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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만명의 사상자낸 미-영 전쟁, 미국인들의 단결심 고취


1814년12월 말 미합중국과 영국은 양국간의 전쟁을 종결키 위해 평화조약에 서명했습니다. 평화조약은 성탄절 하루 전, 벨기에 겐트(GHENT)에서 체결됐습니다. 이 소식이 워싱턴 까지 전해지는데는 여러 주가 소요됐습니다. 따라서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통신 수단이 빨랐더라면 발생하지 않았을 두 가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 중 하나가 뉴올리언즈(NEW ORLEANS) 전투입니다.

영국군대는 겐트의 평화조약이 진행되고 있을 무렵에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미군 사령관 앤드류 잭슨(ANDREW JACKSON)장군은 철저한 방어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영국군과의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평화조약이 체결된 뒤였기 때문에 이 전투는 사실상 불필요한 전쟁이었습니다.

다른 하나의 사건은 코네티컷주 하트포드(HARTFORD, CONNECTICUT)에서 열린 뉴잉글랜드 연방당원들의 특별 회의였습니다. 이 회의는 12월 중순에 시작돼 1월초까지 계속됐습니다. 대부분의 대표들은 매사추세츠주, 로드 아일랜드 주, 그리고 코네티컷주로부터 참석했습니다. 그리고 뉴햄프셔와 버몬트에서 참석한 대표들도 있었습니다.

연방당원들은 영국과의 전쟁을 반대하기 위해 회의를 열었습니다. 다수의 연방당원들은 처음부터 이 전쟁을 반대했었습니다. 주 정부들은 군인들을 중앙정부 군대 산하로 보내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연방당쪽으로 기울어진 은행들은 워싱턴 정부에 대한 대출을 거부했습니다. 전쟁이 처음 시작됐을 때 뉴잉글랜드 지역의 많은 사업가들은 영국과 거래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행동들은 다른 지역의 국민들로 하여금 연방당원들에 대한 적개심을 갖도록 했습니다. 그 결과, 연방당 극단론자들은 뉴잉글랜드 주들을 연방에서 탈퇴시키자는 의견을 내놓기 시작했습니다.

하트포드 특별회의는 뉴잉글랜드 주 대표들로 하여금 독립된 정부를 수립하자는 제안을 내놓게 할 위험이 있었습니다. 국가가 영국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때에 그같은 제안이 나온다는 것은 장차 미국의 운명에 커다란 위협이 될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하트포드에 모인 대표들은 전쟁을 반대하기 위한 목적 뿐만 아니라 미합중국 헌법을 수정하려는 목적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뉴잉글랜드주들의 이익을 보호해주도록 헌법수정을 원했습니다. 서부 영토에 새로운 주들이 생겨나면서 뉴 잉글랜드 주들은 위협을 느꼈습니다. 신생 주들이 뉴잉글랜드의 권력을 약화시킬 것을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티모시 픽커링(TIMOTHY PICKERING)이 주도하는 더욱 극단적인 연방당원들은 영국이 뉴올리언즈를 점령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서부 신생 주들의 생산품을 시장으로 수송하는데 필요한 미시시피 강의 지배권을 영국이 갖게 될 수도 있었습니다.

피커링은 다음과 같이 편지에 썼습니다. “영국이 전쟁에서 이길 것이라는데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만일 영국이 뉴올리언스에서 승리를 거두면, 저는 연합이 둘로 나누어질 것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다음 국회에는 서부에서 단 한명의 의원도 나올 것으로 기대하지 않습니다.”

특별회의에 참석한 모든 대표자들이 피커링과 같은 극단론자는 아니었습니다. 대부분의 참석자들은 온건파 였습니다. 그들은 연방의 분열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들은 단지 뉴잉글랜드주의 이익을 보호하기만을 원했습니다. 온건파 연방당원들은 비밀회의를 가짐으로써 극단적인 제안들이 나오는 것을 미리 방지했습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뉴잉글랜드 지방 공화당원들의 힘때문이었습니다. 연방당원들이 뉴잉글랜드 주들을 장악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것은 과반수가 겨우 넘는 수에 의존한 것이었습니다. 뉴잉글랜드 주들이 연방으로부터 탈퇴하려 한다면 분명 폭력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1월 5일, 하트포드에서 연방당 지도자들은 공식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그들은 전쟁과 매디슨 대통령을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중앙정부에서 탈퇴할 이유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또 그들은 뉴잉글랜드의 문제들은 전쟁과 워싱턴의 공화당 정부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연방당원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헌법의 수정내용들을 나열했습니다.

