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행자: 미국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건국 250주년 소식 전해드리는 ‘역사 속 아메리카 250’, 김미옥 기자와 함께합니다.
기자: 미국 역대 대통령들 소개드립니다. 오늘은 미합중국 제6대 대통령, 존 퀸시 애덤스를 만나보겠습니다. 미국 역사에서 유명한 외교적 선언이 있습니다. ‘유럽은 아메리카 대륙에 간섭하지 말라.’ 바로 ‘먼로 독트린’인데요, ‘먼로’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기록됐지만, 이 문서를 실제로 구상한 사람은 존 퀸시 애덤스였습니다. 존 퀸시 애덤스는 국무장관과 대통령, 그리고 퇴임한 뒤 하원의원으로 활동하며 미국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대통령입니다.
진행자: 제2대 존 애덤스 대통령의 아들이기도 하죠.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아버지와 아들이 모두 대통령이 된 첫 사례였는데요. 그런 다음 조지 부시 대통령 부자가 나왔고요.
기자: 네. 아버지와 아들 모두 하버드를 졸업했고, 외교관을 거쳐 대통령이 됐습니다. 존 퀸시 애덤스는 1767년 7월 11일 매사추세츠주 브레인트리에서 태어났습니다. 10살 때 외교 사절로 유럽에 가는 아버지를 따라 프랑스로 건너갔고, 14살에는 러시아에서 미국 외교 사절단 업무를 도왔습니다. 또, 파리에서는 독립전쟁을 끝낸 평화 협상 과정을 가까이에서 지켜봤습니다. 7개 언어를 구사했다는 기록도 전해집니다.
진행자: 지금으로 치면 중학생이 세계 정상급 외교 무대 한가운데 있었던 셈이네요.
기자: 어릴 때부터 국제정치를 몸으로 배운 거죠. 하버드 대학을 졸업한 뒤 변호사가 됐고, 워싱턴 대통령 시절부터 외교관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국무장관을 거쳐 1825년 대통령으로 취임했고, 임기를 마친 뒤에는 하원의원으로 17년 동안 더 활동했습니다. 그러다 1848년, 하원 의사당에서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세상을 떠났습니다. 현직 의원 신분으로 생을 마감한 유일한 전직 대통령이고요, 지금은 매사추세츠주 퀸시의 한 교회에 아버지 존 애덤스 부부와 아들 존 퀸시 애덤스 부부가 나란히 묻혀 있습니다.
진행자: 매사추세츠주 퀸시에 있는 저택은 지금 애덤스 국립역사공원으로 지정됐죠?
기자: 네 애덤스 국립역사공원에는 존 애덤스와 존 퀸시 애덤스 부자의 생가, 그리고 애덤스 가문이 4대에 걸쳐 살았던 ‘올드하우스(Old House)’가 남아 있습니다. 두 대통령이 실제 사용했던 가구와 생활용품이 상당수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습니다. 또 저택 옆에 있는 석조 건물, ‘스톤 라이브러리(Stone Library)’에는 애덤스 가문이 수집한 책 수천 권이 보관돼 있는데요, 대통령 부자가 직접 읽고 메모를 남긴 책들도 볼 수 있습니다.
진행자: 존 퀸시 애덤스는 먼로 독트린을 직접 설계한 인물이라고 하셨는데, 대통령이 되기 전 국무장관 시절 업적이 상당하다고요?
기자: 외교 분야에서만큼은 미국 건국 초기 역사상 최고 수준의 업적을 남겼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1814년, 미국과 영국의 1812년 전쟁을 종결시킨 겐트조약 조약 체결 시 존 퀸시 애덤스가 핵심 역할을 했습니다. 또 플로리다 획득에도 기여했는데요. 원래 플로리다는 스페인 식민지였습니다. 하지만 존 퀸시 애덤스 국무장관 시절인 1919년 스페인과 ‘애덤스-오니스 조약’을 맺고 협상을 통해 플로리다를 미국 영토로 만들었습니다.
진행자: 제임스 먼로 대통령 시기에 국무장관을 지내면서 이런 탁월한 외교협상 성과를 냈는데, 아까 잠깐 언급하셨듯이, 먼로 독트린도 사실은 존 퀸시 애덤스가 핵심 역할을 했다고요?
기자: 그렇습니다. ‘유럽 열강이 아메리카 대륙에 더는 개입하지 말고, 새로운 식민지를 만들 수 없다’고 선언했던 먼로 독트린은 1823년 제임스 먼로 대통령 이름으로 발표됐습니다. 하지만, 이 원칙을 구상하고 문서화한 사람은 당시 국무장관 존 퀸시 애덤스입니다. 미 국무부 공식 역사 기록에도 그렇게 명시되어 있습니다.
진행자: 대통령이 되기 전, 외교 분야에서는 최고의 국무장관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대통령으로서는 어떻습니까?
기자: 대통령으로서는 미국 도로와 운하, 항만, 과학기술에 투자하는 국가 발전 계획을 추진했습니다. 국립대학 설립과 천문대 건립도 제안했는데요, 하지만 의회 다수가 반대파였고, 주요 법안이 번번이 막혔습니다. 존 퀸시 애덤스는 스스로 인정할 만큼 ‘차갑고 근엄하고 접근하기 어려운' 성격이었습니다. 정치력도 강한 편이 아니어서 많은 계획이 좌절됐습니다. 역사학자들은 존 퀸시 애덤스 대통령을 '시대를 앞서간 대통령'이라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진행자: 퇴임한 뒤에는 건국 초기 대통령들처럼 고향으로 돌아가 여생을 보내지 않고, 다시 의정 활동을 했죠?
기자: 미국 역사상 유일하게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뒤 하원의원으로 복귀했습니다. 1831년부터 1848년까지 17년 동안 하원의원으로 활동하며 노예제 확대에 맞서 싸웠습니다. 당시 하원은 노예제 관련 청원을 아예 논의조차 하지 못하도록 막는 '개그룰(Gag Rule)'이 존재했는데요, 존 퀸시 애덤스는 8년 동안 끈질기게 싸워서 1844년 결국 이 규정을 폐지시켰습니다.
진행자: 건국 초기 대통령들 가운데는 노예를 소유한 경우가 많았는데, 아버지 존 애덤스는 노예를 소유하지 않았고, 아들 존 퀸시 애덤스는 노예제 확대를 막기 위해 싸웠군요.
기자: 맞습니다. 아미스타드 사건도 있습니다. 1839년, 지금의 시에라리온 지역에서 납치돼 쿠바로 끌려갔던 아프리카인들이 스페인 선박 아미스타드호에서 반란을 일으킨 뒤 미국으로 표류해 들어왔습니다. 그러면서 재판이 벌어졌는데요. 당시 74세였던 존 퀸시 애덤스가 이들의 변호인으로 대법원에서 직접 변론을 맡았고, 1841년 대법원은 이들의 자유를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이 사건을 영화 '아미스타드'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또 존 퀸시 애덤스 대통령에 관한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대통령 재임 동안 거의 매일 새벽 포토맥 강에서 수영을 했는데요, 한 여성 기자가 이 사실을 알고 강가에서 기다렸다가, 옷을 돌려주지 않겠다며 인터뷰를 요구해서 강물 속에서 인터뷰를 했다는 이야기가 유명합니다. 존 퀸시 애덤스 대통령은 12살 때부터 평생 일기를 썼습니다. 존 퀸시 애덤스가 남긴 일기는 모두 51권, 1만 4천 페이지가 넘는데요, 미국 역사상 가장 방대한 개인 기록 가운데 하납니다.
진행자: 미국 제6대 존 퀸시 애덤스 대통령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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