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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아메리카] 에드워드 케네디


[인물 아메리카] 에드워드 케네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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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연방상원에서 가장 오래 의정활동을 한 사람중의 한명인 에드워드 케네디는 진보파의 사자로 불리울만큼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정치인이었습니다. 그는 47년이라는 오랜 세월을 상원의원으로 재임하며, 찬사와 존경을 받는 삶을 누렸지만 좌절도 많이 겪은 인물이었습니다.

미국 연방상원에서 가장 오래 의정활동을 한 사람중의 한명인 에드워드 케네디는 진보파의 사자로 불리울만큼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정치인이었습니다. 그는 47년이라는 오랜 세월을 상원의원으로 재임하며, 찬사와 존경을 받는 삶을 누렸지만 좌절도 많이 겪은 인물이었습니다.

에드워드 케네디는 미국에서 가장 명망 높은 보스톤 정치가문이자 재벌가의 일원이었습니다. 케네디 가는 아일랜드계 가톨릭으로, 미국의 정계, 재계에 폭 넓은 연줄을 갖고 있었습니다. 테드 또는 테디라는 애칭으로도 불리운

에드워드 케네디는 1932년 조셉 케네디와 로즈 케네디 사이에서 9남매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테드는 대학에 들어가기 전 10군데나 되는 여러 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는 하바드 대학에서 학부를 마치고 1950년대에는 2년 동안 육군에서 복무했습니다. 군에서 재대한 다음에는

버지니아 로 스쿨, 법대에서 공부했습니다. 아버지 조셉 케네디는 친구들에게 내 아들들이 언젠가 대통령에 출마할 것이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 말대로라면 맏아들인 조셉 케네디 주니어가 대통령에 도전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제 2차 세계 대전 중이던 1944년 해군 조종사로 복무하다 전사했습니다. 그리고 둘째 아들 존 F 케네디가 1961년 미국 제 35대 대통령이 됐습니다.

에드워드 케네디는 그 다음해 상원의원이 됐습니다. 그 의석은 형인 존 F 케네디가 전임자로 있던 자리였습니다. 불행히도 형은 대통령 취임 불과 2년만인 1963년 암살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1968년 뉴욕 선거구 출신 상원의원으로 있던 바로 위 형 로버트 케네디가 대통령에 출마했습니다. 로버트 케네디는 캘리포니아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당 후보로 선출됐습니다. 그러나 케네디 가의 불행은 또 찾아왔습니다. 로버트 후보도 로스 엔젤레스에서 암살된 것입니다.

두 형이 암살되는 비극을 당한 에드워드 케네디는 로버트 형의 장례식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EDWARD KENNEDY: "My brother need not be idealized, or enlarged in death beyond what he was in life; to be remembered simply as a good and decent man …."

“나의 형은 죽은 후에 이상화 할 필요도 없고, 실제 삶보다 화려하게 부각해야 할 필요도 없는 분입니다. 그는 단순하고

선량한 사람으로 기억돼야 할 분입니다. 잘못을 보면 그것을 고치려 애썼고, 고통을 보면 치유를 해주려 했고, 전쟁을 보면 그걸 멈추려 애쓴 분이었습니다.”

형 로버트의 죽음 이후 막내 아들인 테드 케네디가 이제 가문의 정치적 리더가 됐습니다. 그러면서 백악관으로 가는 길이 그 앞에 펼쳐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 희망은 1969년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은 자동차로 매사추셋츠 주의 채파퀴딕 섬을 잇는 다리를 건너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자동차가 추락해 물로 떨어졌습니다. 차 안에는 매리 조 코페친 여인이 타고 있었습니다. 케네디 의원은 헤엄쳐 살아났습니다. 그러나 동승한 여인은 익사했습다. 케네디 의원은 사고 현장을 빠져나가 여러 시간 동안 경찰에 신고를 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고로 그는 일주일 후 현장 도피로 유죄판결을 받고 2개월의 집행유예를 선고받았습니다. 이 사건은 공인으로서의 케네디 이미지를 크게 실추시켰습니다. 케네디 의원은 매사추세츠 유권자들에게 자신이 상원의원직을 사임해야 할 것인지를 물었습니다. 그러나 수 만명의 주민들이 사임 반대 의견을 전해왔습니다.

1980년 그는 민주당 대통령 후보경선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민주당은2차 임기 후보로 나선 지미 카터 대통령을 지명했습니다. 경선에서 떨어진 에드워드 케네디는 전당대회에서 나라가 처한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한 우리의 노력은 중단되지 않을 것이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EDWARD KENNEDY: "For all those whose cares have been our concern, the work goes on, the cause endures, the hope still lives and the dream shall never die."

‘우리의 목표와 희망은 여전히 살아있고, 우리의 꿈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케네디 의원은 강조했습니다.

두 형이 세상을 떠난 후 에드워드 케네디는 큰 가문을 이끌어가는 책임을 짊어지게 됐습니다. 형들이 남겨놓은 조카들만도 13명이나 됐습니다. 조카들에게 에드워드 케네디는 아버지 같은 존재였습니다. 에드워드의 친아들인 테디는 12살때인 1973년 암으로 다리를 절단해야 했습니다. 또 다른 두 자녀 패트릭과 카라도 건강 문제가 심각했습니다. 부인과의 관계도 악화돼 1982년 결국 갈라서고 말았습니다.

