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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서 뽑아낸 총알 저격범 가족에 보낸 앤드류 잭슨 대통령



앤드류 잭슨은 1829년에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그는 유권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았지만 그 자신이 1832년의 선거에서 재선을 원하는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는 나이가 들었고 건강문제로 고통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유권자들에게 자신의 정책에 대한 지지를 나타낼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었습니다.

잭슨 대통령은 자신의 생각에 부통령이 되었다가 대통령을 인계받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마틴 밴뷰렌(MARTIN VAN BUREN)에게 이러한 계획을 말했습니다. 그는 밴뷰렌이 아직 국무 장관으로 있던 1830년에 이 같이 제의하였습니다. 밴뷰렌은 그의 제의를 고마워는 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밴뷰렌은 그 제의는 정치적으로 위험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비밀리에 대통령의 지위에 올랐다는 말을 듣기 원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잭슨 대통령은 그의 생각을 포기하지 않고 일년이 넘는 기간동안 밴 뷰렌이 그의 제안을 받아드리기를 요청했습니다. 밴뷰렌은 계속해서 거절했습니다. 그는 결국 1832년, 부통령이 되는데 동의 했지만 국민에 의해 당선된 대통령이 아니라면 대통령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선거날이 가까워 질수록 잭슨의 건강은 좋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다음 임기에도 일을 할 생각을 하게되었습니다. 그의 팔에서 총알을 빼내는 수술은 이러한 생각을 강화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20년전의 한 권총결투에서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 상처로 어느때엔 팔을 쓸 수 없어 그에게는 큰 고통이었습니다. 의사들은 총알을 빼낼 수 없을 것이라고 했고 잭슨의 심장에까지 충격을 줄 수 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선거의 해 초에, 한 의사는 총알이 잭슨 대통령의 온몸에 독을 번지게하고 있다며, 총알을 빼 낼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잭슨은 의사에게 총알을 한번에 빼내어주길 부탁했습니다. 수술은 몇분만에 끝났습니다. 잭슨의 건강은 빠른속도로 매우 좋아졌습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잭슨은 그 총알을 그를 쏘았던 사람의 가족에게 전달했지만 가족 중 한명이 이것을 거절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 가족은 잭슨이 20년동안 그 총알을 가지고 있었고 법적으로 그 총알은 잭슨에게 소유권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누군가가 20년이 아니라 19년이라고 말하자, “그렇다면 괜찮소 . 잭슨이 이제껏 잘 가지고 있어 줬으니 1년은 문제삼지 않겠오.” 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1832년도의 대통령선거 운동은 치열했습니다. 잭슨 대통령은 역시 민주당 후보였으며, 헨리 클레이는 공화당 후보였습니다. 클레이는 미 정부 은행의 총재인 니콜라스 비들의 후원을 받고 있었으며, 미 전역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신문의 지지를 받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대부분이 은행에 빚을 지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재산가들도 클레이를 지지했습니다. 농부들과 노동자들은 잭슨을 지지했으며, 퍼레이드와 규모가 크고 요란한 집회를 개최하므로서 그에대한 지지를 표현했습니다.

선거 당일, 사람들은 잭슨이 아직 그들의 대통령이라는 것을 나타냈습니다. 잭슨과 클레이의 선거는 4년전 있었던 유명한 잭슨과 죤 퀸시 애담스의 선거에서보다 훨씬 더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개표가 되자 클레이 지지자중 한명은 이 뉴스는 우리에게 거대한 폭풍이 지나가는 것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잭슨은 유권자 68만 8천명의 지지를 얻었고 클레이는 47만 3천명의 지지를 얻었습니다. 선거인단에서는 잭슨이 클레이보다 네배많은 숫자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잭슨의 부통령은 마틴 밴 뷰렌이 되었습니다.

앤드류 잭슨은 자신의 재선을 미 국민들이 그의 정책을 인정하는 징표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에는 미 합중국 은행의 인가가 끝나는 1836년에 은행을 닫는다는 계획도 포함이 되어있었습니다. 잭슨은 그의 두번째 임기중에 은행의 경제권을 줄이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정부자금을 합중국 은행에 넣는것을 중지했습니다. 그 대신 돈을 주 은행에 넣었습니다. 이로써 미 정부 은행이 쓸 수 있었던 상당히 많은 액수의 돈이 줄었습니다.

그러나 이 계획이 보기보다 쉬운것은 아니었습니다. 합중국 은행의 인가에는 재무장관이 다른 곳에 돈을 넣으라는 지시가 있을때를 제외하고는 정부 자금을 합중국 은행에 넣어두어야 한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그 당시 재무부 장관은 그 은행과 매우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그가 그런 지시를 할 리가 없었습니다. 잭슨은 그를 해임하고 자신을 지지할 수 있는 사람을 다시 임명하려고 했지만 재무부 장관은 권력이 강한 정치가였습니다. 잭슨은 그를 해임할 수 없었고 다른 방법을 찾아야만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내각을 다시 재구성하기로 했습니다.

잭슨은 국무장관을 프랑스 장관으로 전보하고 재무장관을 국무장관으로 이동시켰습니다. 그리고 그는 새로운 사람을 재무 장관으로 임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판단이었습니다. 새로운 재무장관은 1833년 10월 1일 이후, 바로 모든 정부 자금을 23개 주의 은행에 넣도록 지시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미 정부 은행에 이미 들어가 있는 정부자금을 빼내지 않았습니다. 그 돈은 다 없어질때까지 정부지출용으로 쓸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연방 은행 총재인 니콜라스 비들은 그에 대항했습니다. 그는 다른 모든 은행이 빌린돈을 갚도록 지시했습니다.

이러한 조치들은 미국 전역에 심각한 경제 문제를 야기시켰습니다. 많은 사업들이 망했습니다. 그들은 빌린 돈을 갚지 못하거나 필요한 돈을 빌려야했습니다. 사업들이 망하면서 직원들은 일자리를 잃게됐습니다. 니콜라스 비들은 잭슨 행정부가 이 모든 문제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은행이 매우 엄격한 법령에 따르도록 강요 받았으며, 그것은 망하고 있는 정부의 돈이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행정부에 항의를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잭슨 대통령의 은행 정책에 대한 비판가들은 그를 “ 앤드류 왕 1세”라고 불렀습니다.

사업가 단체가 백악관의 대통령을 찾아갔습니다. 그들을 대통령에게 정부의 돈을 다시 연방 은행에 넣으라고 요청했습니다. 대통령의 행동은 몇몇 그의 지지자들조차 걱정되는 것이었습니다. 미 정부 은행을 닫는것은 장기적으로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도 있었습니다. 의회의 몇몇 지지자들이 대통령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와싱턴에서 시위를 하려고 군중이 모여들고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그들은 군중이 의회가 정부자금을 은행으로 되돌려 넣을때까지 의사당을 점거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잭슨은 “ 여러분, 군중이 의사당을 장악하는 것, 좋습니다. 나는 그 주동자들을 교수대에 높이 매달 것입니다. 의회를 완력으로 움직이려는 시도는 어떠한 경우라도 영원이 사라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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