이들은 노예제도가 허용되는 남부의 지역구 의원 수를 줄일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들은 또 국회의 3분의 2 이상의 지지를 얻는 신생 주들만 연방에 가입할 것을 원했습니다. 이들은 무역에 개입하는 중앙정부의 권한을 줄일것을 바랬습니다. 연방당원들은 또 대통령 임기를 4년 단임으로 제한하기를 바랬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미합중국에서 출생한 남성만이 정부 관리로 일할 수 있기를 원했습니다. 연방당원 중 3명이 이러한 건의사항들을 워싱턴에 있는 매디슨 대통령에게 전달키 위해 선발됐습니다. 이들 대표가 도착했을 때, 워싱턴 중앙 정부는 겐트 평화조약 체결 소식을 접했습니다. 전쟁은 이미 끝난 것이었습니다.

3명의 연방당원들은 매디슨 대통령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짧게 대화를 나눴을 뿐 하트포드 특별회의에서의 요구사항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연방당은 평화로 인해 매우 난처한 입장에 처했습니다. 연방당 지도자들은 오랫동안 전쟁을 비판해왔으며 영국을 패배 시키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적과 거래를 하고 있었습니다. 몇 사람은 아예 모국에 대해 등을 돌리고 영국과 협력하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또 연합을 분리시키려는 위협도 가했습니다. 전쟁이 어떻게 끝날 것인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던 때에는 연방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자 이러한 지지자들은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연방당은 세력의 본고장인 뉴잉글랜드에서 마져도 곧 자취를 감췄습니다.

미국 상원은 신속히 영국과의 평화조약을 승인했습니다. 1815년 2월 17일에는 매디슨 대통령이 정식으로 전쟁이 종식됐음을 선포했습니다. 이 전쟁은 2년 8개월에 걸친 것 이었습니다. 미국은 사망, 부상 또는 포로등으로 3만명의 전쟁 피해자를 냈습니다. 그러나 전쟁은 미국인들을 단결시켰습니다.

매디슨의 재무장관으로 겐트의 협상자중 한명이었던 알버트 갈라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쟁은 국가적 의식과 혁명에서 내세웠던, 그러나 점점 약해지고 있던 헌장의 정신을 회복시키고 재생시켰습니다. 이제 국민들은 자긍심과 정치적 의견을 가지면서 더욱 보편적인 애착심을 갖게 됐습니다. 그들은 이제 훨씬 더 미국인답습니다. 그들의 느낌과 행동은 이제 훨씬 더 일체감을 갖게됐습니다.”

이해 7월 4일에는 39번째 독립기념일을 맞았습니다. 워싱턴에서는 “성조기여 영원 하라”를 쓴 프란시스 스캇 키가 기념행사에서 연설을 했습니다.

“나의 동포여, 우리는 우리뿐만 아니라 다른 동족도 함께 신뢰할 수 있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유의 불입니다. 만약 이것이 꺼진다면 우리의 어두워진 땅은 민족 위에 슬픈 그림자를 드리울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살아있다면 그 불꽃은 온 세계를 밝히고 기쁘게 할 것입니다.”

매디슨 대통령은 1812년 전쟁이 시작됐을때 재선에 성공해 두번째 임기를 시작했습니다. 다음 대선은 1816년이었습니다. 매디슨은 워싱턴으로부터 시작해 제퍼슨에 이어 8년으로 임기를 끝낸 전통을 이어갔습니다.

상하원의 공화당원들은 3월15일 정 부통령 후보자를 선출했습니다. 3명의 공화당원들이 대통령 당선을 희망했습니다. 이들은 국무장관 제임스 먼로(JAMES MONROE), 전 상원의원이자 전쟁장관 윌리엄 크로퍼드(WILLIAM CRAWFORD) 그리고 뉴욕 주지사 대니얼 톰킨스(DANIEL TOMPKINS)였습니다. 먼로는 65표를 얻었습니다. 54명은 크로퍼드를 지지했습니다.

먼로가 대통령 후보자로 선정되면서 공화당은 주지사 톰킨스를 부통령 후보로 선택했습니다. 연방 당원들은 대통령 후보를 선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뉴잉글랜드 지역 3개 주의 유권자들은 뉴욕 연방당원 루푸스 킹(RUFUS KING)을 지지하기로 약속했습니다. 1816년 선거에는19개의 주가 투표에 참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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