는 장부에만 월급이 기록되었고 북한에 있는 가족들에게는 월급 액수가 적힌 쪽지, 이른바 예매권(예매돈)이 지급된다고 통보를 받았습니다. 두 사람은 비록 예매권이 재소상점에서만 사용될 수 있는 것이지만 국가에서 공인한 것이기 때문에 이 예매권이 휴지조각이 될 지는 꿈에도 생각을 못했습니다.

[이태학]

“근데 그때 당시에는 재소상점에 물건이 하나도 없었어요. 돈을 아무리 벌어도 종이장이나 같은 거예요. 살 수도 없고 그니까 그 돈이 하등 필요없으니까, 그때 당시에는 다 같이 현실적으로 달러벌이를 하자, 달러는 조선에 가 쓰지만은 거기서는 종이돈은 못 쓰니까, 돈 한푼이라도 벌자, 하는 게 달러 벌기운동 하자해서 몽따 사업소에서 다 달아 났거든요.”

이태학 씨는 ‘가족들이 통강냉이라도 먹을 수 있으면 사업소에서 어떻게든 버티겠지만 쓰지도 못할 돈을 벌며 남아 있을 수‘ 없었고 가족을 위해서도 탈출할 수밖에 없었다’고 당시 심정을 전했습니다.

[이태학]

“그러니까 가족을 위해서 뛴 거지요. 가족을 위해서 돈 벌어가지고 빨리가자고 했지요 원래. 그 안에서 암만 벌어봤자, 거기서 1년 버는 것 한달(1년 동안 북한돈 220원, 100달러 조금 넘는 돈을 월급으로 받았다고 한다)이면 벌 수 있거든요 나가면, 그러니까 어떻게나 나가서 돈 벌어가지고 집에가지고 그래서 나간거지, 첫째 가족을 위해서 나간 거지요.”

남편을 러시아로 떠나보낸 채 북한에서 생계를 꾸려갔던 장영준 씨의 처 김원숙(가명, 2004년 입국) 씨를 통해 당시 북한에 남아 있던 가족들의 심정을 짐작해 볼 수 있었습니다. 김 씨는 95년 말 재소상점에 갔다가 빈 손으로 돌아와야 했다고 이야기 합니다.

[김원숙]

“예매권 돈을 우선 가지면 돈을 가지면, 돈이라는 게 예매돈이라는 것도 그것도 돈이니까 상품을 가져야 그것도 유통해서 가족들이 살겠는데 전혀 그런 것 주니 않으니까 그 돈이 전혀 필요도 없는 거지요 뭐, 암만 몇 백만 원을 번다한들 종이장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저 남편들한테 편지를 Tm는 거예요.”

아내의 편지를 받은 장영준 씨는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장영준]

“그 배신감이라는 건 말할 수 없지요. 그 어떻게 일하고 어떻게 번 돈인데 글쎄 그걸 그렇게 글쎄, 말도 못하지요 그게.”

김원숙 씨는 북한엔 남편을 러시아로 떠나 보내고 홀로된 여자들이 많았다면서 자신뿐만 아니라 많은 여성들이 사용할 수 없는 예매권을 가지고 왔다 힘없이 돌아서는 것을 목격했다고 말했습니다. 김 씨는 북한은 사상적으로 무장된 나라이기 때문에 겉으로 표현은 못했지만 마음 속으론 “일을 해도 보수를 주지 않는 이 나라의 정책이 잘못됐다”는 반발심이 생겨났고, 재소상점을 찾았던 많은 여성들의 얼굴에서 그런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김원숙]

“내 마음 상 참 이건 안됐다. 사람은 어디까지나 보수를 바라고 일하는 것만 당연한데 아니 사람이 일해서 보수를 받았는데 그 가족이 보수를 받아서 살아야 되는데 전혀 그것이 없는데, 이 나라 정책이 잘못됐다거란 말입니다. 내 생각을 그렇게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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