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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아메리카] 미국 문화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할렘의 막내 작가, 도로시 웨스트


[인물 아메리카] 미국 문화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할렘의 막내 작가, 도로시 웨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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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간에는 뉴욕 할렘의 여류 작가로, 미국의 역사와 문화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도로시 웨스트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이 시간에는 뉴욕 할렘의 여류 작가로, 미국의 역사와 문화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도로시 웨스트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도로시 웨스트의 첫번째 장편 소설이 발표된 것은, 그녀의 나이 40세때였습니다. 두번째 작품이 나온 것은 80대 후반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유명 흑인 시인 랭스턴 휴즈는 도로시를 Kid, 즉 아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른바 할렘 르네상스 시대에, 도로시는 문학가와 예술인 그룹 내에서 가장 젊은 층의 한명이었기 때문입니다.

할렘 르네상스는 1920년대에서 1930년대까지 일었던 미국 흑인들의 창조적 예술기를 말하고 있습니다. 제 1차 세계 대전 때와 그 후에 미국 남부의 수 많은 흑인 청년들이 일자리와 나은 삶을 찾아 북부의 도시로 몰려들었습니다.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 바로 뉴욕의 할렘이었습니다. 할렘은 미국에서 가장 큰 흑인 집단 거주 구역이 됐습니다. 할렘에는 흑인 음악가, 화가, 연기자들도 모여들었습니다. 할렘은 흑인 문화의 중심지이기도 했습니다.

남부의 흑인들이 대거 북부로 이동해오자 미국인들은 이런 추세가 자신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를 생각했습니다. 흑인들은 누구인가, 그들이 미국인으로 갖고 있는 권리는 무엇인가도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현상을 총체적으로 들어내는 예술적 실험은 할렘 르네상스라는 문예부흥기를 만들어 냈습니다. 도로시 웨스트는 바로 이 시기, 흑인 문학의 틀과 방향을 제시하는데 큰 영향을 미친 여성이었습니다.

도로시 웨스트는 1907년 매사추세츠 주 보스톤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부모는 남부에서 태어났고, 나중에 북부로 이주해왔습니다. 아버지는 노예에서 해방된 분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보스톤에서 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식품 판매상을 하는 성공적인 자영업자가 됐습니다. 웨스트는 개인교사로부터 지도도 받고 무용학원에도 나갔습니다. 매사추세츠 해안에 있는 섬의 유명 휴양지로 놀러 가기도 했습니다. 웨스트는 보스턴 대학교에서 공부하고 그 다음에는 뉴욕의 콜럼비아 대학에서 저널리즘을 공부했습니다.

도로시는 나이 불과 7살에 소설은 쓰기 시작했을 만큼 글쓰기에 재주가 있었습니다. 14살이 됐을 때는 일간지 보스톤 포스트에 첫 소설을 실었습니다. 그 후로는 같은 신문에 자주 소설, 수필 등을 실었습니다. 1926년, 웨스트는 어포투니티 (Opportunity) 잡지 주최 단편 소설 경연에서 2등을 차지했습니다. 소설 제목은 “타이프라이터”였습니다. 이 소설은 자신의 실제 삶을 극히 싫어하는 한 흑인 남성이 딸의 타자 치는 기능을 향상시켜주기 위해 새로운 삶을 추구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도로시 웨스트는 할렘 르네쌍스의 또 다른 유명 작가 조라 닐 허스턴과 함께 2등을 했습니다. 그해 웨스트의 작품은 헤밍웨이 등 유명인들과 함께 최우수 작품으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보스턴에서 살던 웨스트는 할렘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허스턴과 랭스턴 휴즈, 카운티 쿨렌, 월레스 서만 등 다른 소설가, 시인 등은 그녀를 어린 동생이라 여겼습니다.

할렘 르네상스의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작품에 남다른 열정을 갖고 있었습니다. 도로시 웨스트는 어느 때 한 기자에게, 할렘의 작가들은 누구나 자신들이 세계 최고의 작가가 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들려주었습니다. 이 시기 도로시 웨스트는 여러 편의 단편소설을 썼습니다. 그녀의 작품들은 뉴욕은 물론 여러 지역의 잡지에 발표됐습니다. 그중 한 작품으로 “장례식” (Funeral)이 있었습니다. 또 하나의 작품은 “검은 의상” (The Black Dress)이었습니다.

도로시 웨스트는 언젠가 그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는 러시아의 표도르 도스토옙스키라고 말했습니다. 전문가들은 일부 그녀의 작품이 도스토옢스키를 닮았다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도스토옙스키 처럼 도로시 웨스트도 고통에 의해 구제되는 아이디어를 담은 글을 썼습니다. 환경, 인종, 또는 남녀 이기 때문에 덧에 같혔다고 느끼는 불만에 찬 사람들의 이야기를 썼습니다.

1932년 도로시 웨스트는 흑인 지식인, 예술가 그룹에 포함돼 러시아를 방문했습니다. 이들은 그곳에서 미국의 인종문제를 다룬 영화 “흑과 백”을 제작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다른 멤버들이 귀국한 뒤에도 도로시는 1년을 더 러시아에 머물렀습니다. 그녀의 체류 연장이 정치적인 이유에서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랭스턴 휴즈와 같은 문인들과 그곳에 간 것은 그냥 그 사람들이 좋아서였다고 말했습니다. 도로시는 아버지가 타계했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했습니다.

