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결 가능 링크

역사적 문서, 미 독립선언서 작성


영국군과 식민지 군대는 렉싱턴과 콩코드에서 전투를 벌였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선전 포고는 없었습니다. 그런가운데서도 13개 식민지 시민군대는 싸울 결의를 갖고 있었습니다. 펜실바니아의 필라델피아에서 모인 제 2차 대륙 회의에서 맨처음 등장한 질문은 누가 식민지 군대를 조직할 것인가였습니다.

대표들은 그 일을 맡을 사람은 죠지 워싱턴이라는데 의견을 같이했습니다. 그는 프렌취 인디언 전쟁에서 싸운 경험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식민지에서 어느 누구보다도 군 지휘관으로써의 능력을 갖고 있는 인물로 간주됐습니다. 워싱턴은 그 제의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새로운 대륙 군대를 지휘하는 댓가로 어떤 보수도 받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워싱턴은 보스톤에 있는 군대를 지휘하기 위해 필라델피아를 떠났습니다.

제 2차 대륙 회의는 영국과의 전쟁을 막기위해 또 하나의 시도로 죠지 영국왕에게 멧세지를 보냈습니다. 이들은 영국왕에게 자신들의 문제점들을 검토해 문제를 해결하도록 노력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영국왕은 그 멧세지를 읽지도 않았습니다.

식민지 사람들이 싸울 용의를 갖고 있는데, 전쟁을 방지하려 했다는데 의아해 할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한 이유는 아직도 대부분의 식민지들이 영국으로부터 분리할 태세가 돼있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은 대영제국의 일원으로 남아있으면서 더 큰 자치를 실시할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죠지 워싱턴을 대륙 군대의 사령관으로 임명한 이틀후 식민지 군대와 영국군은 미국 혁명에서 첫번째가 되는 본격적인 전투를 벌였습니다. 이 전투는 벙커힐 전투라고 불리웁니다. 실제로는 벙커힐과 브리드 힐 두 군데의 전투였지만 그렇게 통용되고 있습니다. 이들 두 전투 지역은 보스톤의 챨스강 바로 건너에 있었습니다.

매사츄셋즈 군인들은 1775년 6월 어느날 밤, 브리드 힐에 참호를 팠습니다. 아침이 되자 이 참호는 군인들로 가득했습니다. 영국군은 강 너머로부터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아메리카 군대는 극히 빈약한 화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영국군이 강을 건너 바로 눈앞에 올때까지 기다렸다가 총을 쏘도록 명령을 받았습니다. 워싱턴 사령관은 군인들에게 영국군의 눈에 흰자위를 볼수 있을때까지는 총을 쏘지 말라고 명령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영국군은 언덕을 올라왔습니다. 아메리카 군대는 총을 쏘았습니다. 영국군이 두번째로 언덕을 올라왔습니다. 아메리카 군대는 다시 총을 쏘았습니다. 영국군이 세번째로 언덕을 올라왔습니다. 그러나 아메리카 군대는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이들은 총알이 없어 그 자리를 떠나야 했던 것입니다. 영국군은 브리드 힐을 점령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영국군은 약 천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아메리카 군대는 약 400명이 사망했습니다. 이 전투로 협상을 통해 사태를 해결하려던 마지막 희망도 거의 사라졌습니다. 죠지 영국왕은 식민지들이 공공연하게 반란을 일으킨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이에 따라 대륙회의도 1773년 이후 영국이 취한 모든 조치를 규탄하는 선언문을 채택했습니다.

1775년 아메리카 군과 영국군은 여러 차례 전투를 벌였습니다. 그러나 식민지들은 아직도 전쟁을 선포할 자세가 돼있지 않았었습니다. 그 다음해 영국군은 식민지 군대와 싸우기 위해 헤씨아 군인들을 이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헤씨아 군인이란 독일인 용병들로써, 돈만 주면 어떤 전쟁에든지 나가 싸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식민지들은 이들을 두려워했으며, 용병을 사용하려는 영국을 더욱 증오했습니다.

