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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신도들 메릴랜드에 정착


남부의 여러 식민지중 가장 북쪽에 위치한 식민지는 메릴랜드였습니다. 영국왕 챨스 1세는 1632년에 죠지 칼버트(George Calvert)라는 사람에게 버지니아주와 펜실바니아주 사이에 있는 땅을 떼어주었습니다. 죠지 칼버트는 발티모어(Baltimore) 경으로도 불리우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로마 카톨릭 교도였습니다.

죠지 칼버트는 영국에서의 종교적 문제로 인해 새로운 식민지를 갖기 원했습니다. 카톨릭은 영국에서 공개적으로 신앙 활동을 할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영국의 국교인 앵글리칸 쳐취 소속이 아니라는 이유로 정부에 돈을 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죠지 칼버트는 메릴랜드라는 식민지의 탄생을 보지못했습니다. 그는 식민지 허가 문서를 받은지 얼마 안돼 사망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아들인 쎄씰 칼버트(Cecil Calvert)가 대를 이어 발티모어 경이 됐고, 메랠랜드 땅을 하사받았습니다. 쎄씰 칼버트는 그의 동생 레오나드(Leonard) 칼버트에게 메릴랜드 식민지의 총독을 맡도록 했습니다. 쎄씰 칼버트는 영국의 카톨릭이 메릴랜드에서 개신교도들과 함께 평화롭게 살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는 영국의 카토릭 교도들에게 식민지로 가라고 촉구했습니다.

그는 이주를 독려하기 위해 카토릭 교도들에게 농장을 분배하고 지역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할수 있는 권한도 주었습니다. 일부 카톨릭은 식민지로 떠났으나, 그가 희망하는 것만큼 많지는 않았습니다. 메릴랜드에도 개신교도 수가 더 많았습니다.

1649년 발티모어 경은 지역 정부에서 만든 관용법(Toleration Act)이라는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은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것이었으나, 크리스챤에만 해당됐습니다.

영국왕 챨스 2세는 아메리카의 더 많은 땅을 분배했습니다. 이번에는 8명의 귀족들에게 캐롤라이나(Carolina)로 불리우는 땅을 떼어주었습니다. 이곳은 버지니아에서부터 훌로리다(Florida)로 알려진 곳까지의 광대한 지역이었습니다. 이곳에는 일찍부터 스페인인, 프랑스인, 영국인들이 정착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성공적인 삶을 갖지 못했습니다. 8명의 영국 귀족들은 누구든 캐롤라이나로 가는 사람에게는 40헥타르의 땅을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들은 또한 종교의 자유도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캐롤라이나의 첫번째 성공적인 정착민들은 1670년에 영국을 떠났습니다. 이들은 두개의 강이 만나는 곳에 도시를 건설했습니다. 이 도시의 명칭은 챨스 국왕의 이름을 따 챨스튼(Charleston)이라고 붙였습니다. 스페인 선박들은 여러 차례 이 도시를 공격했으나, 정착민들은 매번 이들을 물리쳤습니다.

정착민들은 어떤 작물이 가장 잘 자라는지 알기위해 여러가지 농작물을 재배했습니다. 이들은 덥고 습기찬 곳에서는 벼가 가장 적합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돼지와 소의 사육도 잘돼, 캐롤라이나 주민들은 서인도 제도(West Indies)에 육류를 팔기 시작했습니다.

챨스 타운의 여러 정착민중에는 서인도 제도의 노예 항에서 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정착민들은 벼를 경작하기 위해 흑인들을 사기 시작했습니다. 1708년에 이르자 캐롤라이나 남부 지역에는 백인보다 흑인의 수가 더 많아졌습니다. 노예의 이용은 경제적 성공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캐롤라이나 북부 지방은 남쪽보다 성장이 느렸습니다. 이 지역 이주민은 대부분 인근 버지니아에서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앵글리칸 처치에 동조하지 않은 사람은 버지니아에서 환영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중 일부가 캐롤라이나 북부 지방으로 이주했습니다.

역사가들은 노스 캐롤라이나(North Carolina)가 된 지역이 당시 모든 식민지중 가장 민주적인 곳이었다고 평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의 생활에 간섭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서로 상대방이 평화롭게 살도록 해주었습니다. 그들은 노스 캐롤라이나 해안에 근거지를 만든 해적들과 대항할때는 힘을 합쳤습니다.

전문가들은 노스 캐롤라이나 사람들이 매우 강한 자주정신을 갖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1677년 이들중 일부가 영국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이들은 영국의 항해조례(Navigation Act)에 불만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 법은 노스 캐롤라이나 사람들이 다른 식민지에 파는 물건에 대해서도 영국에 세금을 내도록 돼있었습니다. 일부 정착민들은 이 법에 따른 세금을 내기 거부했습니다. 이들은 심지어 자기들 나름대로 정부를 수립하고 영국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려 했습니다. 그러나 영국군은 그같은 운동을 주동한자를 체포함으로써 반란을 진압했습니다.