1930년대 중반, 할렘 르네상스 운동은 시들해졌습니다. 그 시대의 창의성을 되살리고 싶었던 도로시 웨스트는 “도전” Challenge라는 잡지를 발행했습니다. 도로시는 젊은 흑인 작가들의 글을 편집하고 발행했습니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잡지는 3년만에 문을 닫아야 했습니다. 도로시 웨스트는 더 이상 잡지를 발행할 재력이 없었습니다. 수준있는 작품을 찾기 어려웠다는 점도 웨스트에게는 부담이었습니다.

그녀의 잡지는 다른 흑인 작가 그룹으로부터 비판도 받았습니다. “원주민 아들” Native Son작가로 유명한 리처드 라이트와 마가렛 워커 같은 작가도 여기 동조했습니다. 이들은 웨스트의 잡지가 예술적인 가치에만 너무 치중하고 있다며, 정치적인 이슈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1937년 도로시 웨스트는 또 다른 잡지, New Challenge를 발행했습니다. 웨스트는 리처드 라이트가 앞서 자신의 잡지를 비판했지만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두 작가는 여러 이슈에 의견을 달리했습니다. 웨스트는 이번에도 재정난에 직면해 새 잡지는 한차례밖에 발행되지 못했습니다. 단 한차례 발행에 그쳤지만 뉴 챌린지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 잡지에는 “흑인 작품들의 청사진” 이라는 리처드 라이트의 글이 실렸습니다. 이 글은 미국의 아프리카계 작가들이 무엇을 써야 하는지를 논하는 것이었습니다. 뉴 챌린지는 흑인의 예술과 정치를 논한 최초의 출판물이었습니다. 이후로는 다른 잡지들도 이 예를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도로시 웨스트는 1940년대말, 뉴욕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가족의 휴양지가 있는 마사스 빈야드 (Martha's Vineyard) 섬으로 이사했습니다. 웨스트는 타계할때까지 이곳에서 살았습니다.

1948년 웨스트는 그녀의 첫 장편 "The Living Is Easy”를 발행했습니다. 이 소설은 피부색이 밝은 흑인 여성 클레오 존슨이 주인공이었습니다. 소설은 일부 웨스트 자신과 어머니의 이야기를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주인공은 피부색이 검은 딸이 자신을 닮았기를 원했습니다.

이 소설은 보스톤의 흑인 중산층 가정의 가치를 묘사했습니다. 많은 독자들은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을 다루고, 흑인 공동체에 주는 메시지를 담은 이 작품에 찬사를 보냈습니다. "The Living is Easy"는 1982년 페미니스트 출판사에 의해 다시 발행됐습니다. 이때의 문학 비평가들은 이 작품을 가정과 인생에 있어서의 여성의 위치를 묘사하고 있어 매우 중요하다고 평가했습니다. 이 소설이 담고 있는 어머니와 딸 사이의 미묘한 관계에 대한 묘사도 찬사를 받았습니다. "The Living is Easy"는 이제 미국 흑인 여성의 문학적 전통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을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녀의 첫 소설이 발표되고 난 다음, 도로시 웨스트는 여러가지 주제에 대한 자신의 아이디어를 나타내는 소설을 계속 썼습니다. 그녀의 두번째 소설 "The Wedding" 결혼식은 47년이나 지난 1995년에 나왔습니다. 이 소설은 1950년대의 마사의 빈야드 (Martha's Vineyard)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돈 많은 흑인 여성과 남편인 백인 재즈 음악가의 이야기입니다. 이 소설은 흑인 사회 내의 계층과 피부색 문제, 흑인과 백인간의 인종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도로시 웨스트는 서로 다른 인종이 그것때문에 나누어져서는 안된다고 믿었고, 서로 사랑할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웨스트가 이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부터였습니다. 그러나 흑인들의 정치운동이 강력해지자 글 쓰기를 멈추었습니다. 웨스트는 흑인 정치 운동가들이 그녀의 소설을 규탄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웨스트는 민권운동에는 적극적이지 않았습니다.

1992년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 여사는 소설 결혼식을 마무리 하도록 돕기 위해 작가를 방문했습니다. 재클린은 남편인 케네디 대통령 피살 이후 출판사에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재클린은 책이 출판되기 직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도로시 웨스트는 자신과 재클린은 아주 다른 여성이지만 완벽하게 함께 일했다고 회고했습니다.

소설 결혼식이 대단히 인기가 높자, 출판사는 도로시 웨스트의 또 다른 저서 부자와 가난한자 "The Richer, The Poorer" 를 펴냈습니다. 웨스트가 일생 동안 쓴 소설과 그외 글들을 한데 모은 것이었습니다. 할렘 르네상스의 마지막 작가였던 도로시 웨스트는 1998년 8월 타계했습니다. 향년 91세였습니다.

도로시 웨스트는 흑인 여성 작가의 선구자였습니다. 그녀의 작품은 미국 흑인들의 복잡한 삶을 들여다 보았고, 작품 속 인물들은 인종, 성, 계층 등의 전통에 도전했습니다. 사람들은 도로시 웨스트가 타계하자 그는 한 마디로 국가적 선물이었다고 찬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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