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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아메리카] 현대 미술을 새롭게 정의하다, 로버트 라우센버그


[인물 아메리카] 현대 미술을 새롭게 정의하다, 로버트 라우센버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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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간에는 지난 반세기 동안 미술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는 로버트 라우센버그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오랜 생애를 통해 회화, 조각, 판화, 심지어 댄스까지 광범위한 분야에 걸친 탐구를 계속한 라우센버그는 창의적이고 과감한 예술로 세계 미술계의 혁명적인 존재가 됐습니다.

이 시간에는 지난 반세기 동안 미술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는 로버트 라우센버그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오랜 생애를 통해 회화, 조각, 판화, 심지어 댄스까지 광범위한 분야에 걸친 탐구를 계속한 라우센버그는 창의적이고 과감한 예술로 세계 미술계의 혁명적인 존재가 됐습니다.

미국 미술계에서 그 만큼 에너지 넘치는 상상력을 발휘한 인물은 없다는 평가를 받는 로버트 라우센버그는 1925년 텍사스 주에서 태어났습니다. 본명이 밀튼 어니스트 로젠버그였던 그는 포트 아더 (Port Arthur)라는 작은 읍, 신앙심이 깊은 부모들 밑에서 자랐습니다. 라우센버그는 텍사스 대학교에서 약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러나 약학 전공으로 학위를 받지는 않았습니다. 1940년대 제 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자 그는 군에 입대해, 캘리포니아에 있는 군 병원에서 복무했습니다. 라우센버그는 캘리포니아에 있는 미술관에서 처음으로 많은 미술 작품을 구경하게 됐습니다. 그걸 본 라우센버그는 회화를 배운적이 없었지만 화가가 되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가 생겼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그는 캔사스 시티 미술학교에서 그림을 배우고 이어 프랑스 파리에 가서도 공부했습니다. 라우센버그는 이름을 밀튼 대신 로버트로 바꾸었습니다. 로버트가 훨씬 예술가 답게 들렸기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무렵 라우센버그는 여류 화가 수전 웰을 만났습니다. 두사람은 결혼하고 아들 하나를 두었습니다.

라우센버그는 노스 캐롤라이나 주에 있는 블랙 마운틴 대학에서 계속 미술을 공부했습니다. 라우센버그는 그곳에서 현대 미술과 댄스를 새롭게 정의 하는데 도움을 준 일단의 예술가들을 만났습니다. 특히 안무가 머스 커닝햄, 음악가 존 케이지와는 가까운 친구가 됐습니다. 그는 또 교수이자 화가인 조셉 앨버스로부터도 영향을 받았습니다. 라우센버그는 앨버스가

자신에게 사물을 관찰하는 개인적인 감각을 개발하는 길을 가르쳐주었다고 말했습니다. 앨버스는 또 학생들에게 작품에 사용할 다양한 자료들을 찾아내는 안목을 가르쳤습니다.

1949년 라우센버그는 보다 역동적인 예술세계에 합류하기 위해 뉴욕으로 옮겼습니다. 그는 흰 색만을 사용하는 연작 회화를 제작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검은 색만을 사용하는 그림을 제작했습니다. 그는 조명이 작품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관람객이 그림 앞을 지나갈 때, 그 그림자가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등도 연구했습니다.

1950년대 중반이 되자 그는 컴바인(Combines)이라 불리우는 혁신적 시리즈를 만들었습니다. 대형 그림과 조각을 합친 것으로, ‘그림과 조각은 별개의 것이다’라는 보통의 관념을 깨뜨리는 작품이었습니다. 컴바인에는 작가가 뉴욕의 거리에서 수집해 온 상자, 책, 라디오 같은 것들이 등장했습니다.

1955년 나이 서른이던 때 Bed, 즉 침대라는 제목으로 만들어진 컴바인은 그의 작품 중 특히 뛰어난 것으로 평가받는 것 중 하나입니다. 벽에 걸린 침대에는 물감이 뿌려진 침대보, 조각, 담요, 베개 등이 있습니다. 뿌려진 물감은 잭슨 폴락과 같이 추상 표현주의 작가로 불리우는 사람들의 기법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라우센버그가 그들과 다른 것은 대상 물건을 일상생활에서 흔히 접하는 것들을 사용한다는 점이었습니다. 그후 이른바 Pop Art 예술가들은 보통의 물건들도 작품에 포함하며 범위를 더욱 넓혔습니다.

1959년 라우센버그는 또 하나의 유명 컴바인 ‘모노그램’을 제작합니다. 여기에는 박제된 염소와 고무 타이어가 중앙에 자리하고 그 주변으로는 오래 된 신문, 돌멩이, 구두 조각과 테니스 공이 널려 있습니다.

라우센버그는 비누나, 거울, 코카콜라 병 같은 것들을 보기 흉하다고 느낀 사람들은 불행할 거라 말했습니다. 왜냐 하면 불행한 것들과 늘 함께 살아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로젠버그의 작품들은 사람들이 시간을 내어 들여다보면 그런 예상치 못한 것이 아름답게 느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도시 환경에서 나오는 모든 물질들에 미를 부여한 것입니다.

