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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군에 인질로 잡힌 프란시스 키, 포화속 성조기여 영원하라 가사 작성


1814년 워싱턴을 공격한 영국군은 국회의사당, 백악관, 기타 공공 건물을 불태우고 자기들의 함정이 정박해 있는 체사피크(Chesapeake Bay)만으로 퇴각했습니다. 워싱턴 공격은 영국군의 로버트 로스 장군과 죠지 코크번 제독이 지휘했습니다. 이들은 다음으로 발티모어(Baltimore) 를 공격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발티모어 주민들은 공격을 예상하고 그에 대비했습니다. 약 5만명의 시민들은 도시 주위에 방어선을 구축했습니다.

발티모어 항은 포트 매킨리 요새에 의해 방어되고 있었습니다. 이 요새의 진지와 대포는 영국 함정이 접근해 오는 것을 막아냈습니다.

그러자 영국군은 육로를 통해 발티모어를 공격했습니다. 로스 장군과 코크번 제독은 4천 병력을 이끌고 체사피크만으로 이어지는 노스포인트(North Point)에 상륙했습니다. 노스포인트로부터 발티모어까지 가려면 22km를 행군해야 했습니다. 행군은 아침 7시경부터 시작됐습니다. 로스 장군과 코크번 제독은 한 시간후 병사들을 쉬게했습니다.

두 지휘관은 근처에 있는 농가로 들어가 주인에게 병사들을 위한 아침 식사를 제공하도록 강요했습니다. 영국군 장교들이 식사를 마쳤을때 농부는 로스 장군에게 영국군이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습니다. 로스 장군은 발티모어로 간다고 대답했습니다.

농부는 로스 장군에게 발티모어는 강력한 방위선이 구축돼 있어 그렇게 하는데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로스 장군은 “나는 발티모어가 아니면 지옥에서 저녁 식사를 하게될 것이다”고 말했습니다. 로스와 코크번은 영국군 부대의 맨 앞에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수백명의 미국군 부대가 전면의 장교들에게 총격을 가해왔습니다. 로스 장군은 총을 맞고 머지않아 숨을 거두었습니다.

미국군은 이어서 퇴각했으나 영국군의 전진을 지연시켰습니다. 다음날 오후에도 영국군은 발티모어 부근에서 강력한 미국군의 저항에 부딛쳤습니다. 미국군은 약 100문의 포를 갖고 높은 지대에 포진하고 있으면서 낮은 쪽의 영국군을 향해 사격을 가했습니다. 영국군 지휘관은 더 이상 전진을 못하고 장병들에게 그날밤을 그곳에서 쉬도록 했습니다. 지휘관은 영국군 전함에 멧세지를 보내 발티모어에 함포 사격과 박격포 공격을 해주도록 요청했습니다.

영국군은 그같은 공격이 미군을 함몰시킬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영국 함선들은 그날 아침부터 포트 맥헨리(Fort McHenry)에 함포 사격을 하고 있었습니다. 영국군 함포들은 미군 진지의 포대보다 화력이 강했습니다. 따라서 영국 배들은 미군의 야포가 도달할수 없는 먼거리에서 포를 쏘았습니다. 영국군이 쏜 포탄과 박격포탄은 비오듯 포트 맥헨리에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기지에 있는 미군중 사망자나 다친 사람은 얼마 없었습니다. 대부분의 로케트와 포탄은 공중에서 폭발하거나 빗나갔으며 어떤 것은 터지지도 않았습니다.

요새의 가운데에는 높은 깃대에 미국기가 걸려있었습니다. 그 깃발은 발티모어 시를 방어하는 미군과 영국군 함정에서도 볼수 있었습니다. 이 미국기는 한 젊은 미국인의 눈에도 보였습니다. 그의 이름은 프란시스 스캇트 키(Francis Scott Key)였습니다.

그는 한때 생애를 종교활동에 바치기로 결심했던 변호사였습니다. 그는 시인이자 작가이기도 했습니다. 키는 전쟁을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조국을 방어하기 위해 군에 입대해 워싱턴 방어전에 참전한 사람이었습니다. 프란시스 스캇트 키는 포트 맥헨리에 떨어지는 포탄을 보았습니다. 그는 나중에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나는 도시위에 휘날리는 내 조국의 힘과 긍지를 상징하는 깃발을 보았다. 나는 적이 공격을 준비하는 것을 보았다. 나는 전투의 소리를 들었다. 투쟁의 소음은 나의 귀에 들어왔다. 그것은 용감성과 자유가 침략자들에 맛서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

영국군은 워싱턴에서 퇴각할때 윌리암 빈스(Wiliam Beanes)라는 미국 의사를 데리고 갔었습니다.