이때 토마스 페인 (Thomas Paine)은 아메리카 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 하나의 문서를 작성했습니다. 상식 (Common Sense)이라는 제목의 이 문서는 죠지 영국왕과 왕정 통치 제도를 비판한 것이었습니다. 이 문서는 또 독립을 주장했습니다. 이 문서는 아메리카에서 약 15만매가 팔렸습니다. 식민지 사람들은 누구나 그 내용을 화제에 올렸습니다. 그 결과 대륙회의는 이 문서의 유포에 따른 행동을 취하기 시작했습니다. 대륙회의는 아메리카의 항구들을 외국과의 교역을 위해 개장했습니다. 대륙회의는 식민지들에게 주 정부를 구성하고 각기 헌법을 제정하도록 촉구했습니다. 6월 7일, 버지니아 대표 리챠드 헨리 리(Richard Henry Lee)는 독립을 추구하는 결의안을 발의했습니다.

이 결의안이 즉각 통과되지는 못했습니다. 독립 선언이란 극도로 심각한 과정이었습니다. 그같은 문서에 서명한다는 것은 대륙회의에 참석한 대표들이 영국의 배신자가 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또한 그런 대표들이 영국군에 붙잡히면 죽을을 당하게 돼있었습니다.

대표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고, 또 왜 그렇게 하고 있는지를 세계가 이해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들이 그같이 행동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문서를 만들도록 위원회를 구성했습니다. 이 위원회의 위원중 한 사람이 버지니아 대표인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이었습니다. 그는 이미 영국의 왕정 체제를 비판하는 글을 쓴바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위원들은 그에게 새로운 문서를 준비하도록 의뢰했습니다. 이들은 제퍼슨이 위원들중 가장 그것을 잘 쓸수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들의 생각은 옳았습니다. 그는 16일간에 걸쳐 그 문서를 작성했고, 대표들은 1776년 7월 4일, 그 문서를 승인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미국의 독립 선언문였습니다.

제퍼슨의 문서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첫째 부분은 항거하는 사람들 모두의 권리를 설명했습니다. 그리고는 미국인들이 새로운 공화제를 창설하려는 이념을 기술했습니다.

독립 선언서는 또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눈으로 볼때 평등하다고 주창했습니다. 따라서 정부란 통치를 받는 사람들 스스로가 허용을 했을때만 존재할수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두번째 부분은 아메리카의 식민지들이 왜 영국으로부터 분리를 하려 하는지를 설명했습니다. 여기에서 제퍼슨은 어떤 형태의 정부든지 파괴적인 것이 됐을때 국민은 그것을 교체하거나 파기할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고 강조했습니다.

영국은 식민지인들이 영국의 법을 위반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제퍼슨은 그같은 생각을 거부했습니다. 제퍼슨은 식민지에 대한 영국의 처우가 하느님으로부터의 자연법을 위배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제퍼슨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은 자연법이 왕의 법보다 더 큰 힘을 갖는다고 믿었습니다.

자연법에 대한 사상은 당시로부터 100여년 전에 영국과 프랑스의 철학자들한테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제퍼슨은 학교에서 그 사상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제퍼슨은 나중에, 독립 선언서를 쓸 당시에는 그 철학 사상을 다시 읽지는 않았었다고 말했습니다. 다만 그같은 생각은 자신의 머릿속에서 저절로 우러나온 것이었다고 말했습니다.

독립 선언서의 두번째 부분은 아메리카 식민지들이 영국 정부에 갖는 27가지의 불만들을 기술했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것들은 아메리카에 대한 영국의 세금 제도, 식민지내의 영국군 주둔등이었습니다. 이들 불만을 열거한 다음 제퍼슨은 다음과 같이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단결된 식민지들은 자유롭고 독립된 국가이며 또 그래야만 한다. 식민지들은 영국왕에 대한 모든 충성으로부터 해제돼야 하고 식민지와 대영제국과의 모든 정치적 연결은 끊어져야 한다. 그리고 자유롭고 독립된 국가들은 전쟁을 선포하고, 평화를 추구하며 동맹을 체결하고, 상업을 구축하며, 기타 독립된 국가들이 권리를 갖고 있는 모든 행동과 일들을 처리할 전적인 권리를 보유한다.”

독립 선언서의 마지막 부분은 대륙회의 대표들에게 가장 중요한 단계, 즉 혁명을 지지하도록 강력한 영향력을 주기 위한 내용으로 돼있었습니다.

“우리는 신성한 섭리의 보호위에서 강력하게 결속하기 위해 우리의 생명, 우리의 재산, 그리고 성스러운 영예를 걸고 걸고 다같이 맹세한다.”

XS
SM
MD
L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