로버트 라우센버그는 오랫동안 다른 형식의 예술을 탐구하고 혼합하는 일을 계속했습니다. 그는 프린트 된 이미지와 화학물질로 쓰인 문자 위에 종이를 올려 놓고 그것을 연필로 그리는 기법을 개발했습니다. 과감한 발명이라 할수 있는 석판인쇄 기법을 개발해 판화 예술계의 관심과 찬사를 받기도 했습니다.

1964년 작 Shade, 즉 “그늘”은 제본, 판화, 그리고 조각 기법을 혼합한 작품입니다. 흑백 이미지를 플래스틱 천에 프린트 한 다음 그것을 접어 상자 안에 담습니다. 그리고 상자에 빛을 통과시키면 그것은 새로운 형태의 책과 같은 영상으로 나타납니다. 1967년 작품 “부스터(Booster)”는 수동으로 제작한 사상 최대의 석판화였습니다. 이처럼 그는 각기 다른 미술계의 경계를 허물었습니다.

라우센버그는 1960대에 세계 미술계의 유명인사가됐습니다. 1964년에는 이탈리아에서 열린 국제 비엔날레에서 미국 현대작가로는 처음으로 대상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유명해졌다고 해서 새로운 것을 찾는 그의 추구가 느슨해진 건 아니었습니다. 그는 스크린 프린팅에 사용하는 대형 천 위에 여러가지 모양의 그림을 박아넣었습니다.

1974년에는 호어프로스트 시리즈(Hoarfrost Series)를 포함한 여러가지 연작품을 내놓았습니다. 그는 물결치는 실크와 타페타 천 위에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의 ‘카드보드 시리즈’는 납작하게 한 상자들을 모아 재미있는 벽의 조각상을 만든 것입니다.

라우센버그는 다른 작가와 함께 일하는 것을 극력 지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1950년대 초, 그는 부인 수전과 함께 작품 활동을 했습니다. 두사람은 특수 청사진 용 종이 위에 누워있는 사람을 밝은 등불로 비추어 대형 작품들을 만들었습니다.

그는 또 안무가 머스 커닝햄과 여러 무용인들의 작품을 위한 무대 셋트와 의상도 디자인했습니다. 그는 미술가 제스퍼 존스와도 아이디어를 교환하고 함께 일했습니다. 그는 뉴욕의 유니버살 리미티드 아트 에디션(Universal Limited Art Editions), 타티아나 그로스맨(Tatyana Grossman)의 작업실 등에서 함께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라우센버그는 벨 전화 연구소 엔지니어와 함께 실험 예술과 기술, Experiments in Art and Technology라는 비영리 단체를 창설했습니다. 그같은 그룹을 만들게 된 계기는 1966년 뉴욕에서 있었던 9차례의 연속 공연이었습니다. 당시 엔지니어와 미술가들은 미술과 기술 두 가지를 혼합한 실험적 공연을 펼쳤었습니다.

그리고 1985년에는 라우센버그 해외 문화교류, 약칭 ROCI를 출범했습니다. 목적은 미술이라는 언어를 통해 다른 나라와 교류를 증진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중국, 티베트, 우즈베키스탄, 쿠바, 소련 등을 방문해 그곳 예술가 들과 함께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공동으로 만들어진 작품들은 해당 나라는 물론 다른 나라의 여러 미술관에서 전시 공연됐습니다. 1991년에는 이들 작품을 워싱턴에 있는 미 국립 미술관에서 전시했습니다. 이 전시에는 이들 나라의 미술 작품들도 함께 소개됐습니다.

로버트 라우센버그의 작품들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여러 미술관에서도 전시됐습니다. 그중에는 1981년 프랑스 파리의 퐁피두 센터, 1997년 뉴욕의 구겐하임 미술관이 있습니다.

2005 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도 라우센버그의 작품들을 전시했습니다. 생애 후반이 되면서 그는 플로리다 해안 캡티바 섬 에 있는 자택에서 작품할동에 집중했습니다. 그곳은 스투디오 공간이 대단히 넓어 대형 작품을 만들수 있었습니다.

라우센버그는 2002년 뇌졸중을 겪었습니다. 그 결과 몸의 오른 편을 쓸수 없게 됐습니다. 그러면서도 라우센버그는 보조원의 도움을 받아 작품할동을 계속했습니다. 그는 삶과 예술 사이의 경계를 허물고, 예술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을 깼습니다. 그는 예술과 과학을 결합시키는 새로운 시도도 했습니다.

꺼지지 않은 창작욕과 무한한 상상력을 발휘했던 로버트 라우센버그는 2008년 5월 12일 플로리다 자택에서 82세를 일기로 타계했습니다.

현대 미술에 대한 그의 발명가 식 접근은 미래 세대의 예술가들과 미술 애호가들에게 두고 두고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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