키는 빈스 의사를 알고 있었습니다. 키는 매디슨 대통령에게 의사의 석방을 영국군 지휘관에게 요청하라고 말했습니다. 대통령은 그같은 요청서를 썼고 키는 그 멧세지를 코크번 영국 제독에게 전달하기로 했습니다. 키는 미국 병원에 입원중인 부상당한 영국군 병사들의 서신도 갖고 갔습니다. 영국군 병사의 편지에는 미국 병원에서 얼마나 훌륭한 가료를 받고 있는지를 기술한 것도 있었습니다. 코크번은 자신의 장병들이 미국 병원에서 치료를 잘받고 있다는 편지를 받고 미국 의사를 석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코크번은 키 또는 그와 함께 온 미국인을 공격이 끝날때까지 억류하기로 했습니다.

비가 내리는 그날 하루 종일 영국군은 포트 맥헨리에 포격을 계속했습니다. 육지의 영국군 부대에서 키와 함께 그것을 지켜본 빈스 의사는 미국 기를 잘 볼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키에게 별과 줄이 있는 깃발이 아직도 포트 맥헨리에 나부끼고 있는가를 물었습니다. 저녁 무렵이 될때까지도 키는 미국기를 볼수 있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오직 희망을 걸뿐이었습니다.

영국군은 포트 맥헨리 부근에 또 다른 병력을 상륙시키려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미국군은 함정의 접근과 총격 소리를 들었습니다. 상륙은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포트 맥헨리에 대한 영국군의 포 사격은 계속됐습니다. 간혹 포트 맥헨리의 미국 포대도 이에 응사했습니다. 밤이었지만 키는 미국이 아직 항복하지 않았음을 알수 있었습니다. 영국군 상륙 부대는 발티모어 동쪽에서 밤을 보내면서 비를 피했습니다. 지휘관들은 진격을 해야할지 퇴각을 해야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드디어 제독으로부터 함정으로 되돌아가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이에 따라 육로로 발티모어를 공격하려던 작전은 중단됐습니다.

한편 새벽이 밝아올때까지 영국의 대포는 계속 포트 맥헨리 요새 상공에서 터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국기는 여전히 펄럭이고 있었습니다. 영국의 함포 사격은 7시에 멎었습니다. 키는 주머니에서 낡은 편지를 꺼내 그가 본 사실을 시로 썼습니다.

오, 이른 새벽 빛에 보았는가, 저녁 노을에 마지막 비치던 자랑스런 그것을, 위태로운 싸움에도 살아있는 넓은 줄과 빛나는 별을…

그후 100여년동안 미국인들은 이 시를 노래하고 포트 맥헨리의 요새를 기억했습니다. 1931년 미국 국회는 펄럭이는 줄과 별 즉 "Star-Spangled Banner" 를 미국 국가로 제정했습니다

실패한 발티모어 공격에 뒤이어 북쪽에서도 영국군이 패했다는 보도가 전해졌습니다. 영국군의 죠지 프레보스트(General Sir George Prevost) 장군은 만 천명의 병력을 이끄고 몬트리올(Montreal)을 떠나 남쪽의 뉴욕으로 진군했었습니다. 챔플린(Lake Champlain) 호반의 서쪽 플랫즈버그(Plattsburgh)에서 그는 수가 적은 미국군의 저항에 부딛쳤습니다. 미군의 수는 약 4천명이었습니다. 프레보스트 장군은 방어하는 미군을 상대하기 전에 호수부터 장악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영국 군함 네척과 무장 선박10척의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이 호수에는 그와 비슷한 수의 미국 함정들도 들어왔습니다. 이어서 치열한 해전이 벌어졌습니다. 미국 함정들은 영국 배를 침몰시켰습니다. 프레보스트의 대규모 지상군은 해군의 지원이 없자 공격을 중단했습니다. 만 천명의 영국군은 오던 길을 돌아몬트리얼로 회군했습니다. 1814년 전쟁이 벌어지는 가운데서도 양측은 평화 협정을 논의했습니다. 평화회담은 벨지움(Belgium)의 겐트(Ghent)에서 열렸습니다. 처음 영국은 조약 체결을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영국군이 미국 영토의 일부를 장악할 것으로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영국은 평화 조약의 조건으로 서북부의 광활한 땅을 인디언들에게 돌려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영국은 또 캐나다와의 국경에 접한 땅들을 캐나다에 인계하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발티모어와 플랫스버그 전투 결과 영국의 입장은 달라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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