캐롤라이나 북부와 남부 주민들의 생각은 너무나 달랐습니다. 결국 이들은 1712년에 북부와 남부, 즉 노스 캐롤라이나(North Carolina) 와 싸우스 캐롤라이나(South Carolina) 로 갈라섰습니다.

신세계에서 마지막으로 수립된 영국 식민지는 죠지아였습니다. 1732년 영국 왕 죠지 2세때였습니다. 죠지아는 제임스 오글도프 (James Oglethorpe)라는 사람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는 영국의 부채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찾기 원했습니다. 영국의 많은 채무자들은 돈을 갚을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채무자들이 감옥에 가는 일도 생겼습니다. 감옥에 보내지면 갚을 돈을 버는 길도 막히게 됐습니다.

오글도프는 채무자들이 감옥 대신 갈수 있는 식민지를 건설하기 원했습니다. 그는 이 식민지에서 사람들이 양질의 삶을 영위할수 있게 되기를 희망했습니다. 그러나 죠지아로 가려는 채무자들은 많지 않았습니다. 죠지아에 정착하는 사람들은 다른 식민지에 정착하는 사람들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들은 오글도프의 모든 생각에 찬동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오글도프가 옳다고 생각하지 않은 것들, 예를 들면 음주나 노예 소유등을 원했습니다. 결국 정착민들이 이겼습니다. 이들은 오글도프의 삶의 방식을 따르지 않은 것입니다.

죠지아의 삶은 쉽지 않았습니다. 스페인 함정들과 해적들은 죠지아 해안선 일대의 여러 나라 선박들을 나포했습니다. 스페인은 훌로리다를 관할하고 있었으며, 죠지아, 캐롤라이나까지도 소유권을 주장했습니다. 따라서 경계선의 싸움이 잦았습니다. 오글도프는 죠지아를 건설하느라 돈을 모두 탕진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1752년 죠지 국왕이 이 식민지를 관할하게 됐습니다.

한편 가까운 지역에서 이들 모든 새로운 식민지들이 수립되는 가운데 버지니아 식민지는 갈수록 커졌습니다. 이곳의 생활 방식은 북부나 남부와는 크게 달랐습니다. 이 시기의 버지니아 주민들은 대부분이 영국 교회인 앵글리칸 쳐취 신도들이었습니다. 이곳에서 살아가는데 종교는 북부 지방에서처럼 중요하게 여겨지지는 않았습니다. 뉴잉글랜드 식민지에서는 목사가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습니다. 남부에서는 부자, 대 농장주가 중요한 사람이었습니다.

버지니아 사람들은 매사츄셋스 사람들 처럼 도시에서 살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강가의 소규모 농장에서 살거나 plantation이라 불리우는 대농장에서 살았습니다. 버지니아 인들은 영국에 대규모로 담배를 수출했습니다. 담배농사는 버지니아 사람들에게 가장 큰 수입원이었습니다.

담배 재배는 농작물을 기르는데 필요한 토양의 성분을 파괴했습니다. 담배를 재배하고 난 1-2년 후에는 그땅에 다른 작물을 기를수 없었습니다. 농장주들은 그 땅에 농사를 짓지 않고 몇년동안 그대로 놓아두어야 했습니다. 그것은 곧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많은 땅이 필요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동시에 많은 노동력도 필요했습니다. 버지니아의 담배 농장주들은 땅과 일꾼들을 사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이들은 돈이 없거나 일자리가 없는 사람들을 고용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계약 머슴(indentured servants)이라 불리웠습니다. 이들은 4년에서 7년까지의 계약을 맺고 일을 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다른 일자리로 옮겨갈 수 있었습니다.

1619년 네델란드 선박 한척이 제임스타운에 아프리카의 흑인들을 싣고 왔습니다. 흑인들은 노예 상인들에 의해 고향에서 납치돼 선장에게 팔린 자들이었습니다. 선장은 이들을 버지니아 정착민들에게 팔았습니다. 이들 흑인들은 처음에는 계약 머슴으로 일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정착민들은 이들을 노예로 삼아 계속 임금을 지불하지 않기로 작정했습니다. 인디언들은 쉽게 도망을 갔기 때문에 노예로 삼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흑인들은 갈곳이 없었습니다.

점차 버지니아에서는 흑인들을 노예로 삼을수 있도록하는 법이 통과됐습니다. 1750년에 이르자 버지니아에는 다른 인종보다 흑인들의 수가 더 많게 됐습니다. 역사가들은 지금까지도 노예 제도가 아메리카의 편견을 야기시켰는지 아니면 편견이 노예 제도를 만들었는지에 대해 의견이 엇갈리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도 정확안 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17세기에 대부분의 유럽인들은 대부분 자기들이 아프리카인들보다 우월하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렇게된 이유로는 아프리카의 다른 풍습, 종교, 그리고 검은 피부색등이 있습니다. 검은색은 유럽인들에게 위험과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아메리카 남부의 노예 제도는 오랫동안 미국 역사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 제도는 국민을 분열시켰고 남북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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