남자 조카 세명은 젊은 나이에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또 다른 조카는 무죄 판결이 나기는 했지만 1991년 강간혐의로

고소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이때 케네디 상원의원은 증인으로 재판정에 서기도 했습니다. 에드워드 케네디 자신도 음주와 여성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재혼 후부터는 생활이 차츰 안정돼 갔습니다. 그는 1992년 빅토리아 레지(발음 확인)와 재혼했던 것입니다.

에드워드 케네디는 상원에서 수백건의 법안을 상정하고, 수 천건에 달하는 다른 법안들을 지지하거나 통과에 협력하는 등 왕성한 의정활동을 벌였습니다. 케네디 의원은 상원에 진출한 초기, 형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추진했던 사회개혁 노선을 이어받아 국민 보건, 교육, 이민 개혁 등을 개선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민권운동, 선거권, 노동자 권리 등에도 역점을 두었습니다. 1990년에는 장애인 법을 제정해 신체적 정신적 장애인들에 대한 차별을 없애는 역사적 기록도 남겼습니다.

빈곤층 가정의 임산부, 유아, 어린이를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가동하는데도 적극적으로 도왔습니다. 고등교육 학자금 지원, 최저임금 인상에도 앞장섰습니다. 그는 법안 통과를 위해서라면 경쟁당 공화당과도 함께 일했습니다.

2008년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짐 매케인 의원은 케네디 의원이 중요한 법안 통과를 위해서라면 당의 노선도 벗어날수 있는 용기있는 인물이었다고 찬양했습니다.

JOHN MCCAIN: " When we agreed on an issue and worked together to make a little progress for the country on an important issue, he was the best ally you could have. .."

“우리가 나라의 중요한 법안을 놓고 함께 일하고자 할 때 최고의 동맹은 그 사람이었다. 한번 약속을 하면 조금도 의심을 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 바로 그였다. 어떻게 하자고 일단 결정을 하고나면 합의의 내용과 정신은 그대로 실천됐다.”

케네디 의원은 2001년 중요한 교육관련 법 제정에서도 공화당인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긴밀하게 협력했습니다. 그러나 이라크 전쟁과 같은 여러가지 쟁점에는 부시 정부에 날카로운 비판을 가했습니다. 그는 2002년 이라크 침공에 반대표를 던진 불과 23명의 상원의원 중 한명이었습니다.

케네디 상원의원은 미국의 외교정책에도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그는 1970년대 미국의 월남 참전을 반대하는데 가장 강력한 목소리를 낸 정치인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1985년 그는 남아공화국의 인종분리 정책이 사라지도록 압력을 가하기 위한 의회의 경제원조 삭감안을 앞장서 추진했습니다. 1980년의 난민법은 세계의 많은 난민들에게 도움을 주었습니다. 1998년에는 북 아일랜드 평화 협정도 주선했습니다.

에드워드 케네디 의원은 근면, 친밀감, 유머러스한 인품으로 상원에서 의원들로부터 많은 호감을 샀습니다. 시사주간지 타임은 2006년 “미국의 10대 위대한 상원의원”으로 케네디 의원을 선정했습니다. 타임지는 미국의 거의 모든 남, 녀, 어린이들에게 영향을 주는 엄청난 양의 입법 활동을 선정 이유로 밝혔습니다. 케네디 의원은 상원의 ‘진보파 사자’로 불리웠습니다.

2008년 상원 민주당 최고 지도자, 즉 원내총무로 있던 에드워드 케네디는 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동료 의원들에게, 새로운 시대를 여는 용기를 보여달라며 젊은 흑인 상원의원 버락 오바마를 추천했습니다.

녹취: "My friends, I ask you to join in this historic journey to have the courage to choose change. It is time again for a new generation of leadership. It is time now for Barack Obama."

“동지 여러분! 저는 변화를 향한 용기를 발휘하는 역사적 여정에 동참하자고 여러분들에게 촉구합니다. 지금은 지도부의 신 세대를 맞아야 하는 때입니다. 지금은선택할 때입니다”

같은 해 불행하게도 케네디 의원은 의사로부터 뇌암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는 정상적인 의정활동을 하기 어려웠습니다. 그후 케네디 의원은 가족과 함께 그가 좋아하는 세일링 요트를 즐기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면서도 민주당 전당대회에 깜짝 등장해 버락 오바마를 당의 대통령 후보로 지명해 달라고 역설했습니다.

케네디 의원은 또 자신의 평생 목표, 즉 모든 미국인들이 의료혜택을, 특권이 아니라 당연한 권리로 누릴 수 있도록, 낡은 장애물들을 제거해 주기를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에드워드 케네디 의원은 2009년 8월 25일, 7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보스톤의 한 가톨릭 성당에서 거행된 장례식에는 세명의 전직 대통령과 케네디 가의 대 가족들을 포함한 수많은 조문객들이 참석해 그의 명복을 빌었습니다. 에드워드 케네디는 존 F 케네디, 로버트 케네디 두 형들과 함께 알링턴 국립 묘지에 묻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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