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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아메리카] 현대 군 오케스트라의 아버지, 글렌 밀러


[인물 아메리카] 현대 군 오케스트라의 아버지, 글렌 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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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5월 마지막 월요일은 미국의 메모리얼 데이입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을 추모하고 그들의 숭고한 희생에 경의를 표하는 날입니다. 이 시간에는 아름다운 음악으로 훈련과 전투에 시달리는 장병들의 사기를 높여주다 젊은 나이로 사라진 음악인 글렌 밀러 소령의 이야기를 전해드리겠습니다.

매년 5월 마지막 월요일은 미국의 메모리얼 데이입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을 추모하고 그들의 숭고한 희생에 경의를 표하는 날입니다.

이 시간에는 아름다운 음악으로 훈련과 전투에 시달리는 장병들의 사기를 높여주다 젊은 나이로 사라진 음악인 글렌 밀러 소령의 이야기를 전해드리겠습니다.

글렌 밀러는 빅밴드 악단을 창립하고 지휘자, 작곡가, 트롬본 연주가, 음반 제작자 등 다방면에 걸쳐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음악인이었습니다. 빅밴드란 열 명 이상의 단원들로 편성한 앙상블 형태의 재즈 밴드를 말합니다. 이는 1940년대부터 일반적인 재즈 악단의 형식이 됐습니다. 글렌 밀러는 트럼펫의 루이 암스트롱, 클라리넷의 베니굿맨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연주가이기도 했습니다.

스윙재즈의 대가인 그는 1930년대, 밴드 분야의 음반판매를 석권하며 큰 인기를 모았습니다. 성공가도를 달리던 그는 나라를 위해 봉사하겠다는 일념으로 군에 자원 입대해, 군 오케스트라 단장을 맡았습니다. 그리고, 많은 연주를 통해 전선에서 싸우는 장병들을 위로했습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는 대서양 상공에서 군용기 실종으로 사라져버린 비운의 음악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글렌 밀러는 1904년 3월 1일 미국 중부 아이오와 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 부터 음악에 재능을 보인 글렌은 아버지가 사준 맨돌린으로 악기 연습을 했습니다. 그후에는 혼으로 악기를 바꾸었습니다. 14살때는 다시 트럼본으로 바꿉니다. 글렌 가족은 미조리, 네브라스카 등을 전전하다 1918녀부터는 콜로라도주에 정착했습니다. 글렌은 콜로라도 포트 모건에서 고등학교를 다닐때 학교 밴드에서 활동했습니다. 1921년 고교를 졸업한 글렌 밀러는 보이드 센터스 (Boyd Senter's)오케스트라에서 트롬본을 연주하는 직업 음악인이 됐습니다.

심-1923년에는 오케스트라를 그만두고 콜로라도 대학교에 진학했습니다. 그러나 1년만에 자퇴하고 다시 악단 생활로 돌아갔습니다. 로스 엔젤레스에서 잠시 연주를 한 밀러는 동부인 뉴욕으로 가 러시아계 음악가 조셉 슐린지로부터 음악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트롬본의 프리랜서 연주가와 작곡가로 활동하면서 타미 도시스 (Tommy Dorsey's)라는 악단의 단장으로 활동했습니다.

이어 그는 자신의 악단을 조직했습니다. 31세때에는 자신의 악단 이름으로 첫 음반을 냈습니다. 그러나 밀러는 상당 기간 자신의 정체성을 놓고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러다 1930년대 중반에이르러서야 스스로를 밴드리더와 작곡가로 정착시켰습니다. 밀러의 명성은 35세 때인1939년부터 뉴욕 주 유명 카지노에서 연주를 하면서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밀러 악단의 연주는 인기가 높아지면서 거의 매일 여러 곳의 라디오로도 방송됐습니다. 방송의 영향으로 그는 일반 대중에게 더욱 널리 알려졌습니다.

1939년에 나온 "Wishing”은 처음으로 큰 힛트를 기록했습니다. 같은 해에 뒤따라 나온 "Moonlight Serenade"는 그보다 더 큰 인기를 모은 싱글 음반이 됐습니다. 밀러 오케스트라의 특징인 스윙 재즈 스타일은 전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댄스 곡이 됐습니다. "In the Mood" 는 그의 대표곡처럼 유명해 졌으며, 널리 사랑을 받았습니다.

"Tuxedo Junction"과 "Pennsylvania 6-5000" 등도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1939년에서 1942년까지 ‘글렌 밀러와 그의 오케스트라’ 음반은 밴드 음악분야에서 최고 매출을 기록했습니다. 그는 1941년 처음으로 영화에도 출연했습니다. Sun Valley Serenade라는 영화였습니다. 이 영화에서는 그의 대표곡이라 할수 있는”Chattanooga Choo Choo" 가 연주됐습니다.

다음 해인 1942년에는 Orchestra Wives 에도 출연했습니다. 그러나 밀러는 그같은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었음에도 나라에 봉사하겠다는 생각에 음악활동은 잠시 접어두고 군대에 들어갔습니다. 군에서는 38세인 그에게 소령 계급을 수여하고, 군 오케스트라의 지휘를 맡도록 했습니다. 그는 공군에 소속돼 공군 오케스트라를 지휘했습니다. 그의 주 임무는 음악을 통해 2차 세계대전에 참전 중인 장병들을 위로하고 사기를 올리주는 것이었습니다. 이로써 밀러는 현대적 군 오케스트라의 아버지가 됐습니다.

그는 여러 군 부대를 돌며 많은 연주를 했습니다. 군에서의 임무는 민간에 있을 때보다 더 분주했습니다. 특히 그는 군 밴드에 완전한 현악기 부분을 추가해 더욱 규모가 큰 악단을 만들었습니다. 이처럼 활발하게 임무를 수행중이던 밀러 소령은 1944년 영국으로 갔습니다. 아이젠하워 장군이 지휘하는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앞두고 미군 장병들을 위해 연주를 하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작전의 성공으로 프랑스가 해방되자 이제 밀러에게는 파리 공연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1944년 12월 12일, 파리 공연을 준비하기 위해 런던을 떠나려던 밀러는 기상 악화로 공군기가 뜨지 못해 출발이 몇 차례 지연됐습니다. 12월 15일, 드디어 밀러는 다른 3명의 장교들과 함께 공군 UC-64A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밀러 일행은 해방된 도시 파리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그가 탄 비행기도 사라졌습니다. 군에서는 영국 해협을 여러 달에 걸쳐 집중적으로 수색했지만 끝내 시신도 항공기 잔해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글렌 밀러 소령은 동승했던 장교들과 함께 실종으로 처리됐습니다.

미국의 방송들은 이 놀라운 소식을 즉각 긴급 뉴스로 보도했습니다. 미 공군 밴드 지휘자이며 인기 최고의 미국 오케스트라 지휘자였던 글렌 밀러 소령이 영국에서 파리로 가던 중 실종됐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1년 후에는 전사로 공식 분류가 됐습니다. 전사 결정은 부인과 두 아이들에게도 전해졌습니다. 밀러 소령에게는 동성무공훈장이 추서됐습니다. 알링턴 국립묘지에는 비록 유해는 없지만, 음악에 불타는 열정적인 삶을 살다, 흔적도 없이 사라져간 그의 추모비가 세워졌습니다.

40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에서 사라진 후에도 밀러의 오케스트라는 한동안 연주를 계속했습니다. 그가 남긴 인기 곡들도 그후 여러 해 동안 인기 순위 상위 자리를 지켰습니다. 1954년에는 지미 스투어트가 주역을 맡은 영화 글렌 밀러 스토리가 나와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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